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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고구려의 무기

younghwan 2010. 1. 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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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은 도성과 주요 교통로에 많은 성을 축조하였으며, 철기병을 중심으로 강한 기마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건국이래 북방 기마민족과 대응하기 위해서 산성을 중심으로 한 국가 방어전략이 체계화 되어 있었고 그 전략은 조선시대까지 유효한 전략이었다. 지금의 평양성은 고조선이래 천혜의 요새인 지역으로 적에 의해서 성문이 열린적이 없는 성이다. 평양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개축된 성으로 고구려시대 성돌은 현재 3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사람이 그려진 벽화 편.

평안남도 남포시의 쌍영총에서 수습된 벽화조각으로 널길벽 인문 행렬도의 일부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에서 당시 고구려인의 옷치장과 말갖춤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인물은 '절풍'이라는 고구려 특유의 모자에 새깃을 꽂아 장식한 '조우관'을 쓰고 있다. 재갈과 고삐를 이용해 달리는 말을 부리며, 말 위에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장과 발걸이(등자)를 사용하고 있다. 고구려 무덤 벽화 사냥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모습을 통해 활쏘기에 능했던 고구려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의 말갖춤

말갖춤에는 말을 부리기 위한 재갈과 고삐, 말 위에서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안장과 발걸이, 말을 장식하기 위한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말을 길들여 타는데 가장 먼저 고안된 도구는 고삐일 것이나,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재갈은 말의 입안에 단단한 물질을 넣고 이를 당겨 말의 혀를 자극하는 통제수단이다. 이 가운데 금속제 재갈과 견고한 재질의 안장, 발걸이를 사용하면서 기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말갖춤은 무덤과 산성, 보루 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무덤 벽화를 통해 그 모습이 전해지며, 고대 동아시의 말갖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아차산성에서 발굴된 고구려인의 무기. 마름쇠, 화살촉, 쇠뇌촉, 도끼, 미늘갑옷편 등 다양한 철제 무기들이 있다.

고구려의 철제 농기구

평양성 성돌에 적힌 기록. 평양성 내성 남벽에 박혀 있던 것으로 현재 북한의 조선 중앙 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인 장안성이다. 양원왕때 성의 축조가 시작되어 평원왕 28년에 이 곳으로 도성을 옮기게 된다. 이 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삼아 평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각기 언제 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내성과 왜성에서 발견되어 공사시기, 공사 책임자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전해 주고 있다. 이런 평양성 성돌은 현재 6점이 알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은 실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3점은 조선시대 고문헌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는 도성과 주요 교통로에 수백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인은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산성을 쌓아 비교적 적은 힘으로 방어력을 최대로 증대시켰다. 산성과 대비되는 평지성은 주로 도성지역에 축조되었다. 군사적, 방어적 성격이 강한 산성에 비해 평지성은 거주 기능이 뛰어나 다양한 정치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평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전쟁이나 위급 시에는 산성으로 옮겨가 대항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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