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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경주 양동민속마을, 영남 4대길지이자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통마을

younghwan 2012. 7. 1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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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소재한 양동민속마을은 한국의 전통 민속마을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 이 마을이 위치한 양동리는 동해안을 따라서 끝없이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형산강을 만나서 끊어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남쪽으로는 경주에서 발원하여 포항으로 흘러드는 형산강이, 서쪽으로는 큰 하천인 기계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앞으로는 경북 동해안 일대에서는 상당히 넓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안강평야가 펼쳐져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모여사는 마을의 입지조건인 큰 하천의 중상류 지역에 산을 등지고, 하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마을로 봉화 닭실마을, 안동 하회마을과 천전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로 불리웠던 곳이다. 마을은 안계라는 작은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 하촌과 상촌,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대체로 양반들의 가옥은 전망이 좋은 높은 언덕에, 소작농이나 노비들의 주택은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조선 전기 이후에 터를 잡은 전형적인 반촌이다. 조선 중기 성종대의 문신인 손소가 이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류복하의 외동딸과 결혼하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이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인 조선중기 유학자이자 문신인 회재 이언적의 아버지인 이번이 손소의 사위로 이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가 모여사는 대표적인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택으로 무첨당(보물411호), 향단(보물 412호), 관가정(보물442호)를 비롯하여 후대에 지어진 많은 고택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양반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을에는 양반가옥과 소작농의 가옥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으며, 전망이 좋은 곳에 정자와 서당 등이 들어서 있다. 마을 서쪽편 안쪽 안골이라는 불리는 골짜기에는 이 마을의 종가라 할 수 있는 서백당을 중심으로 손씨 후손들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고, 앞쪽 골짜기에는 여주 이씨의 종가인 무첨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이씨 후손들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재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과 이언적이 낙향하여 터를 잡은 독락당, 손중돈을 모신 동강서원이 있다.



양동민속마을 전경.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개천을 중심으로 서쪽편 골짜기 언덕에 양반들의 가옥이 많이 들어서 있고, 동쪽편 언덕에는 후대에 분가한 후손들의 저택과 정자, 서당 등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 한가운데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 동쪽편에는 후대에 분가한 후손들이 살던 저택들과 소작농이나 하인들이 살던 초가집, 정자 등이 들어서 있다.


양동민속마을에서도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하는 두곡고택이다. 일반에게 내부를 공개하고 있지 않고 있는 저택으로 'ㅁ'자형 살림채와 별채, 곳간채, 대문채 등의 부속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두곡고택 뒷편 전망이 좋은 언덕에는 수졸당 이의잠을 위해 세운 정자인 동호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의잠은 이언적의 넷째손자로 하양현감을 지냈다고 하며, 그의 덕을 추모하여 그린 영정을 모신 영당이 동호정 아래에 있다.


동호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안골. 이마을 입향조라고 할 수 있는 손소의 종택인 서백당을 중심으로 손씨 후손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다.


동호정 아래에 있는 수졸당 이의정을 모신 사당인 영당. 영당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636년에 지어진 건축물로 이언적의 넷째 손자인 이의잠이 하양 현감 재직시 베푼 선정에 대한 보답으로 지역민들이 그린 영정을 모시기 위해서 지은 사당이다


동호정 건너편 언덕에는 수졸당 이의잠이 분가하여 살던 저택이 수졸당이 있다.


수졸당 주면의 고택들


이 마을 입향조인 손소의 저택인 서백당을 비롯하여 많은 고택들이 들어서 있는 안골 입구의 작은 초가집


안골로 들어가는 길. 안골로 들어서면 주로 언덕에 양반들의 가옥이 들어서 있는데, 입구에는 여주 이씨의 후손들이 영.정조대에 분가하여 세운 저택인 근암고택, 상춘헌, 사호당 고택들이 들어서 있다.


안골 언덕 첫번째에 자리잡고 있는 근암고택. 마을안쪽 언덕에 첫번째로 자리잡고 있는 근암고택이다. 원래는 사랑채와 안채가 직각을 이룬 'ㅁ'자형 주택이었으나, 20세기초 화재로 사랑채를 경치좋은 언덕으로 옮기고 대신에 문간채가 들어서 있다.


근암고택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양동마을 전경


근암고택과 나란히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상춘헌 전경.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는 이 저택은 이언적의 후손이 분가하면서 영조대에 지어진 주택으로 건물규모는 크지 않지만 양반가옥이 갖추어야 할 대부분의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사호당 고택으로 올라가는 길. 양동마을 양반가옥은 대체로 이와 비슷한 높이에 집을 마련하고 있다.


상춘헌 안쪽에 있는 사호당 고택. 이 집은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ㄱ'자형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남향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2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안채와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사랑채에서는 마당과 마을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사호당 고택 안쪽에 있는 고택.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규모의 양반가옥이다.


아래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3칸 규모의 작은 초가집


양동마을 전체의 종갓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을에 터를 잡았던 조선중기 문신 손소의 집인 서백당이다. 이 곳에서 아들 손중돈, 외손자 이언적이 태어났다고 하며, 손소와 함께 마을에서 태어난 세명의 현인이라고 한다.


서백당 안쪽으로는 손소의 셋째 아들인 손숙돈이 분가하여 지은 집인 낙선당이 있다. 이 집 주인은 천석꾼이었다고 하며, 이 마을에서 규모가 큰 저택이다.


낙선당 안채


낙선당 마당에서 내려다 본 안골 전경. 이 마을 입향조인 손소의 저택인 서백당을 중심으로 손소의 후손들이 터을 잡고 있는 곳으로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안쪽에 위치한 조선후기 철종11년에 지은 창은정사. 'ㅁ'형 주택으로 바깥쪽에는 사랑채를 두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ㅁ'자형 주택으로서는 비교적 큰 규모의 저택이다. 내부에 정자를 두고 있다고 한다.


아래쪽 언덕에 볼 수 있는 초가집. 본채는 큰 규모의 기와집을 하고 있고, 부속건물들에 초가지붕을 얹은 양반가옥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수리중인 가옥을 마을에서 여러곳 볼 수 있다.


안골 맞은편 언덕에서 내려다 본 마을.


안골 남쪽편 언덕에 위치한 경산서당으로 올라가는 골목길


언덕을 오르는 길에서 볼 수 있는 초가집


 경주 양동민속마을에서도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경산서당이다. 경산서당은 헌종대에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이의윤을 배향할 목적으로 세운 서당인데, 원래는 마을 뒷편 안계저수지 안에 있던 것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조선후기 사설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서원은 대부분 처음에는 후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원 서당에서 출발하여 서원으로 바뀌고,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는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경산서당이 세워진 조선후기는 전국각지에 서원이 난립하던 시기로,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기가 쉽지가 않아서 서당의 형식을 계속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을 제외하고는 건물규모나 배치는 서원과 큰 차이가 없다.


경산서당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넓은 안강평야


경산서당을 지나면 회재 이언적을 비롯하여 여주 이씨 후손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무첨당 안쪽에 위치한 영조대에 지어진 대성헌이 있다. 이 집은 이언적의 11세손인 이능단이 18세기에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전형적인 'ㅁ'자형 주택을 하고 있으며, 손님들이 출입하는 길을 사랑채가 내려다 보고 있으며, 안쪽에 안채 출입문이 있다. 언덕에 있어 별도의 대문채를 두고 있지 않고 있으며, 사랑채에 앉아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대성헌 맞은편 언덕의 초가집


한옥 건물 중 보물로 지정된 많지 않은 건물 중 하나인 보물 411호 경주 양동 무첨당이다. 이 건물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종묘에 배향되었으며 경주 옥산서원에 모셔진 회재 이언적(1491~1553) 종가의 일부로 조선 중기에 세워진 건물이다. 건물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앞면 5칸으로 3칸은 대청마루, 2칸은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누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건물로 종가집 본채의 사랑채와는 별개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독서 등을 할 수 있는 정자와 비슷한 성격의 사랑채이다. 대청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보물 412호로 지정된 향단. 이 가옥은 조선중기에 이언적이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지은 저택으로 마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다.


양동민속마을에서도 입지면에서나 건축형태에 있어서 가장 좋아 보이는 보물 442호로 지정된 관가정이다. 조선 중기 이 마을에 입향한 손소의 아들이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형산강과 기계천이 흐르는 안강평야의 넓은 벌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는 저택이다. 기본적으로 'ㅁ'자형 건물배치를 하면서도, 왼쪽으로는 누마루가, 오른쪽으로는 살림집이 확장된 형태를 하고 있다. 마당과 넓은 벌판을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정자형태의 대청마루 2칸과 온돌방 2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가정 사랑채. 대청마루 2칸, 온돌방 23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청마루는 사실상 누마루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삼면이 개방되어 정자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이 곳에 올라서면 형산강 주변의 넓은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가정 사랑채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옆을 흐르는 기계천과 넓은 안강평야


관가정 아래 전망 좋은 곳에 정자나무가 있어서 쉬면서 넓은 평야를 내려다 볼 수 있다.


관가정을 오르는 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양동민속마을 전경


관가정 아래에 있는 초가집


마을입구에 세워진 손종로정충비각. 병자호란때 최대의 패배였던 이천 쌍령전투에서 전사했던 손종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마을 동쪽편 언덕에는 원래는 정자나 서당 등과 소작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생각되는데, 후대에 분가한 후손들이 일부 터를 잡고 있다. 마을 서쪽편에 비해서 마을 규모는 작은 편이다.


경주 양동민속마을에는 10여개의 정자가 있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심수정이다. 회재 이언적의 동생 이언팔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오랜 기간동안 마을 서당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심수정 전경. 조선시대 한옥 건물에 정자나 재실, 사랑채 등은 외형상으로 비슷하게 지어져서 설명이 없으면 구별하기가 쉽지는 않다. 심수정은 원래 서당으로 사용했다고 하며, 후대에는 문중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행사를 하는 곳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수정에서 내려다 본 마을


원래 서당으로 이용되던 심수정 대신에 안쪽에 세워진 마을 서당인 강학당이다. 건물은 'ㄱ'자형으로 앞면 4칸으로 어린학생들이 공부하던 넓은 대청마루 2칸과 양쪽에 온돌방을 1칸씩 두고 있는 구조이며, 건물 왼쪽에 어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대청마루와 책과 경판을 보관하던 장판각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방이 있다.


강학당으로 올라오는 길.


강학당 아래에 있는 큰 저택인 이향정이다. 이 가옥은 조선 숙종대에 지어진 것으로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양동초등학교

양동민속마을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여 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 손소(1433~1484)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 손씨가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 이씨는 찬성공 이번(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처럼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일이 많았다. 그동안 두 집안에서는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 등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산줄기에 마을이 들어선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름답다. 설창산에서 뻗어내린 네 줄기의 능석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기와집이 네 채나 남아 있어 눈여겨 볼 만하다. 집들은 대개 'ㅁ'자 모양인데, 이는 조선 중기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기와집 주변의 초가집들은 옛날 기와집에 살았던 양반들이 거느린 노비들이나 소작농이 살았던 집이다. 1984년에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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