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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관아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하던 정청 건물

younghwan 2013. 4. 19.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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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화당(宣化堂)은 관찰사가 근무하던 감영의 정청으로 이름이 없거나 고유 이름이 있는 일반 동헌 건물과는 달리 감영 정청은 '선화당'이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선화당에서는 관찰사가 주관하는 주요 업무 및 중요한 송사, 재판 등이 행해졌다. 조선시대 감영에는 정청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지만,  대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던 까닭에 남아 있는 건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정청 건물인 선화당은 충청감영, 강원감영, 경상감영 선화당이 남아 있고, 객사는 전라감영 전주객사가 남아 있다.

  조선초기 관찰사는 임기 2년(조선초는 1년)으로 지역을 순회하면서 근무했기때문에 감영이 별도로 설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경상감영은 경주, 안동, 상주 등이 감영역할을 하였다. 조선중기부터 관찰사가 한곳에 정착하면서 경상감영도 선조대인 1601년부터 대구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경상감영 선화당도 이때 처음 건물이 세워졌으며, 여러차례의 화재로 중건을 거듭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07년(순조7)에 중건한 것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건물의 개조하여 1969년까지 경북도청 부속건물로 사용하다가, 도청이 이전하고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가 공원으로 바뀌면서 옛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대구 선화당,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선화당은 경상감영의 정청으로서 대구에 경상감영이 정착하게 된 선조34년(1601) 이곳에 세운 건물이다. 그 후 현종 11년(1670), 영조 6년(1730), 순조 6년(1806) 세차례의 큰 화재로 불탔으나 순조 7년(1807)에 새로 지었고 1970년에 중수하였다. 이 건물은 현존하는 관아 건축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귀한 가치를 지닌다. <출처:대구시청>


대구 도심 경상감영공원에 남아 있는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했던 경상감영 정청 건물인 선화당. 이곳에서 관찰사 주관으로 처리되는 송사, 형사재판 등 주요 업무들이 수행되었다. 선화당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경북도청이 들어서면서 도청 부속건물로 사용되다가 1970년 도청이 이전되면서 공원이 조성될 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옛 경상감영 모형. 경상감영는 관찰사가 근무하는 감영이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한 조선중기 선조때에 처음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 관찰사가 근무하는 선화당을 중심으로 내아인 징칭각, 하급관리들이 근무하는 사령청을 비롯하여 많은 부속건물들로 이루졌으며, 당시에도 대구가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는 큰 규모의 관아였다.


순조대인 1807년에 중건된 선화당 건물은 앞면 6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관아 건물이다. 관찰사가 근무하는 정청 건물로 일반 건물들과는 달리 공포, 단청, 겹처마 등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선화당'이라고 적힌 현판. 선화당은 '임금의 덕을 선향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동헌이나 객사와는 달리 모든 감영 정청은 '선화당'으로 부른다.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관찰사가 송사나 형사재판 등의 공식적인 민원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왼쪽에 1칸, 오른쪽에 2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관찰사가 손님을 접견하거나 혼자 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건물 앞쪽에는 통로 역할을 하는 넓은 툇마루로 되어 있다.


지붕은 겹처마에 화려한 단청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양식과 익공식을 절충한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경상감영이 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도청건물이 들어섰다가 1970년 도청을 이전하면서 중앙공원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여 '경상감영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도심공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공원 앞 경상감영길. 주변은 옛 경상감영 부속건물들이 있던 자리로 지금도 많은 관청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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