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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미술관] 신라의 불교 미술

younghwan 2011. 10. 29.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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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불교가 받아들여진 것은 고구려를 통해서 눌지왕때인 5세기 중엽이었으나 실제로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법흥왕 때인 527년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서이다. 이전까지 신라인들은 고분에 껴묻거리와 경주 낭산으로 비롯하여 지배계층이 신성시 여겼던 숲 등을 통해서 고유의 신앙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 불교는 왕실과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갖고 있다.

 내물마립간 이후 찬란하게 꽃피웠던 황금문화는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자리를 굳히면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마립간시기에 대릉원 일대 고분을 조성하는데 쏟았던 노력과 열정을 경주 각처에 사찰을 건립하는 데 쏟음으로써 화려한 불교 유물들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당시 신라는 이전까지 신성시 여기던 숲에 칠처가람이라하여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하였으며 대표적인 사찰이 경주의 중앙에 세워진 황룡사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보여준 신라인들의 예술적 우수함은 오늘날 남아 있는 불국사, 석굴암, 석탑, 불상 등 다양한 형태의 건축과 조각예술품에서 볼 수 있다. 신라가 건축한 사찰 건축은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를 비롯한 축대와 옛 절터에서 출토되는 기와 등 유물을 통해서 볼 수 있으며, 조각기술의 뛰어남은 석굴암, 석탑, 석불상 등 다양한 형태의 문화재로 전국각지에서 볼 수 있으며, 후대인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볼 수 없는 매우 뛰어난 조형미와 조각기술을 자랑하고 있다.

신라의 불교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전래된 것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고구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 전진에서 순도가 와서 불상과 불경을 전하면서부터 입니다. 백제에서는 침류왕(재위 384~385) 원년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에 의해서입니다. 신라에서도 눌지왕(재위 417~458) 때 불교가 전래되기는 했으나, 불교 공인은 법흥왕(재위 514~540) 14년(527)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신라의 불교 공인 과정을 보면 왕권 강화와 불교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의 불교는 곧 왕실불교이며 국가불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결국 신라의 불교가 호국불교의 성격을 띠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황룡사를 들 수 있습니다. 특히 황룡사 구층목탑은 주변의 9개 나라에서 조공을 받겠다는 신라인의 염원을 담아 조성한 탑이었습니다. 7세기 중엽에는 자장을 중심으로 한 계율종이 성행하였으며, 밀교 또한 유행하여 병을 고치는 기적을 일으키거나, 외적을 물리치는 이적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불교는 더더욱 융성하였는데,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라인들이 믿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 많은 승려들이 당나라에 유학하였는데, 그들에 의해 당나라의 불교 종파가 신라에도 전해져 5교가 형성됩니다. 통일 이전 성립되었던 고구려 승려 보덕의 열반종과 자장의 계율종을 비롯하여 의상의 화엄종, 원효의 법성종, 전표의 법상종이 성립되었습니다. 교리 연구에 치중했던 교종이 귀족들에게 환영받은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정토종을 지지하였습니다. 정토종 중에서는 불경을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못하더라도 '나무아미타불'과 같은 염불만 외우면 서방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9세기 이후 신라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이 일었는데, 바로 선종의 유행입니다. 선종은 소외경전에 따라 종파를 구별하는 교종과 달리 '불립문자' 즉 교리의 공부 없이도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주장과 참선을 강조한 불교의 한 종파입니다. 9세기 초 현덕왕 때 되외가 선종을 들여온 이후 점차 전국으로 확산되어 9산 즉, 9개의 선종파가 성립되었습니다. 특히 교종 사찰이 주로 경주 인근에 있으면서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면, 선종 사찰은 지방에 있으면서 그 지역 호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발전하였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천불소탑, 석굴암 출토, 751년. 천불탑은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탑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유물이다. 탑(Pagoda)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탑파'의 준말이다. 초기 불교에서는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상징물이기도 하다. 서역에서는 사리를 모시는 반구형이 대부분이었으나 중국을 거치면서 목조건축물과 비슷한 형태로 바뀌었으며 중국에는 벽돌을 쌓은 전탑, 한국에서는 화강암을 깍아 만든 석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은 편이다.



부처, 남산 용장골 출토, 7세기.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경주남산에는 많은 불상들이 있는데 오랜 세월과 조선시대 유림들에 의해 파불이 많았으며, 대부분 불상의 머리를 없애는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남산 불상에는 머리가 없는 것이 많으며, 이 불상의 머리들은 파불되어 훼손된 불상의 머리로 보인다.


약사불, 경주 남상 용장골 출토, 8세기말~9세기초. 불상은 원래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에서 유래했다기보다는 불교와 그리스문화가 만나서 형성되었던 간다라의 영향을 받은 종교적 상징으로 다양한 재질과 형태로 만들어졌다. 석굴암 불상은 그 뛰어난 조형미와 조각기술 등으로 세계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불교에서 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불상을 모신 불전으로 바뀌었는데, 아마도 탑에 모실 부처님의 사리가 현실적으로 부족했기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모든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인 약사불입니다. 왼손에 약단지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불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남 용장골에 있던 것입니다. 처음 박물관에 옮겨을 때에는 머리에 몸체가 떨어져 있었는데 1975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약단지를 뺴면 석굴암 본존불과 그 모습이 비슷합니다. 오른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의 항마촉지인, 오른쪽 어꺠를 드러낸 모습(편단우) 등이 석굴암 본존불과 닮은 것입니다. 석굴암 본존불이 만들어진 다음부터 곧바로 그 불상을 닮은 상이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그러한 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 불상은 어제쯤 만들었을까요? 풍만하고 당당한 신체는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굴암 본존불과 닮았지만 화려해진 광배는 9세기에 유행했던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8세기 말 내지 9세기 초에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반가사유상, 경주 송화산, 7세기. 커다란 돌에 입체적으로 조각한 불상으로 그리스 조각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강한 힘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불상이다. 후대의 불상에서는 이런 사질적인 표현은 사라지고 형식적이다는 느낌을 준다.

커다란 돌 하나로 조각한 반가사유상입니다. 머리와 두팔은 깨어져 남아 있지 않지만 남은 높이로 보아 건장한 성인 남자의 신체에 가깝습니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올리고, 벗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랫몸에 걸친 치맛자락은 서로 겹치어 주름지고 끝자락에서 물결을 이룹니다. 발가락과 발톱까지 나타낸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습니다. 바위에서 연꽃이 막 피어올라 성스러운 부처님의 발을 받치고 있는 듯 합니다. 경북 봉화 출토 반가사유상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니만, 신라 특유의 고졸한 멋이 살아 있습니다. 조각하기 까다로운 화강암에 신라 장인의 불심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보살, 경주 충효동 출토, 8~9세기. 파불로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 보살상의 머리. 조각수벗이 매우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이다.

석굴암부조상(복제품)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과 본존불 앞에 있는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석고로 본뜬 것입니다. 석굴암 부조를 석고로 뜬 시기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해체, 보원할 떄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불교조각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석굴암에서 느끼는 감동과 비교할 수 없겠습니다만, 석굴암 부조상에 뒤지지 않을 만큼 잘 만든 복제품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석굴암 문수보살, 십일면관음보살, 보현보살. 석굴암 본존불 바로 뒤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과 본존불 앞에 있는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일제강점기에 석고로 본뜬 것이라고 한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원본의 섬세한 조각수법과 예술성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있다. 지금도 각처에 새로 만들어진 관음상을 비롯하여 석불상을 볼 수 있는데, 이 불상처럼 섬세하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은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보살, 통일신라, 9세기

얇은 돌 위에 돋을 새김한 보살상인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머리만 남아 있습니다. 보통 보관의 모습으로 보살상의 이름을 알 수 있는데, 훼손이 심하여 이마저도 알 수 없습니다. 보살상의 얼굴은 위아래 길이가 짧고, 좌우의 폭이 넓어 조금 넓적하며, 눈.코.입은 작지만 오밀조밀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불교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이 보살상 역시 9세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 보살상은 우리가 무슨 요구를 하든지 다 들어줄 것 같은 인상을 풍깁니다. 마치 인자하신 어머니와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위로는 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하한다는 보살의 '상구보리하화중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금강역사, 석굴암 출토, 751년


금강역사, 경주 하동 출토, 통일신라. 금강역사는 원래 인도 고유의 신으로 부처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수호자로 여겨지는 존재로 주로 지금은 사찰의 출입문을 지키고 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석탑 탑신을 새겨졌던 조각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금강역사가 새겨진 돌기둥 4개는 본래 경주 하동의 어느 절터에 있던 것입니다. 이 돌기둥은 탑이 1층 탑신 귀퉁이에 세웠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강역사를 탑에 세운 것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분황사 모전석탑과 미술관 입구 옆에 있는 금강역사가 있던 구황통 절터의 탑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금강역사를 탑에 장엄하였을까요? 금강역사는 원래 인도 고유의 신이었느네, 불교 성립 이후에 부처님과 그의 말씀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금강역사는 꼭 1쌍으로 만드는데, 1구는 입을 벌린 모습을 '아阿형'이라 하고, 입을 다문 모습을 '훔형'이라 합니다. 범어에서 '아'는 입을 벌렸을 때 나는 가장 첫 소리이고, '훔'은 입을 다무는 마지막 소리라고 합니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에 금강역사를 장엄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토록 부처님을 지키고 부처님 말씀을 섬기겠다는 신라인의 의지를 담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출처:경주박물관>


팔부중, 8세기. 금강역사와 함께 석탑 탑신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팔부중상이다.

팔부중은 위로는 불법을 수호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존재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팔부중은 무장한 모습을 띠게 되었지만, 그 자세나 들고 있는 지물은 정해지지 않고 제각각입니다. 부처를 수호하는 불타팔부중과 사천왕의 권속인 사천왕팔부중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불타팔부중을 조성하였습니다. 불타팔부중에는 천, 용, 야치,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가 있습니다. 석탑의 상층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탑이 부처를 의미하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부처를 지켜주는 팔부중과 사천왕을 탑에 새겼던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은 천관사 터에서 옮겨운 가루라상입니다. 천관사는 김유신과 애틋했던 천관녀와 관련있는 절로, 오릉과 도당산 사이에 있습니다. 고대 인도에서 가루라는 상상의 새인데, 이를 형상화하기 위해 입을 부리처럼 표현하였습니다. 왼쪽에 있는 것은 창림사 터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얼굴이 셋 달린 것으로 미루어 긴나라로 추정하는데, 긴나라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또는 새인지 일정하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는 존재입니다. 서남산에 있는 창림사 터에는 팔부중이 새겨진 삼층석탑이 있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사천왕, 녹유사천왕상, 경주 사천왕서터, 679년. 신라 최고의 조각가인 양지스님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녹유사천왕상이다. 삼국시대나 그 이후의 조각상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사실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사천왕사 목탑 기단 벽면을 장식했던 전입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천왕사는 당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하여 문무왕 19년(679)에 지은 절입니다. 역시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전은 양지스님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균형잡힌 신체 비례, 치밀하게 묘사된 갑옷, 고통스러워하는 악귀의 사실적인 모습이 특징인데, 통일신라 초기 사실주의 조각의 정수라 해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사천왕사에 대한 최근 발굴에서 탑 기단부에는 중앙의 계단 좌우에 3종류의 사천왕상 전을 부착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전시된 두 구의 전은 사람이 보기 왼쪽과 중앙에 위치한 것들입니다. 전이 3종류 밖에 출토되지  않아, 그 명치에 대한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감은사 사리갖춤의 사천왕상과 표현 방법이 유사하다는 점, 사천왕상전의 각기 다른 시선이 각각의 방위를 의미한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천왕사아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사자, 분황사 출초, 8~9세기. 사자는 '사자후'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를 수호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진다. 사자는 불교 뿐만 아니라 이집트 고대신앙, 기독교 등 인류 공통적으로 신성시 여기는 동물 중 하나이다.


사자상, 매우 사실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사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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