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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회화실] 조선시대 산수화, 진경산수화

younghwan 2012. 8. 16.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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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회화를 대표하는 분야로 자연을 그린 산수화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산수화는 삼국시대의 무덤벽화나 백제의 산수무늬가 그려진 벽돌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아주 오래전 부터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로부터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도 산수화가 그려졌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지만 현재 회화로서 남아 있는 작품은 없어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산수화는 주로 조선시대에 그려진 작품들로 다른 그림과는 달리 문인화로서 전문화가인 도화서 화원 뿐만 아니라 사대부계층에서도 많이 그렸던 것으로 보이다. 이는 자연의 이치를 담은 마음속의 산수를 그리는 중국 남종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산천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18세기 사회가 안정되면서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 여행을 하면서 받은 감동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진경산수화는 조선후기 화가 정선이 개척한 화풍으로 민간이 사는 모습을 그린 풍속화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풍이 아닌가 생각된다.


꿈속에서 여행한 복사꽃 마을(몽유도원도), 안견, 1447년, 복제본. 조선전기 화가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원본은 일본에 있다고 한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안평대군이 꿈에 복사꽃 마을을 여행한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안평대군이 직접 쓴 발문에 의하면 안견이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평화로운 도원을 여행한 꿈 이야기는 중국 동진대에 시인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 두루마리에는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를 비롯해 당대 문인들이 쓴 20여 편의 찬문이 이어져 있다. "지곡가도"라는 안견의 관지가 있고, 그 아래 "가도"라는 붉은 색 도장이 찍혀 있다. 그림의 왼쪽은 나지막한 야산들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를, 나머지는 꿈속 장면으로, 도원의 바깥쪽 입구와 안쪽 입구, 그리고 복사꽃이 피어 있는 도원의 경치를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북새선은도, 함경도의 과거시험, 1664년, 복제본. 조선시대에는 의궤 등 많은 기록화나 지도 등의 그림을 남겨놓고 있는데, 이들 그림은 기록화의 의미도 있지만 산수화로서도 수준 높게 그려진 작품이 많다.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화 처럼 실제 존재하는 우리나라 산천을 그림으로 옮겨놓고 있다.

<북새선은도>는 함경도 길주목과 함흥부에서 실시된 과거시험 장면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그린 기록화이다. 문무과 시험을 치르는 <길주과시도>와 함흥 관아에서 합격자를 발표하는 <함흥방방도>로 구성되어 있다. 두루마리 맨 끝에는 시험관 명단, 시험일자, 제목, 합격자 명단 등 과거 시험과 관련되 사항을 적어 놓았다. 함경도 지역의 실제 경치를 배경으로 그려, 기록화로서 뿐만 아니라 17세기 실경산수화로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화
산수화는 자연을 그린 그림이다. 옛사람들은 항상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꿈꾸었으며 화가들은 자연을 살아 숨쉬는 듯 느끼며 생동감 있게 그리고자 노력하였다. 우리나라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이다. 삼국시대 무덤 벽화의 산과 나무 표현에서 고대 산수화의 양상을 엿볼 수 있다. 통일신라 이후의 산수화는 전해지는 작품이 거의 없어서 자세한 모습을 알기 어려우나 고려시대에는 감상을 위하여 산수화를 본격적으로 그렸으며 주위의 산천을 그리는 전통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남아 있는 작품이 많아 쉽게 시기별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화가들은 중국의 새로운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이룩해 나갔다. 안견을 중심으로 한 조선 전기의 화가들은 산수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를 담은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김명국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 중기의 화가들은 산수와 인물이 조화를 이룬 대범한 분위기의 산수인물도를 많이 그렸다. 산수화가들은 자연의 이치를 담은 마음속의 산수를 그리고자 하였다. 중국의 문인화풍인 남종화의 예술 사상과 기법은 조선 후기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한편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산천을 우리식으로 표현하여 산수화의 경지를 높이 끌어올렸다. 조선말기에는 정신세계를 중시하는 문인화의 흐름이 깊어진 가운데 근대적 감각을 보이는 참신한 화풍의 산수화가 그려졌다. 또한 일반 서민들의 민화 산수화도 유행하면서 다음 시대로 이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사계절의 산수, 전 안견, 15세기, 비단에 엷은 색
안견은 중국 북송 곽희 화풍을 기본으로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그의 화품은 다른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조선 전기 산수화의 큰 줄기인 안견파 화풍이 형성되었다. 초봄과 늦봄, 초여름과 늦여름, 초가을과 늦가을, 초겨울과 늦겨울 등 한 계절의 흐름을 두 화면에 담았다. 가까운 언덕과 멀리 보이는 산을 연결시키지 않고 수면과 안개 등으로 넓은 공간을 만드는 것은 안견파 화풍의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사계절 산수, 김명국, 1662년, 비난에 금니
비단에 먹물을 입히고 금니로 그린 그림이다. 사계절을 각기 두폭씩 그린 사계 산수 중 가을이다. 두 폭씩 쌍을 이루어 한쪽으로 치우친 구도로 그려져 중앙을 비우는 화면 구성이다. 나뉘 탄 인물과 앞서 갈 길을 재촉하는 듯한 시동, 먼 산 위로 날아가는 새들 등에서 서정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 <출처:중앙박물관>


화개현에 있는 별장, 이징, 1643년, 비단에 먹, 보물 1046호. 화가 이징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전문화가로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남겨 놓고 있다.

지리산 화개현에 있던 정여창의 별장을 그린 것이다. 후에 별장이 훼손된 것이 아쉬워 화가 이징을 불러 기록에 의거해 그리도록 한 것이다. 맨 위에는 "화개현구장도"란 제목이 전서체로 적혀 있고, 중간에는 별장의 주변 산수를 엷게 그렸다. 그림 전체의 배치가 오른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근경, 중경, 원경이 잘 나타나 있고 산과 바위에는 흑백의 대조가 뚜렷하다. 그림 아래에는 정여창과 유호인의 시와 제작배경을 적은 글 등이 있다. 이징은 문인화가 이경윤의 서자로, 1628년에는 태조의 진영을 개수한 공으로 동반의 6품직을 받았다. 산수를 비롯한 인물.영모.초충 등 모두 능하여 당대 제일의 기량을 갖춘 화가로 평가받았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 이징, 17세기, 비단채색. 화가 이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산수화로 안견의 화풍을 이어받은 전문 화가가 그린 전통 산수화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그림은 뱃놀이하고 낚시하는 장면, 독서하는 장면, 벗을 찾아가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면이 수려한 산수 속에 조화롭게 묘사되어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산은 강에서 뒤로 물러나면서 점차 높아지고 멀어지는 삼단구도의 안견파 화풍을 보여준다. 산수는 청록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은 소청록 산수로서, 먼 산은 청록으로 설채하고, 앞산과 바위에는 청록을 혼합한 녹색의 태점을 찍어 화원 특유의 정교함과 화려함을 살리면서 수묵의 우아함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도, 전 이징, 조선중기, 종이에 먹
이징은 20대부터 나라 안에서 최고가는 화가로 소꼽혔으며 인조에게 총애받는 화원으로 활약하였다. 여유로운 필선과 치열한 구성, 둥글둥글한 산의 형태, 산세를 따라 찍혀 있는 태점 등이 그의 그림의 특징이다. 중앙에 바둑 두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기암절벽이 복잡하게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내용의 산수화다. 화면에 '완산이징'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인물화첩, 전 이정, 조선중기, 종이에 먹
30세의 나이로 요절한 화가 이정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화첩이다. 화첩에는 총11폭의 그림이 실려 있다. 그 중 한 폭의 인물화에는 물이 불어난 강 위에 도롱이를 쓰고 노를 젓는 인물을 그렸다. 물기를 많이 머금은 진한 먹을 구사하였으며, 강하고 힘있는 필치로 그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인물화첩, 전 이정, 조선중기, 종이에 먹


농사일과 누에치기를 그린 그림, 작가미상, 비단채색. 실제 풍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와는 달리 전통적인 산수화는 문헌이나 그림으로 알고 있었던 풍경에 화가의 주관을 들어간 상상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주로 고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풍경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시경>의 '빈풍칠월'편을 그린 그림이 빈풍칠월도인데, 빈나라(주나라의 옛이름)의 국풍을 말하는 것이다. 빈풍칠월편은 주나라 문황에게 백성들의 어려움을 일깨우고자 삼촌인 주공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그림은 청록산수화풍으로 그려졌으며, 빈풍칠월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뽕잎 따는 여인, 지붕 위의 박 따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금니의 선을 긋고 윤곽선을 따라 태점을 찍어 화려하게 장식한 청록산수화로, 각이 진 산의 형태에 청록의 농담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입체감을 부여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 작자미상, 16세기, 종이에 먹
조선초기 화가 안견 화풍의 영향을 받은 16세기 산수도로, 왼쪽으로 치우친 편파구도로 그려졌다. 원경, 중경, 근경의 삼단 구성을 보인다. '학포사'의 관지에 이어 '양평손장'으로 판독되는 도장이 있다. 원경의 산들은 중첩되었고, 죽림의 초가집은 비워두고 언덕에 올라 담소를 나누는 선비들의 모습이 정겨워 보인다. 산의 치형돌기, 침엽수림, 나무의 해조묘법 등에서 안견파 화풍의 영향을 알 수 있다.


금궤도, 17세기, 비단에 색. 신라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산수인물화


최북이 그린 사계절의 그림, 최북, 18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최북은 자가 칠칠, 호가 호생관으로, 성격이 괴팍하고 행적이 기이하여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이 화첩은 사계절의 풍경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사시팔경도로 적절히 구사된 담채가 깔끔하고 청아하게 느껴진다. 왼편의 <한강조어도>는 이 화첩의 마지막 폭으로 눈이 소복하게 내린 추운 겨울 강에서 낚시를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매화 가득한 산 속에 은거하는 선비, 조희룡, 18세기

눈송이 같은 매화꽃이 만발한 산 속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선비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이것은 중국 청대 다농 장심이 그린 매감도를 떠올리며 그린 것이다. 서예적인 필치로 사물의 형태에 연연해하지 않은 조희룡 특유의 활달하고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매화서옥도>는 김정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 성행하였고, 조희룡, 전기, 김수철, 박기준 등에 의해서도 애호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끝없이 펼쳐진 강과 산, 이인문,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대자연의 풍경을 긴 두루마리에 그린 그림으로 추사 김정희의 소장품이었다고 한다.

산과 물이 서로 만나고 갈라지면서 이루는 대자연의 절경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그린 긴 두루마리 그림이다. 높은 곳에서 멀리 내려다 보는 듯한 시점으로 산수의 변화무쌍함을 장대하게 구성하였다. 국토와 백성을 상징하는 한편, 강과산이 끝없이 펼쳐지듯 왕조가 영원하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련된 필치, 감각적인 색채는 조선후기 김홍도와 쌍벽을 이룬 화원화가 이인문의 뛰어난 솜씨를 잘 보여준다. 화면 앞뒤에 <추사>와 <추사진장>이라고 새겨진 도장이 있어 김정희의 소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진경산수화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천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경치인 실경을 그리는 전통은 고려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정선은 진경산수화를 개척하였다. 그의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우리 산수를 다루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직접 여행하며 살펴본 우리 산천을 가장 생생하게 그릴 수 있는 독창적이고도 한국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18세기에는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명승지를 찾아 전국을 유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에 따라 자연에서 받은 감동과 즐거움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일도 많아졌다. 정선 이후 강세황, 김홍도, 정수영 등 여러 화가들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승지를 돌아본 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19세기 이후에는 자연의 사실적인 모습보다 화가의 정신성을 중시하는 김정희의 예술 사상이 진경산수화의 제작을 주춤하게 하였으나, 진경의 소재는 민화로 즐겨 그려졌다.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우리식의 표현법으로 그린 진경산수화는 가장 한국적인 산수화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백운동도,

 
창의문도

장동팔경첩, 정선, 18세기, 종이에 엷은색
장동은 인왕산 남쪽 기슭에서 백악산의 계곡에 이르는 지역으로 지금의 효자동, 청운동에 속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권문세가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 화첩에 그려진 여덟곳은 장동에 위치한 명문가의 저택이나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유명한 명승지들이다. 소략하면서도 경관의 핵심을 전하고 있어 여유있고 완숙한 노년기의 역량을 보여준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도, 정선, 비단에 엷은색
2층 정자에는 창을 활짝 연 채 경치를 감상하는 맨 상투 차림의 선비가 앉아 있다. 오른쪽에 치우쳐 서 있는 산봉우리가 위용을 자랑하는데 산 중턱을 가로질러 피어 오르는 안개가 그 높이감을 더욱 강조한다. 필법 역시 활달하고 난숙하여 거침이 없다. 화면 상투에는 강세황이 쓴 화평이 있는데 "정선 노인이 중년에 그린 최고 득의작"으로 평하였다. 공간의 높이감, 깊이감이 조화된 대작이다. 60대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되며 청신한 경치와 인물의 분위기 때문에 하경산수라 불리기도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북문의 경치,


피금정, 강세황, 1789년, 비단에 먹. 조선후기 대표적인 화가인 강세황이 그린 작품으로 실제 풍경을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에 속하는 그림이다.

강세황은 산수, 화조 등 다방면의 소재를 다루면서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로 불렸으며, 당시 화단에서 비평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이 그림은 큰아들이 강원도 회양부사로 부임했을 때 강원도 금성의 피금정을 지나며 본 경치를 이듬해인 1789년에 그린 것이다. 피금정은 보통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는 여정에 위치하여, 많은 유람객들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우측에 남대천이 흐르고 그 오른쪽 강안의 작은 건물이 바로 피금정이다. 좌측 하단에 시동을 데리고 지나가는 노인도 보인다. 피금정에 이르기 전 험준한 산세를 독특한 기법으로 표현하여, 멀리 펼쳐지는 산맥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 <출처:중앙박물관>


죽서루, 강세황, 18세기, 종이에 먹. 관동팔경 중 하나인 죽서루 주변을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삼척 도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태백 부근에서 발원한 오십천이 동해바다로 흘러들어가지 직전에 위치한 죽서루 주변의 풍경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은 강원도 삼척의 죽서루를 그린 것이다. 그림에 보듯이 죽서루는 절벽 위에 위치하며 앞으로 물이 흘러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일찍이 관동팔경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유람하였고, 많은 화가들이 이곳을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명나라 심주를 본받아 그린 산수, 강세황, 1749년, 종이에 엷은 색. 옛 대가의 화풍에 따라서 그리는 방倣이라는 형태의 그림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국 명나라 때의 화가 심주를 방倣하여 그린 두루마리 산수화이다. 방倣은 옛 대가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을 넘어서서 필의, 즉 그림에 담긴 뜻과 필치를 본받는 것으로 문인화의 중요한 전통이었다. 심주는 남종화풍의 중요한 갈래인 오파 화풍을 창시한 화가이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은 강세황이 심주의 화풍을 잘 소화하였음을 보여준다. 강세황이 남종화풍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문인화의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의 백악산, 김윤겸, 1763년, 종이에 엷은 채색. 경복궁과 청와대 뒷편에 있는 북악산을 보고 그린 그림으로 진경산수화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윤겸은 안동김씨 김창업의 아들로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겸재 정선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로 진경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서울 백악산(북악산)을 그린 것이다. 1774년에 제발문을 위에 쓴 성와라는 호를 가진 인물은 겸재 정선 이후 김윤겸이 당대 최고의 화가였다고 밝혔다. <출처:중앙박물관>


관동지역의 명승지 풍경, 김하종, 1815년, 비단에 엷은 색

금강산, 설악산, 동해안 일대의 경치를 그린 화첩이다. 김하종은 조선후기의 화원화가로 김득신의 아들이다. 이광문이 쓴 서문에 1815년 김하종이 그와 함께 금강산을 돌아본 후그렸다고 밝히고 있다. 정선, 김홍도 화풍의 영향이 엿보이며, 표현에서 도식적인 면을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세검정, 유숙, 19세기, 종이에 엷은 채색. 세검정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실제와는 약간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 세검정 사진.

세검정은 서울 북악산 시냇가에 자리한 정자로 1747년에 지어졌다. 인조반정때 사람들이 여기에서 '칼을 씻으면서' 반정을 논의 했다고 하여,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너럭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과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유숙은 조선 19세기 화가로, 호는 혜산이며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강가에서 들리는 피리소리, 김응환, 18세기, 종이에 엷은 색

김응환은 정조 어진 그리는 일에 참여하였고 1788년에는 정조의 명으로 김홍도와 함께 영동지역과 금강산을 유람하며 실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소나무 아래에서 선비가 강 저편 갈대밭 사이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바위에 보이는 부벽준과 먹의 농담 대비, 기울어질 듯 뻗은 소나무는 웅장하다. 붉고 푸른색의 설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미묘하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서울 근교의 경치, 심사정, 1768년, 종이에 엷은 색
심사정은 진경산수를 즐겨 그리지 않았으나, 드물게 남아 있는 예가 바로 <경구팔경첨>이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던 한 폭으로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서울 근방의 경치를 그린 실경산수다. 소를 몰고 돌아오는 목동이 근경에 그려졌다. 근경부터 원경까지 꽉찬 구도를 취하고, 물기가 많은 먹과 담채를 사용하였다. 강세황의 평이 함께 전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뱃놀이, 심사정, 1764년, 종이에 엷은 색, 손창근 소장
문방사우와 홍매, 그리고 고목 위의 학까지 마련된 문인취향의 선유가 소용돌이치는 험한 파도 위에서 펼쳐지고 있다.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는 수파법이 인상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심주를 따른 산수도, 심사정, 1758년, 종이 엷은색
심사정이 51세 때인 1758년 가을에 서강 정영년에게 그려준 그림이다. 영대, 오파와 석정, 심주의 화법을 따랐다고 밝혔다. 근경과 중경 사이는 수면으로, 중경과 원경 사이는 옅은 안개로 채웠다. 모서리마다 각진 바위, 화면의 곳곳에 액센트로 찍은 진한 먹점 등은 심사정 화풍의 특징적 요소들이다. 강세황은 심사정이 중년 이후에 대부먹준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는데, 중경의 절벽에 부벽춘이 구사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연못 위 정자에서 수업하는 두 인물, 이인문, 15세기, 종이에 엷은 색
25점의 그림으로 구성된 화첩이다. 산수 표현에 능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괴석과 다양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는 연못 위 정자에 두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방석 위에 앉은 인물 앞에 책을 펴 놓고 앉아 있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낚시를 하고 있는 인물, 두 마리의 사슴, 빈 배 등의 소재와 맑은 담채가 잘 어우러져 서정적인 분위기로 그려졌다. <출처:중앙박물관>


금강산 명연담, 정충엽, 18세기, 비단에 엷은 색
금강산 명연담을 그린 그림이다. 정충엽의 자는 일장.아동, 호는 이호.이곡이며, 조선 후기의 중인 문인화가로 내의원침의 출신이다. 그림 외에 예서에도 능했고 강세황과 친분이 있었다. 담채 효과가 돋보이는 세련된 화풍을 보이며 진경산수를 잘 그렸다. <출처:중앙박물관>


구룡폭, 이인상, 1752년, 종이에 엷은 색
이인상은 28세인 1737년 당시 인제 군수였던 임안세를 모시고 금강산 여행을 하였다. 그 후로 15년이 지난 1752년에 그린 금강산 구룡폭 그림이다. 그런데 실제 구룡폭 경관과 전혀 비슷하지 않다. 이인상은 마음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일부러 색을 칠하지 않고 뼈대만 그렸다고 밝혔다. '이인상인'과 '보산인' 2개의 도장을 찍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나무와 바위, 이인상, 1739년, 종이에 엷은 색
26세 때인 1739년에 그린 세 그루의 나무와 바위 그림이다. 추위에 놓인 나무의 모습에서 빼어냄을 찾아내고, 무늬가 있어 멋있는 바위의 모습에서 거침을 보았다. 추위에 놓인 모습의 빼어남, 무늬가 있는 멋스러움과 기질은 상반되는 개념이다. 이인상은 그 속에 서로 공존하는 천연의 경치를 보고 있다. 이 그림의 묘미는 들여다볼수록 점점 드러나는 바위의 윤곽이다. 물기가 많은 옆은 미필로 그려진 바위는 마치 그림자처럼 보일듯 말 듯 하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기네, 이인문, 1817년, 종이에 엷은 색
이인문은 김홍도와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원화가이다. 자를 문욱 호를 고송류순관도인이라고 했고, 산수화에 특히 뛰어났다. 이 그림은 중국 송나라의 문인 나대경이 자신의 산거 생활을 묘사한 글인 <산정일정>을 바탕으로 그린 병풍이다. 조선후기에는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자연을 벗아여 살아가고자 하는 선비의 생활을 그린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그 중에서도 상정일정도는 이름난 문인의 은거 생활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그림으로서 즐겨 감상되었는데, 글의 내용을 여덟장면으로 나누어 병풍으로 꾸미느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작품은 이인문이 73세 때 그린 것으로 여덟폭이 모두 갖추어져 있으며, 만년의 완숙한 기량이 돋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산수화의 준법. 준법이라 바위, 산, 나무를 그릴 때 입체감이나 표면의 질감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옛 그림에 쓰인 재료
옛 그림은 재료에 따라 크게 수묵화와 채색화로 구분할 수 있다. 수묵화에서는 붓과 먹을 쓰는 방법인 용필법과 용묵법이 매우 중요하며, 물과 먹으로 흑백의 어울림을 조절하여 다양한 효과를 냈다. 채색화는 먹 이외에 여러 가지 채색 안료를 사용한 그림이다. 옛날에는 흙이나 돌과 동식물에서 원료를 채취하여 안료로 사용하였다. 광물성 안료의 예를 들면 녹색은 공작석을, 청색은 남동석 등으 ㄹ갈아서 만들었다. 동물의 분비물이나 뼈 등에서도 안료를 얻었다. 식물성 안료는 풀과 꽃에서 채취한 것으로 투명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은 안료 이외에 인공적으로 합성한 안료도 많이 사용하여 여려 색깔을 냈다. <출처:중앙박물관>


<북새은선도>에 쓰인 안료.


옛 그림에 쓰인 안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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