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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회화실] 풍속화와 인물화

younghwan 2012. 8. 1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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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화와 함께 조선시대 회화를 대표하는 분야로 풍속화를 들 수 있다. 풍속화는 사람들이 사는 살아가는 모습과 감정, 옷차림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조선시대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분야이다. 간략한 선으로 사람과 풍경을 묘사하고, 과감한 생략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잘 묘사하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은 다른 그림들도 아주 잘 그렸던 가장 뛰어난 화가였지만 그들의 진면목은 그들이 그린 풍속도에서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그린 그림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 표현의 수준이 상당히 높고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풍속화가 일반 대중들이 사는 모습을 잘 그렸다고 한다면, 초상화의 형태로 가장 많이 그려진 인물화는 당대의 상류층에서 가장 많은 공을 들여서 그렸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서양의 회화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일반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왕의 초상을 그린 어진에서부터 관복을 입고 그린 사대부들의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들이 그려졌다. 인물화는 작가의 주관보다는 현재의 사진과 같은 의미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주 세밀하고 정성스럽게 그려졌었다.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그 인물의 정신적인 특징을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지만, 회화는 생각보다 많이 소장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림의 특성이 개인들이 소장하는 물품이라서 대부분의 뛰어난 회화작품들은 개인이나 민간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다.


회화
회화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 사회와 자연의 현상을 선과 면, 색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일찍부터 순수 감상의 대상으로 여겨졌으나 제작 목적에 따라 공간을 장식하고 행사를 기록하는 등 그 종류와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 옛사람들은 글씨와 그림을 같은 뿌리에서 자란것으로 보아 흔히 서화라고 부르며 시와 글씨와 그림, 즉 문학, 서예, 회화가 함께 무르익은 경지에 이르기를 염원하였다. 특히 여가에 그림 그리기를 즐긴 문인화가들은 사물의 겉모습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을 넘어서 마음속에 품은 뜻을 나타내는 서을 중요하게 여겼다. 우리나라의 회화는 선사시대의 바위그림과 청동기의 무늬 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고구려 무덤벽화는 당시의 회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고려시대에는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한 도화원을 중심으로 이녕 등 전문화원들이 활약하였다.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더욱 다양하게 그림을 그렸다. 중국 회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우리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불어 넣어 독창적인 미술을 이루어 냈다. 15세기를 대표하는 안견, 강희안 등은 문화의 꽃을 피운 세종대의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회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6,17세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이징, 김명국 등과 같은 뛰어난 화가들이 개성정인 화풍을 이룩하였다. 18세기에는 정선의 진경사수화, 김홍도의 풍속화 등 우리나라의 자연과 일상생활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들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김정희를 중심으로 화가들이 문인화에 깊이를 더하였으며, 이후 새로운 회화의 양상이 등장하면서 근대 화단으로 이어지는 변화를 보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평안감사 부임 축하잔치, 월야선유도>이다. 당시 평양감사의 위세와 평양성의 모습을 화려한 색감과 필치로 잘 묘사하고 있다.

풍속화
풍속화
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풍속 장면이 우리나라 회화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구려 무덤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풍속화라고 하면 18세기 무렵에 본격적으로 유행한 그림을 말한다. 그 당시에 풍속화는 인기가 매우 높아서 임금도 즐겨 감상하였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풍속화가는 김홍도신윤복이다. 김홍도는 대장간, 추수 광경, 서당, 씨름 등 삶의 이모저모를 익살스럽고 정겹게 표현하였다. 그의 풍속화는 마치 우리가 그 현장에 함께 있는 듯한 생생한 감동을 전해 준다. 신윤복은 기녀와 벼슬 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한량의 모습 등 남녀간의 감정을 은근하게 나타냈다. 산뜻하고 세련되 색채를 사용한 그의 풍속화는 김홍도의 그림과는 또 다른 멋이 있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옷차림, 살아가는 모습 등을 실감나게 묘사하여 선조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김홍도가 그린 단원 풍속도첩 중에 있는 그림 중 <노상파안>, <춤추는 아이>이다. 서민들이 사는 모습을 생동감과 해악성이 풍부한 그림들이다. 풍속화는 조선시대 많이 그려졌던 <의궤> 등 기록화와 비슷한 형태이지만 작가의 주관과 의도가 아주 생생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윷놀이, 나무를 하러 산에 왔던 총각들이 짐을 내려놓고 윷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다. 발을 모은 구경꾼은 무슨 수를 쓰는지 알겠다는 듯 슬며시 웃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대장간, 일에 몰두하고 있는 대장간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벌겋게 달군 히를 두드리며 행여나 불꽃이 튀거나 실패할까봐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옆에서는 완성된 낫을 갈고 있어 현장감을 배가시킨다. <출처:중앙박물관>


장터길, 상업이 발달된 조선후기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장터에서 장사를 마친 이들이 말을 타고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유있게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행상,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의 자세와 표정만으로 화면을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행상을 하고 있는 남녀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기를 업고 치마를 올려 묶은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단원 풍속도첩, 보물 527호,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김홍도의 풍속화는 당시 서민들의 삶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 강세황은 <김홍도가 풍속화를 그릴 때, 한 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김홍도 특유의 짜임새 있는 구성과 투박하지만 힘있는 필선이 돋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평안감사 부임 축하잔치, 월야선유도, 전 김홍도, 19세기, 종이에 색
새로 부임한 평안감사를 환영하여 평양의 대동강가에서 벌어진 잔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궁중이나 관청에서 열린 행사를 그리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특정한 행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방 관아의 일상화된 풍속을 그린 풍속화이다. 대동강변의 실경과 밤낮에 걸쳐 벌어진 잔치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단원 김홍도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인 신윤복의 화첩 중 <처네 쓴 여인>, <저잣길>이다. 대표작 <미인도>로 잘 알려진 신윤복은 실생활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 와는 달리 남녀간의 풍류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여인들의 삶, 신윤복, 18세기, 비단담채
신윤복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남녀간의 풍류를 즐겨 그렸다. <여속도첩>은 그의 풍속화에 자주 등장하는 기녀와 여인의 모습을 따로 떼어 낸 듯한 여섯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섬세한 필치와 고운 채색을 쓴 그의 그림은 여인네의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전해주는 듯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아기 업은 여인, 신윤복,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배경이 없는 작은 화면에 아기를 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훤칠한 키에 가녀린 몸매, 항아리 같이 넓은 치마에 풍성한 가채를 얹은 젊은 여인이 그려졌다. 짤고 꼭 끼는 저고리 밑으로 젖가슴이 드러나 있는데, 젖먹이 어린 아이를 등에 업은 모습에서 모성애가 느껴진다. 화면 여백에는 부설거사가 그림을 보고 미인도를 즐겨 그린 중국 당의 화가 주방의 그림에 빗대면서도 어린아이를 업은 모습에서 평범하지 않은 솜씨를 언급하고 있어 흥미롭다. <출처:중앙박물관>


공기놀이, 전 윤덕희, 18세기, 비단에 먹
조선시대 아이들의 공기놀이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버드나무 아래 두 사내아이가 공기놀이를 하고 있고, 바람개비를 손에 들고 구경하는 아이가 옆에 서 있다. 윤덕희는 풍속화를 여러 점 남긴 공재 윤두서의 아들로 호는 낙서 연옹 등이며 벼슬은 정릉현감을 지냈다. <출처:중앙박물관>


벼베기. 승려와 원숭이, 심사정, 18세기 비단에 먹
심사정의 호는 현재로 조선후기에 활동한 문인화가다. 산수, 영모, 인물 등 다양한 분야의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의 풍속화로는 드물게 남아 있는 예로, 농촌 풍속의 장면을 사실감 있게 담아냈다. 노승의 지팡이를 잡아 당기는 원숭이는 승려의 소재에 재미를 곁들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겨울철 장으로 가는 행렬, 전 이형록, 19세기 비단에 엷은 색
이형록은 19세기에 활동한 화원 화가로 자는 여통, 호는 송석이다. 이 화첩에 실린 <설중향시도>는 눈 덮힌 설경이 널찍하게 펼쳐진 동네 앞길에 황소를 앞세우고 장에 가는 행렬이 늘어서 있는 정경을 약간 높은 시점에서 내려다 본 것으로 행렬속의 말에 가해진 청색과 주황색의 대비 효과로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풍속화

고사.도석 인물화
고사인물화는 에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의 인물을 그린 것이다. 주로 중국의 유명한 인물을 그린 것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그린 것도 있다. 이런 그림들은 삶에 교훈을 주거나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되고 싶은 소망을 나타내며, 때로는 현실을 풍자하려는 의도를 담기도 한다.
 도석인물화는 도교, 불교와 관련된 인물을 그린 그림이다. 도교의 소재로는 신선을 그린 것이 많으며, 장수와 화복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였다. 불교의 소재로는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를 비롯하여 부처의 제자인 나한을 주로 그렸다.


세명의 신선, 김홍도, 1779년, 비단채색. 단원 김홍도가 그린 신선도로 그가 그린 작품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표암 강세황의 화평이 매 폭마다 적혀있는 단원 김홍도의 인물화 중 한 폭이다. 마지막 제8폭에 적혀있는 글씨에서 1779년 그의 나이 35세 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강세황은 김홍도에 대하여 '특히 신선과 화자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하다'고 한 바 있다. 이 그림은 칼을 차고 있는 여동빈을 가운데에 그리고, 그 위에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 제일 아래에 종리권의 선생인 동화자를 그린 <삼선도>이다. 유려하고 여유있는 김홍도 후대의 화풍과는 달리 딱딱한 선묘의 특징을 보인다. 바탕에는 담묵을 칠하여 고아한 분위기를 내고 있으며, 다양한 농도의 채색과 금채, 호분을 적절하게 구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달마, 김명국, 17세기. 달마도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에서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의 주제 중 하나인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달마도> 중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달마도>라고 할 수 있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한 생략 등을 통해서 그려진 상당히 수준 높은 그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달마대사의 모습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달마대사의 모습은 이 그림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그림이다.

달마는 선종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재로 손꼽히며, 김명국의 현존하는 그림 가운데 걸작이다. 측면을 향한 달마대사는 두건을 쓰고 있으며 팔자 눈썹에 부릅뜬 눈, 주먹같은 메부리코, 짙은 콧수염과 구레나룻 등의 생김새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9년동안 벽을 향해 좌선 수행행하였던 그의 진면목, 피안의 진리를 깨닫고자 힘쓴 그의 정신 세계를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빠른 붓놀림과 과감하게 생략한 표현 등은 김명국이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음을 말해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나귀에서 떨어지는 진단선생, 윤두서, 1715년, 비단에 색
중국 북송 때의 학자 진단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나라가 다섯번이나 바뀌어 혼란하던 시절에 참된 군주를 기다리던 진단은 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그네로부터 우연히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그는 나귀에서 떨어지면서 "이제 천하는 안정되리라"고 외쳤다고 한다. 윤두서는 화사하면서도 산뜻한 청록을 써서 태평성대를 바라는 군주와 백성의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덧붙인 시가 화면의 상단에 적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원에서의 아취 넘치는 모임, 김홍도, 1778년, 비단에 엷은 색
김홍도가 34세 때에 그린 고사 인물화이다. '서원아집'이란 송나라 때 왕선이 자신의 집 정원인 서원에서 친구인 소식을 비롯한 당시 유명한 유학자, 승려, 도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던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에 참여한 화가 이공린이 이를 그려 <서원아집도>라 하였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에서도 고사인물화의 소재로 유행하였다. 그림의 내용은 탁자 위에서 서화를 완성하는 장면, 암벽에 동자를 데리고 시를 새기는 광경, 담소하며 비파를 타는 정경, 그리고 석교 건너편의 대나무 숲에서 한담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소나무와 암벽에 보이는 필치는 김홍도가 30대에 정립한 독특한 표현법으로 필선이 명로하고 세밀하여 화려하고 말끔한 느낌을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초상화
초상화
는 생존했던 인물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진, 영, 상, 진영이라고도 부른다. 훌륭한 인물을 본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조상이나 스승을 섬기고 추모하기 위하여 그렸다. 초상화를 그린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확인되지만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때는 고려시대이다. 현재 남아 있는 초상화는 대부분 조선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인물의 신분과 성격에 따라 왕, 어질고 지혜로운 성현과 나라에 공을 세운 신하, 벼슬이나 무벌이 높은 사대부, 여인, 승려의 초상이 전해진다. 특히 조선 후기의 사대부 초상은 관복이나 평상복 차림으로 많이 그려졌다. 초상화를 그릴 때에는 털 한 올이라도 본래의 모습과 차이가 나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들였다. 또 인물의 외모뿐만 아니라 인품과 학식 등 정신적인 면까지 표현하고 노력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임경업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임경업(1594~1646)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본관은 평택, 자는 영배, 호는 고송, 시호는 충민이다. 1618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1624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병자화란 때 활약하다가, 끝까지 청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고 1643년에 명나라에 망명하여 명군의 총병이 되었다. 친명배청의식이 높았던 병자호란 이후 우국충정의 명장으로 인식되었으나, 결국 청의 승리로 조국에서 친국을 받던 중 장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오사모에 푸른색 단령을 착용하고 정면을 향하고 앉은 관복전신좌상이다. 흉배는 인조대에 나라에 공을 세운 무인들에게 내려주었던 독특한 모양이다. 주인공 옆 탁자에 놓은 세한삼우(소나무, 매화, 대나무)는 그의 절개를 상징한다.


이시백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이시백은 인조반정의 주역인 이귀의 장남으로 아버지 이귀, 동생 이시방과 함께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에 녹훈되었다. 또한 최명길과 함께 병자호란에서의 패전 상황을 수습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효종대에 연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사모를 쓰고 청색 단령을 입고 있는 반신상이다. 화면 상단에 "정사공신 영의정 연양부원군 충익공 조암이선생진상"이라 묵서되어 있다. 사모의 높이가 매우 낮고 모정이 평평하며 양각이 짧고 넓은 점, 흉배가 큰 점은 조선 중기 복식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유순정 초상, 조선후기, 비단채색

유순정은 본관 진주, 자는 지옹 시호는 무안, 문성이다. 1506년 중종 반정에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 1등으로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이어서 이과의 옥사를 다스려 정나공신1등에 책록되었다. 1509년 좌의정에 오르고 1510년에 부산포.내이포.염포 등 삼포에서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삼포왜란 때에는 직접 경상도도원수로 출정, 난을 평정했다.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반신상 초상화로 오사모에 금으로 그려진 한 쌍의 공작이 부착된 흉배를 착용하고 있다. 오사모의 양쪽 각이 둥글고 흉배가 금으로만 그려진 점은 조선 초기 공신 초상화의 특징이나 어깨 선을 각지지 않고 둥글게 처리한 점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이모본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조경 초상(얼굴부분만), 17세기, 비단채색


조경 초상, 17세기, 비단채색

조경(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관으로 본관은 풍양이며 자는 사척, 시호는 장의이다. 임진왜란 때 수원부사로 재임하면서 적에게 포위된 독산성의 권율 장군을 응원하고 이듬해에 다시 도원수였던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대승하여 가선대부에 가자되었다. 서울이 수복되자 도성서도포도대장이 되고, 1596년에는 훈련대장이 되었다. 1599년 충청병사, 회령부사를 지냈으며 1604년에는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고 풍양군에 봉해졌다. 오사모에 단호흉배가 부착된 흑색 단령을 착용하고 앉아 있는 전신교의 좌상이다. 바닥에는 채전이 깔려 있다. 얼굴과 이목구비, 수염을 그린 선이 매우 활달하다. 얼굴에는 붉은 빛으로 음영과 입체감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광대뼈 쪽에 홍기를 두드러지게 가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이원익 초상, 17세기, 종이에 색

이원익(1547~1634)의 본관은 전주, 자는 공려, 호는 오리이다. 태동의 12번째 아들인 익령군의 4대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과 합세해 평양을 탈환한 공로로 숭정대부에 가자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세자와 왕을 호위하였다. 모란 공작 흉배를 부착한 흑자색의 운문단 단령을 입고 앉은 관복전신교의좌상이다. 전신상 초상화이면서 종이 바탕에 초본 형식으로 그려진 점이 특이하다. 비단에 그려진 정본 초상화와는 달리 필치 구사와 채색 바탕이 매우 자유롭다. <출처:중앙박물관>


분무원종공신녹권, 1728년

1728년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린 분무공신 녹훈 관련 사적을 기록한 책이다. 분무녹훈도감에서 편찬하였다. 1등 공신에는 오명향, 2등 공신에는 박찬신.박문수 등 7명, 3등 공신에는 조현명 등 7명으로 모두 15명이 녹훈되었다. 책머리에 윤순이 쓴 분무토역반교문이 실려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공신녹권에 실린 초상화


남구만 초상, 작가모름, 비단에 색
남구만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조를 남긴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었다. 남구만 초상은 녹포단령(깃을 둥글게 만든 푸른색의 공복) 차림에 양손을 앞으로 모아 소매 안으로 넣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가는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 영정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시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위치한 사당에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윤봉구 초상, 작가모름, 18세기, 모시에 색
복건에 심의를 입은 반신상 한 점이 함께 첩으로 꾸며져 있다. 윤봉구는 호는 병계, 또는 구암이다. 권상하의 문인으로 대사헌을 지낸 성리학자다. 갈색 선으로 얼굴의 윤곽, 코 등을 그리고 선염을 가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당
영당이란 초상화를 모신 곳을 말한다.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삶의 모범이 된 충신과 학자 등의 초상화를 이곳에 모셨다. 영당에 초상화를 모신 이유는 선현의 훌륭한 업적을 후세까지 널리 전하고 조상의 높은 뜻을 일깨우는 데에 있다. 초상화를 모시는 풍습은 신라 말부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절에 영당을 지어 초상화를 모셨는데 이러한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집 안에 짓는 사당이 가묘가 발달하면서 영당도 많이 세워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영당에 모셔진 초상, 18세기, 비단에 색
사모에 흉배 없는 담홍포와 삽은대를 착용한 반신좌상이다. 화면에 주인공에 대해 알려주는 단서는 없으며 성모씨의 초상으로 전래되고 있다. 얼굴은 갈색 선으로 윤곽선과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표현하였다. 이마, 콧등, 콧망을, 귀에 붉은기를 주고 눈 주위와 법령에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옷주름은 다소 딱딱하며, 옷주름을 많이 묘사하지 않아 단정한 느낌을 준다. 얼굴 묘사에 있어서 콧날의 선과 눈두덩이, 법령 등을 윤곽선으로 표현하고 피부의 색조를 선염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아 18세기 중반경의 초상화로 보인다.

화보
화보
란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나 그림 그리는 기법을 모아 풀이한 것으로 대개 판화로 만들어 널리 보도록 하였다. 주로 중국에서 들여왔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고씨화보, 개자원화전, 당시화보, 십죽재화보 등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화보를 교재로 삼아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모방한다거나 필치를 본받아서 자기만의 화풍을 새롭게 추구하였다. 화가가 이전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은 자신의 기량을 높이는 아주 중요한 방법이었다. 옛 그림 중에 '~을 방했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모방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정한 화가의 작품과 기법, 그 정신을 따라 그렸다는 것은 화가가 어느 계보에 속해 있는지를 보여 준다. 동시에 회화의 지향점을 드러내 준다. 예컨대 강세황은 <벽오청서도>에서 '방심석전'이라고 써 놓아 중국 명나라 심주의 필치를 본받았다는 것을 드러냈다.

.임:원장 옆에 비단 종이를 두고 옮겨 그리는 것으로, 형태는 같으나 크기는 달라짐
.모:투명한 종이를 사용하여 윤곽을 본뜨는 것, 즉 원작의 형태, 필법뿐만 아니라 크기까지도 똑같이 베씨는 것.
.방:옛 대가의 그림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정신이나 필치를 본받아 그리는 것. <출처:중앙박물관>


<개자원화전>과 심사정이 그린 <꽃과 나비, 18세기, 복제본>

<개자원화전>을 보고 괴석 사이에 핀 패랭이꽃과 나비를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그림을 배울 때 화보를 참조했음을 보여준다. 같은 화보를 보았어도 화가의 개성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되는데, 심사정은 특유의 시원한 필치에 맑은 색을 써서 표현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개자원화전
화보는 그림 그리는 법과 역대 화가들이 그림을 목판으로 새겨 찍은 일종의 그림 학습서다. 1679년 충국 청나라 때 1집이 간행된 <개자원화전>은 조선 후기 회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개자원>이라는 제목은 이 화보의 간행을 후원한 부호 이어의 별장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1집 <산수화>, 2집 <난죽매국보>, 3집 <초충영모화훼보>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훗날 <인물화보>가 추가되어 전체 4집이 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빼어난 우리 산, 김홍도, 18세기, 종이에 숯과 먹. 산수화에서 풍경화에 이르기까지 화가로서 김홍도의 천재적인 역량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금강산 일대의 아름다운 절경 32곳을 그린 화첩으로, 종이에 버드나무숯과 먹을 사용하여 사생한 초본이다.


1788년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아 금강산을 유람한 뒤 그려 올렸다는 <금강사군첩>을 제작하는 데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옛 그림의 형태
화가가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이를 보관하고 감상하기 위하여 그림에 종이나 천을 발라서 꾸미게 되는데, 이것을 표장 또는 장황이라고 한다. 표장한 회화들은 용도에 맞게 축이나 병풍으로 꾸며 벽에 걸거나 펼쳐서 감상하고 두루마리, 첩 상태로 책장에 보관해 두었다가 친지가 방문하면 보이기도 하였다. 그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축: 위아래로 긴 그림을 꾸며서 벽에 건 것이다. 예사람들은 계절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축을 바꿔 걸며 감상하였다.
.권: 흔히 두루마리라고 하며 보관할 때는 말아 놓았다가 감상할 때 가로로 길게 펼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는 것이다.
.병풍: 병풍은 장풍, 병장이라고도 부른다. 회화의 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바람을 막아주고 공간을 나누는 실용적인 기능을 가진 가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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