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 호족의 시대와 후삼국 통일

younghwan 2011. 12. 6. 16:19
반응형

 통일신라 말기는 계속된 왕위쟁탈전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회였으며, 중앙정부 통제력의 약화로 지방에는 다양한 호족세력이 등장한 시절이었다. 고려가 건국하기까지 약 100년에 가까운 세월이 이 시기에 속하지면,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던 까닭에 많은 유물이 남아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에는 많은 사실들이 적혀 있으나, 유물로는 딱히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고려태조의 후삼국 통일
고려는 한때 후백제에 비해 다소 열세였으나, 태조 왕건이 불교계와 6두품 출신 지식인을 우대하고, 혼인정책 등으로 크고 작은 호족들을 적극 포섭하면서 점차 형세를 역전시켜갔다. 특히 "백성으로부터 조세를 거둘 때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백성들이 바쳐야 할 세금을 크게 완화한 것은 통일신라의 고대적 수취에 반발했던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려가 신라의 자진항복(935)을 받아내며 후백제를 제치고 후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었던 것은 이처럼 신라의 고대적 골품체제에 저항한 광범위한 사회구성원의 지지를 이끌어낸 태조의 안목과 경륜에 힘입은 바 크다. 역사상 두 번째의 통일국가인 고려는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거란에 망한 발해(926)의 유민들을 널리 포섭하는 한편, 북진정책을 통해 통일신라의 영역을 넘어 옛 고구려 영토를 조금이나마 회복해감으로써 통일신라보다 진전된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출처:중앙박물관>



오대산사길상탑지. 전몰 승려들을 위로하는 탑의 기록으로 오대산사 길상탑을 위한 것이었으나,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에 봉안되었다. 앞면에는 통일신라 말인 진성여왕 대에 전쟁으로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모습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며 길상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전몰승려들을 위로하는 탑의 기록, 오대산사 길상탑지, 진성여왕 9년(895),
합천 해인사 묘길상탑에 봉안했던 탑지 4매 중 하나이다. 원래 오대산사의 길상탑을 위한 것이었으나 어떤 연유로 인해 해인사 묘길상탑에 함께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통일신라 말인 진성여왕 대에 전쟁으로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진 모습과 전란 중 사망한 승군들의 넋을 위로하며 길상탑을 세운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도 승군을 애도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해인사 입구에 위치한 길상탑


'오대산 길상탑지'에 기록된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상
"기유년(889년)에서 을묘년(895년)까지 7년 동안, 천지가 온통 난리로 어지럼고 들판은 전쟁터가 되니,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행동이 짐승과 같았으며, 나라는 기울어진 듯하고 재앙이 절에까지 이르렀다. 나라와 삼보를 지키려는 바람은 승속이 같은데 칼날이 숲속에 난무하고 몸은 바윗등에서 잃었구나."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후백제 연호가 새겨진 승탑의 탁본. '정개 10년 경오년에 '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후백제의 연호가 새겨진 승탑의 탁본, 후백제, 견훤왕 10년(910).
남원 실상사에 소재한 필운화상부도의 명문을 탁본한 것으로 "정개 10년 경오년(910)에 (부도를) 세운다"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정개"는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후백제 왕 견훤 때의 연호로 보인다. 명문에 따르면 필운화상은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의 개조 홍척의 제자라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
전주성'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수막새. 후백제 궁성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수막새이다. 회갈색 막새로서 가운데에 '전주성全州城'이라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전주성"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수막새, 후백제, 견훤왕 9년(900) 경, 전주 동고산성 출토
후백제 궁성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출토된 수막새이다. 회갈색 경질 막새로서, 가운데에 "전주성 全州城"이라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고, 가운데와 가장자리 사이에는 연꽃무늬를, 가장자리에는 구슬무늬를 각각 둘렀다. 수키와의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고 막새 부분도 많이 닳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담무갈보살에게 절하는 고려태조. 나무판에 흑칠을 하고 양면에 각각 아미타구존도와 담무갈.지장보살현도를 금선으로 그려넣은 작품이다. 금강산을 담은 그림으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담무갈보살에게 절하는 고려태조(복제품), 1307년,
나무판에 흑칠을 하고 양면에 각각 아미타구존도와 담무갈.지장보살현신도를 금선으로 그려 넣은 작품이다. 보이는 명 왼쪽 중간쯤에 금강산 배점에 엎드려 담무갈보살을 경배하는 고려 태조의 모습이 작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담무갈보살을 친견한 태조가 후에 정양사를 세웠다는 설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에는 지장보살과 함께 승려.속인이 자그마하게 묘사되어 있다. 금강산을 담은 그림으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왕씨 족보에 그려진 태조 왕건 초상화. 구한말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호족의 시대와 후삼국 통일
9세기 통일신라에서는 극심한 왕위 쟁탈전으로 인한 지방 통제력의 약화를 틈타 새로 지방 호족들이 대두하였다. 군진 세력, 낙향한 왕실 귀족, 해상무역 세력 등 다양한 출신의 호족들은 무거운 세금에 반발한 농민군들을 이끌며 세력을 키워갔다. 그 중에서 특히 큰 세력은 나라를 세우기까지 하였는데,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그러하다.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이미 쇠락한 통일신라와 더불어 이른바 후삼국을 이루었다. 후삼국 통일의 주역은 궁예의 신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세운 고려였다. 송악 지방 호족 출신인 왕건은 백성들의 세금을 크게 줄여주고, 크고 작은 호족들과 승려, 유교 지식인들을 적극 포용함으로써 민족 재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