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상당산성은 청주도심 동쪽 해발 419m의 상당산을 주봉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서 성벽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상당산성은 청주 도심 주변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급하고, 동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조선후기 충청병영이 있었던 청주 도심 배후에 위치한 요새같은 산성이다. 이곳에는 백제가 처음 토성을 쌓았다고 하며, 삼국시대 청주지역 유력자였던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가 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상당산성이 갖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과 지형적인 잇점으로 삼국시대 이후에도 산성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현재의 상당산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대규모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청주지역으로 서산 해미읍성이 있던 충청병영을 청주로 옮기면서 배후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 숙종대에 충청병영에서 석성을 쌓기 시작하여 영조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을 쌓은 수법은 동시에 크게 보강한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과 비슷하며, 성내에는 관아와 산성을 유지.보수하기 위해 동원된 승병들을 위한 사찰을 두는 등 남한산성과 비슷한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상당산성은 남문, 동문, 서문의 3개의 성문을 두고 있는데, 청주도심에서 고갯길을 넘어서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남문인 공남문이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상당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물을 모아두었던 연못과 계곡 주변에는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산성내 마을을 출입하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방어상 취약했던 까닭에 성벽으로 막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문인 공남문에서 청주도심 방향인 동쪽편 성벽까지는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으며, 산줄기를 따라서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작은 출입문인 남암문을 두고 있다. 청주 상당산성은 조총이 보편화된 조선후기의 특성을 반영하여 남문과 동문 사이의 성벽에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지만, 경사가 심하여 방어가 용이한 서쪽편 성벽에는 여장을 설치해 놓고 있지 않다. 성벽은 남한산성과 비슷한 형태이며, 성문 주변 낮은 지역에는 상당히 큰 화강석을 다듬어서 석축을 쌓고 있다.
청주 상당산성, 사적 212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상당산성은 둘레 4.1km, 내부면적 726,000㎡에 달하는 포곡식 석성이다. 상당이라는 명칭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남문 밖에서 발견된 옛 기와의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의 서원경과 관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호남과 서울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 크게 주목받았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쳐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군사적 중요성이 더궁 강조되었다. 충청도의 군사 책임자인 병마절도사는 청주읍성에 있었으며, 그 배후의 상당산성에는 병마우후를 두어 방어하게 하였다. 상당산성에는 대략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어 산성의 유지와 보수를 담당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9년(1596)에 수축된 이후 숙종 42년(1716)부터 영조 23년(1747)까지 대대적으로 개축되었다. 이때 성벽 축조는 물론 성내에 구룡사 및 남악사와 장대사의 3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으며, 관아 건물과 장대.포루.창고 등이 완성되어 면모를 갖추었고 이후에도 계속 보수되었다. 현재 상당산성은 동문.서문.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남아 있다. <출처: 청주시청>
청주 상당산성 정문격인 공남문과 주위 성벽. 상당산성은 조선후기 충청병영에서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쌓은 산성으로 사람과 우마차의 왕래가 편리한 곳에 성문을 두지 않고, 경사진 언덕에 성문을 두어서 방어력을 강화하고 있다.
청주 상당산성 남문인 공남문. 읍성 성문에 비해서 성문의 높이가 높고, 아치형 홍예로 출입문을 만든 홍예식 성문을 하고 있다.
성문은 잘 다듬은 큰 화강석으로 석축을 쌓고 있으며, 성문 앞으로 경사가 있기때문에 성문을 공략하기가 상당히 까다롭게 되어 있다.
남문으로 들어오는 길.
공남문 문루 현판
공남문 주위 성벽은 큰 화강석을 잘 다듬어서 정교하게 석축을 쌓고 있다. 석축을 쌓은 형태는 숙종대에 크게 보강된 남한산성이나 북한산성과 비슷하다.
성문 동쪽편 언덕에는 바깥쪽으로 돌출된 치성을 쌓아서 성문을 엄호하고 있다.
성문 서쪽편에서 치성을 쌓아서 성문을 엄호하고 있다. 남한산성과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산성 석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조총이 보편화되면서 조총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여장을 성벽 위해 설치해 놓고 있다. 상당산성에는 성문 주위와 방어에 취약한 동쪽편 성벽에만 여장을 설치해 놓고 있다.
산성 성문 안쪽.
성문을 들어서면 언덕이 있어서 옹성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공남문 문루
공남문 문루 내부
문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남문 입구. 지금은 잔듸광장을 조성하여 상당산성을 찾는 관람객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다.
공남문에서 청주도심이 내려다 보이는 남암문까지 이어진 성벽
2008년 상당산성
공남문 주변 성벽
공남문 동쪽편 능선 중간에 위치한 치성. 상당산성 남쪽으로 연결되는 산줄기와 만나는 지점이 방어상 취약하기 때문에 이곳과 남암문에 치성을 설치하여 방어상 취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치성 내부.
치성 부근의 성벽길
치성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성문 주위에 비해서 석축을 쌓은 화강석의 크기가 작다.
남암문까지 이어지는 성벽길. 이곳부터는 여장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일반적인 산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남암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성벽 바깥쪽으로 경사졌으며, 치성과 마찬가지로 방어에 유리하도록 성벽을 곡선으로 쌓고 있다.
청주 도심과 산길로 연결되는 지점에 치성을 쌓아 놓고,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작은 암문을 두고 있다.
치성으로 연결되는 성벽길.
능선 정상부에 설치해 놓은 치성
치성 앞쪽으로는 청주 도심과 산길로 연결되어 있으며, 실제 이 능선이 점령될 경우 방어에 상당히 취약할 수 있다. 남한산성의 경우에는 이런 지형에는 암문 바깥쪽에 옹성을 쌓고 있다.
치성 바로 옆에 사람이 출입할 수 있는 작은 암문인 남암문이 있다.
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문에서 남암문 사이의 성벽
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청주도심
구룡사 사적비
이 비석은 상당산성 안에 있었던 구룡사의 역사를 알리기 위하여 조선 영조 40년(1764)에 은재거사가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써서 세운 사적비이다. 비문에는 숙종 56년(1720)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태망과 우후 홍서일이 군영의 건물을 신축하고 연못을 축조할 때, 도천스님이 구룡사을 창건하였으며 영조 19년(1743)에 극락보전을 완성하였다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또한 숙종 42년(1716)에 절도사 유성추가 상당산성을 개축하고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는 등의 산성관련 내용들이 보여 상당산성과 구룡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구룡사는 이미 없어지고 그 터에 남아 있던 이 사적비만 남문 앞에 옮겨져 지금에 이른다. 비의 형태는 낮은 받침돌 위에 높이 133cm, 폭 56cm, 두께 23cm의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한옥 모양의 지붕돌을 얹었다. <출처: 청주시청>
남암문 안쪽에는 산성을 지키는 승병들을 위한 구룡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않고, 남문 앞에 구룡사 사적비만이 남아 있다.
암문 바깥쪽 능선에서 본 치성.
암문 바깥쪽에서 본 상당산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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