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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부여 백제문화단지, 계백장군의 집을 재현해 놓은 군관주택

younghwan 2012. 5. 1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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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이 있었던 부여에 재현해 놓은 백제문화단지는 백제왕궁인 사비성, 능산리고분군 원찰이었던 능사와 함께 사비성내에 있었던 주택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이 곳에 재현된 주택들로는 큰 규모의 저택으로 백제군관의 저택으로 계백장군의 집을, 귀족의 저택으로 백제말기의 유력가문이었던 사택지적의 집과 다양한 규모의 주택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삼국시대에 주택에 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백제 왕궁터였던 관북리 유적지나 부여지역 주거유적지 등을 참조하여 상상을 더해서 재현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백제문화단지 생활문화마을에 재현해 놓은 계백장군댁은 사비성에 있던 고위군관의 주택을 재현해 놓은 집이다. 이 집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저택과 마찬가지로 손님을 맞는 사랑채에 해당하는 영역과 가족들이 생활하는 안채에 해당하는 영역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건물들은 지붕에 기와를 얹어놓고 있으며, 조선시대와는 달리 온돌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고 침실에는 침대를, 거실에는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해서 주택을 재현해 놓고 있다.

군관주택(계백장군댁)
백제말기의 대표적 무관인 계백장군의 집을 재현한 곳이다.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해오자 계백은 자신으 처자를 베고, 비장한 결의를 다졌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명을 맞이하여 다섯번의 전투에서 네 차례나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충절과 기상은 후대에까지 널리 전해지고 있다. <출처:부여군청>


계백장군의 집으로 가정해서 재현해 놓은 군관주택은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큰 규모의 저택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긴행랑채 중간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손님을 맞는 사랑채로 보이는 팔작지붕을 한 건물이 보인다. 선인재라고 이름붙여진 이 건물에는 조선시대와는 달리 온돌방과 마루가 없어서 오늘날 사당과 비슷한 건물형태를 보이고 있다. 건물내부에 테이블과 의자를 두고 손님을 맞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관주택은 상당히 큰 규모의 저택으로 사랑채 역할을 하는 건물을 동쪽편에 2동 주고 있다. 뒷편에 있는 숭의당이라 이름붙여진 이 건물은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옥과 달리 미닫이문이나 여닫이 창문을 사용하지 않고 판문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모습. 바닥에 마루가 깔려 있지만, 온돌방이 없어서 지표면과 비슷한 높이이다.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주는 출입문


안채에 해당하는 객실이다. 앞면 4칸에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1칸은 아궁이가 있는 부엌으로, 3칸은 침실과 거실로 사용하고 있다.


침대가 놓여 있는 침실


중앙에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거실이 있다.


뒷편에 또 한동의 객실 건물이 있다. 앞 건물과 같은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 왼쪽편에 아궁이가 놓여 있는 부엌


침대가 놓여 있는 침실


식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거실


서재나 집무실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방


방 한쪽에는 서류에 해당하는 죽간과 붓.필통을 비롯한 문방구, 칼 등이 놓여 있다.


부엌 뒷편의 굴뚝


건물 뒷편에 놓여 있는 창고 건물. 곡식등을 저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가야의 고상가옥처럼 지면에서 약간 높게 만들어 놓고 있다.


건물 앞쪽의 마구간


건물 한쪽편에 노비들의 거처가 있다.


안채에 해당하는 건물들은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으며, 옆면이 1칸으로 건물의 규모가 작은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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