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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터

원주 법천사지, 남한강 부근에서 크게 번창했던 절터

younghwan 2010. 10. 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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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법천사지는 조선시대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내륙수운인 남한강 수운의 중간쯤에 위치하였으며, 횡성에서 흘러내려오는 섬강이 남한강과 만나는 지점 부근에 위치한 부론면 중심지에 있다. 지금도 충북 충주와 강원 원주를 연결해 주는 남한강 대교가 있고,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나루터 중에 하나였던 곳이다. 이 곳 부근에는 법천사지 말고도 거돈사지, 청룡사지라는 거대한 사찰터가 있는데 각각 국보급 문화재로 선정된 부도탑을 가지고 있었던 곳이다. 이를 보면 동시대에 비슷한 내력을 가지고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고려시대에 이름난 고승들이 이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남한강 수운을 통해서 얻은 막대한 경제력이 이 사찰 유지를 뒷받침했던 것으로 보인다.

 법천사지는 부론면 사무소가 있는 남한강변에서 약간 안쪽에 위치한 사찰로 신라말레 처음 세워졌다가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된 사찰이다. 여기서 보면 고려시대에 크게 중창되었다가 없어진 사찰들이 많은데 대부분 교통요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잠시 쉴 수 있는 역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기능이 없어지면서 쇠퇴한 것으로 생각되는 면이 있다. 법천사 또한 고려시대 정현이라는 고승이 주지로 있으면서 크게 융성했다고 하며, 임진왜란때 건물이 전소되면서 사찰로서 기능이 없어졌다고 한다.


원주 부론면 법천리 길가에 위치한 법천사지. 한강나루터가 있는 면소재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 절은 서울과 강원도를 여행하던 여행객들과 영남에서 죽령을 넘어서 서울로 오가던 여행객들이 쉬어가기에 적당한 위치에 소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법천사지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에 들면서 쇠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지금은 부도탑과 부도탑비가 있는 자리 부근에 있었던 건물이 부도전지 부근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반면에 절의 입구를 알려주는 당간지주는 절터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봐서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크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법천사지 부도탑 부근에는 있었던 3동의 건물은 석죽에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아마도 가장 오랜 기간 건물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터에는 이 곳 법천사지에서 출토된 석물들을 모아 놓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석불 뒷편에 위치하는 광배이다.


석축이 제대로 남아 있는 부도탑 부근 건물터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에 있는 법천사지광국사현모탑


출토된 석재 유물로 석탑, 건물초석, 석종형 부도 등 다양한 형태가 발굴되고 있는데 이 지방에는 돌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석공들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법천사지 부도탑과 탑비는 사찰 서쪽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법천사지 건물터에는 최근 정비작업이 진행중인 것으로 보인다. 불전이 있던 건물 자리가 크게 보이지는 않았다.


법천사지는 절터를 계단식으로 조성한 산지 가람의 형태이지만, 실제 성격은 사람의 왕래가 많은 남한강 나루터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어 평지사찰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법천사지 건물터는 부도탑비 바로 옆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길가쪽으로도 많은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천사지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여러 기간동안의 건물터가 남아 있는데 최근에 정비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사찰의 규모나 가람의 배치에 변화가 많았던 것 같다는 느낌이다. 가람배치에 통일성이나 규칙성이 없어 보인다.


법천사지 정비작업 현장


사찰터 입구의 오래된 고목


법천사지 들어오는 길


위성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찰입구인 당간지주가 남쪽편에 있고, 사찰 건물터가 일반적인 사찰에 비해서 규칙성이 없어 보이는 측면이 있다. 서쪽편 길건너편은 농경지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곳이 절터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이 사찰의 건물터를 보면 이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문헌에 전하는 법천사(法泉寺)는 신라말에 산지 가람으로 세워져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된 사찰이다.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고승 정현이 주지로 있어 법상종 사찰로 번성하였으며, 국사(國師)였던 지광국사 해린이 왕실의 비호하에 법천사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다가 조선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 법천사에는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국보 제101호)과 탑비(塔碑, 국보 제59호)가 문종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 중 탑은 일제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져 있으며, 법천사지에는 탑비를 비롯하여 지광국사현묘탑지와 부도전지,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다. 2001년부터 2004년에 걸쳐 실시한 4차례의 시·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지 19동과 우물지 3개소, 석축 및 담장유구, 계단지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대석, 각종 기와류 및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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