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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김제 모악산 금산사,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

younghwan 2010. 9. 1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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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 금산사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미륵신앙을 대표하는 사찰로 미륵불을 모셨던 장륙전(금당)이 실제로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사찰이다. 법주사가 목탑으로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 금산사는 장륙전으로 당시 모습의 일부나마 보여 주고 있다. 금산사는 통일신라 불교의 전성기인 신라 경덕왕때 진표율사에 의해 현재와 같은 사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오층석탑 등 당시 유물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우리나라 법상종의 중심지로서 후대에 세워졌다고 볼 수 있지만 중심불전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이다. 하지만 장륙전과 대적광전 사이의 관계는 애매모호한 점이 있고, 통일신라시대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석탑은 없고 목탑은 그 흔적만 남아, 지금은 대광전으로 이름이 바뀌어 미륵전과 마주보고 있다. 또한 금산사가 세상에 크게 알려진 것은 후삼국시대 후백제의 왕 견휜이 아들 신검에게 유배되었던 곳이 이 금산사였기 때문이고, 그 전에도 견훤이 금산사를 크게 보수하였다고 한다. 모악산 금산사가 있는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 곳으로 호남평야가 백두대간과 만나기 시작하는 곳에 있는 큰 산이 모악산이라고 할 수 있다. 농업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 호남평야의 경제력에 의해서 금산사와 같은 대형사찰이 삼국시대이래로 유지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김제 금산사 경내 풍경. 해가 지는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장륙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륵전이 있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적광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광전이 있고, 중심불전 앞 마당이 상당히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법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뒷편에는 부처님 사리를 보시는 방등계단과 오층석탑이 있다.

1. 들어가는 길, 일주문


금산사는 모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지만 사찰의 형태는 평지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모악산을 등반하려는 등산객들이 많은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걸어가는 길은 언덕길이 아니라 가로수가 우거진 산책로 같은 느낌을 주고 있으며, 물이 많은 산이라서 그런지 도로 주변 작은 도랑으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사찰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서 금강문까지는 약 15분정도 도보로 걸어가는데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상쾌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다.

2. 금강문, 사천왕문


보통 일반적인 사찰의 경우 천왕문 또는 금강문 하나만 있으며, 수도권 지역 사찰의 경우 출입문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비해 금산사는 천왕문과 금강문을 별도로 두고 있다. 현재의 금강문과 천왕문은 오래된 문화재는 아니고 내력 또한 깊지 않아 보이지만, 두개의 출입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사찰의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당간지주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당간지주 중에서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이라 한다. 당간지주가 사찰입구인 금강문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은 금강문과 천왕문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균형미가 있게 만들어졌으나, 장식적인 면의 거의 배제하고 있다.

4. 강당인 보제루와 요사채


금산사는 전북 최대 규모의 사찰로 미륵전을 포함하여 많은 전각들을 가지고 있지만, 많은 사찰 전각이 있지만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도 많다. 그 중 사찰 경내 입구라 할 수 있는 누각 건물인 보제루와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채들이 대표적으로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5. 미륵전, 통일신라 장류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불전



금산사 미륵전은 통일신라시대 사찰의 구성 요소인 금당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많지 않은 불전 중의 하나이다. 신라 고도 경주 황룡사 금당인 장륙전의 모습을 상상할려면 이 곳 금산사 미륵전이나,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을 연상하면 될 것 으로 보인다. 장륙전은 금산사처럼 외부에서 보면 3층 건물로 보이지만, 내부는 통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산사 미륵전처럼 황룡사 장륙전 내부에는 엄청난 규모의 청동불상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 모습은 일본 나라의 동대사에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미륵전은 수차례에 걸쳐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중건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왔으며, 삼국시대 이래 우리나라 사찰의 오래된 전형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물론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비슷한 형태의 사찰 건물이 많이 남아 잇는 것으로 보인다.

6.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금산사의 중심불전인 대적광전이다. 원래의 건물은 1986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건물은 1994년에 복원한 건물이라 한다.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불전으로 이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했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불교 신앙의 흔적으로 보인다. 현재는 이 대적광전이 주불전으로 되어 있으나, 금당의 배치상으로는 통일신라 이래로 미륵전이 주불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대웅전을 비롯한 불상으로 옮겨지면서 주불전이 바뀐것으로 보인다.


7. 목탑이 불전으로 변한 대광전


금산사 대광전은 미륵전 정면에 위치한 작은 법당이다. 원래는  미륵전 마당 가운데 있는 목탑이었던 건물로 조선시대에 금산사가 중건될때 목조탑을 법당 건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전통적인 가람배치에 있어서 금당 앞에 있던 목탑으로 보인다. 지금도 지붕에는 목탑이었을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8. 명부전, 조사전, 나한전, 원통전, 삼성각


금산사는 대형 사찰로 많은 전각들을 두고 있다. 그 중 미륵전과 대장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근래에 세워진 건물들로 보인다. 절의 규모에 맞게 많은 전각들을 새로 짓거나 중건한 것으로 보인다. 미륵전 맞은편 대적광전 서쪽에는 명부전과 대장전이 있고, 대적광전 뒷편에 조사전, 나한전, 삼성각이 있다. 특이하게 강당 동쪽에 원통전이 자리잡고 있다.

9. 육각다층석탑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기단부는 화강석으로 탑신은 점판암으로 상륜부는 화강석으로 만들었다. 원래부터 이런 형태인지 아니면 후대에 보완한것인지 알 수 없다.

7. 대장전 앞 석등, 범종각


금산사 미륵전과 마주하고 있는 작은 불전인 대장전 앞에는 석등이 놓여 있고, 남쪽으로는 범종각이 북쪽으로는 명부전이 있다. 대장전과 명부전 사이에는 미륵신앙을 강조하는 사찰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적힌 큰 돌기둥이 자리하고 있다. 대장전 앞에 있는 석등은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석등으로 그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고,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8. 석련대, 노주


금산사 중심불전인 대적광전 앞마당 좌우에 위치한 석련대와 노주이다. 석련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탑으로 석조연화대좌라 불리며, 노주 또한 불상을 얹는 대좌처럼보이만 실제로 그 용도를 알 수 없어 노주라 불린다. 두개의 석물 양식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이나, 그 만든 형태를 보면 고려전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련대와 노주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석물처럼 보이지만 문화재로서의 독창성과 역사성 등이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다.

9. 방등계단 앞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인 사리계단인 방등계단 앞에 있는 오층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드래로 따른 고려시대 작품으로 석탑 구성요소간 비례가 잘 되어 있는 편이고,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통일신라 석탑의 모양을 하고 있다. 사리계단 앞에 있는 이 석탑은 고려시대 석탑의 기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경내 한 가운데에서 신앙의 중심이었으나, 이 석탑은 사리계단을 보좌하는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10. 방등계단과 적멸보궁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1635년에 기록된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백제 법왕 2)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1492년에 씌어진 〈금산사5층석탑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인 가섭불 때의 절터를 중흥한 것이라 하여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금산사는 신라 경덕왕 때인 762년에서 766년 사이에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중창되어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후로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진표 이후에 후백제 견훤에 의해 부분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초 1079년에 법상종의 대종사(大宗師)인 혜덕(慧德)왕사가 주지로 부임해 간경·법석(法席)을 주관하는 장소인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는 등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도량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석연대(石蓮臺)·5층석탑·노주(露柱) 등이 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암자와 건물 40여 채가 불타버렸으나 1601년(선조 34) 수문대사(守文大師)가 재건을 시작하여 1635년 완공했다. 조선 고종 때 미륵전(彌勒殿)·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 대적광전·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6년 다시 화재로 대적광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 절에 남아 있는 유물·유적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조형물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석조유물은 노주(보물 제22호)·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 보물 제24호)·5층석탑(보물 제25호)·석종(石鐘 : 보물 제26호)·6각다층석탑(보물 제27호)·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28호) 등이 있다. 또한 미륵전(국보 제62호)·대적광전이 있었고, 그밖에 대장전·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일주문·금강문·보제루(普濟樓)·종각·중향각·칠성각 등의 건물과 수계(受戒)의식을 행하는 방등계단(方等戒壇)이 자리잡고 있다. <출처: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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