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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담양 송진우 고택, 근.현대사에 발자취를 남겼던 고하 송진우가 살았던 가옥

younghwan 2013. 3. 28.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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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마을에 남아 있는 고하 송진우가 살았던 고택이다. 구한말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가옥은 안채와 문간채겸 사랑채로 단촐하게 구성된 한옥이다. 초가지붕을 얹고 가옥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지만, 담양지역에서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던 지주계층 가옥이다. 원래의 구조를 유지하면서 슬레트지붕을 얹어서 평범한 시골집 형태를 최근까지 유지하다고 초가 지붕을 얹은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언론인, 정치가,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해방후 좌.우대립의 극심한 혼란기에 암살당한 고하 송진우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이다. 또한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기삼연이 체포되었다가 탈출하면서 이 집에 은신하면서 송진우를 가르쳤다고 한다. 호남지역 지주계층 가옥으로 근.현대사에 큰 역할을 했던 송진우가 살았던 집으로서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담양 송진우 고택,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
이 가옥은 고하 송진우(1890~1945)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했던 가옥으로 한말 호남의병의 영수인 성재 기삼연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송진우를 교육시키며 후일의 3차 의병활동을 구상하였던 가옥이다. 조선 말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은 안채, 사랑채 겸 문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사랑채 겸 문간채는 구조상 흔하지 않은 건물로 주목받고 있다. 고하 송진우는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 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 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 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1일에 사민주의로 일관된 삶을 기려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출처: 담양군청>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마을에 남아 있는 고하 송진우 고택. 여러 자료를 찾아보면 슬레이트지붕을 얹은 평범한 시골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겸 문간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규모의 가옥이다.


안채는 앞면 4칸의 초가지붕을 얹은 '-'자형 주택이다. 온돌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앞에 툇마루를 달아내어 놓고 있다.


이 가옥의 중요한 특징인 앞면 6칸 규모의 문간채겸 사랑채.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손님을 맞는 사랑채가, 왼쪽으로는 창고와 외양간이 있다. 이 사랑채에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기삼연이 피신해 있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툇마루만 있는 안채와는 달리 사랑채는 정자처럼 넓은 툇마루를 두고 있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과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송진우 고택 앞 마을 입구에 있는 큰 정자나무


마을 골목길


마을입구에 있는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정자


마을 입구에 있는 오래된 한옥.


마을 앞 들판. 아주 넓은 들판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출 수 있는 규모이다. 마을 앞으로 88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봄농사를 준비하고 있는 마을 전경


창평 삼지천마을에 남아 있는 고정주 고택, 근대 교육기관인 영학숙의 모태가 되는 곳으로 이곳에서 송진우는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인촌 김성수가 설립한 서울 중앙고등학교 전경. 송진우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이 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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