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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통일신라 왕경에서의 생활, 관료

younghwan 2010. 1. 1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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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왕경을 지방과 구분하였으며,도시 구조도 정비하고, 정비된 왕경을 둘러싼 산성을 축조하였다. 신라는 또한 삼국시대 당나라를 다녀온 김춘추과 당나라의 복식과 제도를 신라에 도입한 이래 다양한 율령과 제도를 정비하여 관료제를 국축하였으며, 토용에서의 복식과, 기와와 각종 생활용구에 적힌 글씨로 관료제 사회에 대한 흔적을 많이 남겨 놓고 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은 경주 안압지 연못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의례적인 면이 많지만, 안압지 출토 유물은 실제 사용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라 토용. 여인상과 문관상. 토용을 ㄴ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떠 만든 것으로 당시의 복식을 잘 묘사하고 있다.

관료제와 토용
삼국 통일 이후에 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였다. 이전에는 왕경인과 지방민에게 각각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으나, 통일 후에는 동일한 벼슬을 주었다. 이 시기에는 율령에 기초하여 국가기구를 조직하였고 낡은 영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문서행정이 필요하였다. 이에 문서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를 양성하였고 이를 위해 국학 등의 교육기관도 정비되었다. 관료제의 정비는 중국 문화와 복식의 수용으로 엿볼 수 있다. 당나라에 간 김춘추가 당의 복식을 받아들여 당나라식 관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복식은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과 허리띠 장식에서 잘 알 수 있다.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 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글자가 새겨진 벼루와 토기들

통일신라의 정비된 관료제를 잘 보여주는 유물들. 각종 도장과 당나리에서 도입한 복식을 반영한 허리띠 장식이 있다.

기와 파편에 기록된 당시의 문자

도량형이 정비되었음을 보여주는 저울 추

통일신라 시대에 사용된 목간, 목간은 주로 영수증과 같은 용도로 많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금속으로 만든 문고리 장식

드라마 선덕여왕에 등장했던 주령구.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유물의 복제품으로 진품은 발굴당시 부주의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보상화 무늬벽돌. 보상화무늬는 서역과의 교류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한다. 이 벽돌은 대표적인 보상화무늬 유물이다.

짐승무늬 벽돌

보상화무늬는 고대 동양미술에서 연화무늬 다음으로 많이 사용된 것이다. 본래는 메소포타미아 유역과 그리스 등 지중해와 오리엔트의 문화교류에 의해 불교의 동점과 함께 중국을 비롯, 동북아시아에 전해져 성행된 팔메트계 당초무늬의 하나였다. 불교미술품의 장식문양으로 많이 사용되었으나 7세기경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종교적인 무늬가 아닌 단순한 장식무늬로 성립되었다. 조각·회화·직물·와전(瓦塼) 등에 사용되었으며 동일한 바탕에서 연화무늬·인동무늬·금무늬·동물무늬·당초무늬와 함께 시문(施文)되기도 한다. <출처: 브리태니커>

무덤 문고리와 장식

사리함과 함께 발굴되는 진단구

뼈항아리

왕경의 정비
삼국통일 후에 신라는 수도 금성을 금경, 대경이라 부르고, 지방을 9주5소경으로 나누었다. 수도인 왕경을 지방과 구별하여 불렀으며, 도시 구조도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갔다. 새로이 정비된 왕경을 둘러싸고 산성을 수축하여 왕경을 외부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였다. 신라 왕경의 정비는 5세기 후반부터 꾸준히 이루어져 왔으며, 신라 도성의 형성과정은 경주분지 내 평지의 개발과 짝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주 분지 내의 왕경은 격자형 가로망을 질서정연하게 구획하여 방리를 설정하였고 각 방리는 도로를 통해 구획되었다. 왕경은 궁궐이 있던 월성을 중심으로 관아, 귀족의 저택인 금입택, 원지, 사찰 등을 배치하여 고대 도시를 완성하였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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