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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재(탑_석등_범종)

담양 개선사지 석등 (보물111호), 가사문학의 산실 증암천 주변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큰 석등

younghwan 2013. 3. 1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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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선사지는 담양군 남면 학선리 광주호 서쪽편에 석등만이 남아 있는 절터이다. 석등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이곳에 사찰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절터는 오랜 세월 농경지로 사용되어서 옛 절이 있었던 흔적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다. 개선사지는 가사문학의 산실로 물이 풍부하고 경치가 좋아 조선시대 많은 선비들이 정자와 정원을 조성하여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던 증암천 주변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광주댐 건설로 큰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주변지역이 댐건설로 수몰되지 않았다면 농경지가 풍부한 마을과 가까운 전형적인 통일신라 평지사찰의 입지를 갖추고 있던 사찰로 석등의 규모로 볼 때 꽤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최근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석등 화사석에는 해설 136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신문왕과 왕비, 공주가 이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 석등을 유지하기 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위치 등에 관한 실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그 조성연대(891년)를 알 수 있다. 석등의 규모는 높이 3.5m로 꽤 큰 편이며, 이로 볼 때 이곳에 있던 개선사가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보물 111호, 담양군 남면 학선리
석등은 절 안을 환하게 밝히는 기능 뿐 아니라 부처님의 빛이 사방을 비춘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 중 유일하게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하부가 땅속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높이 3.5m로 8각의 화사석은 각 면마다 직사각형의 창을 뚫었으며 각 창의 양편에 해서로 136자의 명문을 적어 놓았다. 1행에서 6행까지는 신라 경문왕고 그 왕비, 공주(뒤의 진성여왕)가 주관하여 석등을 건립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이 절의 승려가 주관하여 석등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그 토지의 위치에 관한 기록이 적혀 있다. 명문에 쓰인 용기 3년은 891년(진성여왕 3)에 해당되므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등의 규모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담양군청>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111호). 원래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석등 아래받침돌은 엎어놓은 연꽃모양,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겨졌고, 사잇돌은 장고모양을 하고 있다.


석등 화사석은 8각을 하고 있고, 각면에 창이 뚫려 있다. 창 사이의 공간에 조성내력을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통일신라 석등 가운데 유일하다고 한다.


밭가운데 홀로 남아 있는 담양 개선사지 석등


석등 주변 절터는 오랜 기간 동안 농경지로 사용되어 지금은 절터였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개선사 절터는 지금은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과 합류하는 증암천을 막은 광주호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고립된 지역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농경지와 마을이 가까운 곳에 위치한 평지사찰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산실인 증암천을 막아서 조성한 광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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