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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닭실마을 충재박물관] 권벌 선생의 생애와 관련된 고문서, 근사록 (보물262호), 충재일기 (보물261호)

younghwan 2010. 10. 24.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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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닭실마을은 조선중기 문신인 충재 권벌 선생이 중종때 기묘사화로 파직을 당하여, 외가쪽인 파평윤씨 터전인 이 곳 닭실마을에 옮겨오면서 안동 권씨 세거지를 형성한 곳이다. 충재 선생은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로 사관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 화를 입어 유배지인 평안도 삭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중기 사림의 등장시기를 대표하는 문신 중의 한명으로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충재 권벌선생의 집안에는 충재선생이 생전에 남긴 많은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보물 216호인 충재일기, 보물 262호인 근사록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또한 전해내려오는 문서류들 대부분이 보물 896호, 901호, 9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많은 종갓집들과 유명인사들의 후손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많은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는 집안으로 그 유물들은 지금 닭실마을 안쪽에 세워진 충재박물관에서 전시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많은 집안들이 문화재를 소유하고 있지만, 이 곳 충재박물관이 가장 개방적으로 유물들을 일반인들에게 전시.공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의 유물들은 충재박물관의 유물중 충재선생의 생애와 관련된 각종 문서류들로 과거시험지, 과거합격자 명단, 합격증, 각종 사령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정덕2년 3월 문무잡과 방목 (보물 896-3호)으로 1507년에 실시한 문무과 및 잡과시험 합격자 명단을 적은 방목이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의 사회제도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자료라고 한다.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이 판본은 을해자본으로 중종 2년(1507)에 실시한 문무과 및 잡과시험에서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방목이다. 여기에는 권벌이 문과별시 병과 제 2등에 합격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 가장 오래된 판본 문무과방목이다.  내용구성을 보면 문과방목, 무과방목, 역과방목, 의과방목, 율과방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문무과 및 잡과가 종합되어 있어 방목연구 및 인물연구에 있어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시권 (보물901호). 당시 충재선생이 과거시험에 제출했던 답안지라고 하며, 당시에는 과거응시자에게 답안지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홍패 (보물 901호). 과거의 최종합격자에게 내어주던 증서로 충재선생이 조선 중종2년 별시문과에 별과 제이인으로 합격한 후 하사받은 것이라고 한다. 전국적으로 조선시대에 전해내려오는 문서 중 가장 많은 것이 과거시험 합격증과 관직 임명사령장인 교지인데,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교지 (보물 901혹).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던 사령문서로 충재선생의 관직 이동시 받은 사령장이라고 한다.


유서 (보물 901호). 관찰사, 절도사 등의 부임시, 징병할 수 있는 별부를 내리는 국왕의 명령서로 중종이 경상감사 충재선생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내린 유서이다.


수진근사록 (보물262호). 충재일기와 함께 가장 먼저 보물로 지정된 문서이다. 고려때 제작되었으며, 충재선생의 수택본 근사록이다. 중종임금과 관련된 유명한 고사가있는 책이며, 정조의 어제서문이 있다.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요약해 놓은 문서로 초기 성리학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고 한다.

『근사록』은 송나라 유학자인 섭채가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주돈이의『태극도설』과 장재의『서명』등 중요한 문헌만을 골라 만든 성리학의 독본이다. 이 책은 고려 공민왕 19년(1370)에 당시 뛰어난 성리학자인 박상충이 진주목사로 부임하는 이인민에게 선사한 것이다. 이 책은 판식이나 자체로 보아 원판을 보고 다시 새긴 것으로 보인다. 권발이 애독하던 것으로 늘 소매에 넣고 다녔으며, 중종 때에는 경연에서 강의까지 하던 것이다. 고려본이 희귀한 상황에서 중국판을 따라 다시 새긴 것이라 하더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며, 조선시대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반드시 정독해야 할 도서이다. 특히 정조가 친히 머리글을 지어서 붙였다는 것만으로도 더욱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출처:문화재청>


유지 (보물901호). 승정원을 통해 발급된 왕의 명령서인데 그 내용은????


'충'자 족자.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같을때 받아온 글씨. 당시 명나라 유명인사가 쓴 글씨라고 한다.


광국원종공신녹권(보물896호). 나라에서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증서. 선조 24년 국가에 이바지한 공으로 인해 충재선생에게 내린 녹권. 충재선생 사후 43년만의 일이다.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공신녹권이란 나라에서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증서를 말하는데, 이 녹권은 선조 24년(1591) 윤 3월에 광국공신도감에서 우찬성 권벌에게 발급한 것이다. 광국공신은 선조 23년(1590)에 종계변무(宗系辨誣:중국 명나라 서적에 조선 왕조의 조상이 잘못 기재된 것을 고치고자 청원하던 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것인데, 정공신 이외에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공신의 칭호를 원종공신이라 한다. 이것은 권벌이 죽은지 43년만에 내려진 것이다 <출처:문화재청>


선생 사후인 선조때 영의정에 추증한다는 왕의 명령서인 교지와 부인인 최씨에게 남편에 직에 따라 정경부인으로 증식하는 교지(권벌처최증증정경부인교지), 보물 901호


충재일기(보물896호), 충재선생이 영천군수로 재직할 때 쓴 자필일기로 개인 생활과 지방관직으로 근무할 때의 사회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며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권벌은 연산군 2년(1496)에 진사가 되고 중종 2년(1507)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간, 정원과 각 조의 판서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인종 1년(1545)에 우찬성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을사사화 때 소윤일파에 의하여 삭주로 유배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안동의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권벌이 영천군수로 있을 때 쓴 일기로, 1514년 9월 14일부터 시작하여 1515년 10월 16일까지 보고 행한 일들을 적고 있다. 실질적인 일기는 영천군수에 부임한 11월 2일부터 적고 있으며, 표지에는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사랑한다.”는 내용 등 수령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자필로 적은 문구가 있다. 표지서명은 닳아져서 분명하지 않으나, 『영양일록(永陽日錄)』으로 쓰여졌던 것으로 보이며 1책 19장이다. 권벌 선생 개인의 생활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며, 지방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충재일기, 관직에 근무할 때나 재야에 있을 때 쓴 것으로, 그 높은 중요도로 인해 실록편찬시 참고되었던 것들이다.



충재일기(보물261호), 충재선생이 예문간, 승정원 등의 관직에 있을때 쓴 자필일기로 임진왜란 이전에 쓴 승정원 일기등 주요 문서가 소실되어, 그 기록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중종조의 학자이며 관료인 충재 권벌(1478∼1548)이 직접 손으로 쓴 일기이다. 권벌은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파면당하기도 했다. 후에 다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일기의 내용은 권벌의 문집인『충재집』에도 실려있으며,『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도 기초자료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이와같이 당시 관료로서 생활의 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는『승정원일기』가 남아있어 그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선조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유희춘의『미암일기』, 이이의『석담일기』와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더구나 뛰어난 권벌의 필체와 문장만으로도 매우 소중히 여겨지는 기록이다. <출처:문화재청>

충재선생과 사화
충재선생은 관직에 재직하면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라는 두번의 큰 사화를 겪게된다. 두번의 사화시기 충재선생은 결코 특정세력에 얽매이거나 이익을 위해 의를 버리지 않았으며, 올바른 시각으로 정국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 사화에 휘말리게 되었고, 을사사화 때는 소윤일파의 불순한 전횡에 대해 비판하고,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대신들을 구명하기 위해 애쓰다 다시 화를 입게 된 것이다. 을사사화로 인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마침내 올바른 재평가와 함께 복권 및 증직이 연이어지게 되었다.


충재 권벌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허, 호는 추쟁.환정, 시호는 충정이다. 연산군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과 삼사 및 승정원과 각 조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 관직에 재직할 때는 대의를 위해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화를 연이어 입었다. 특히 을사사화 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을 위시한 소윤 일파의 전횡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삼대신을 구하는 논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당시 올린 '충순당입대계사'와 '논구삼신계'는 그 내용이 너무도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출처:충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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