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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성저십리는 도성밖 10리까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대체로 북으로는 북한산, 남으로는 한강, 동으로는 중랑천, 서로는 홍제천까지 지역을 일컫는다. 이들 지역은 도성안과 함께 오늘날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관할 지역이었으며, 지금의 그린벨트처럼 많은 규제를 받던 지역이었다. 성서십리 지역은 성묘, 벌목 등이 금지되었으며, 농사를 짓거나 주민이 거주하는데에서 많은 규제를 받았기때문에 조선초기에는 인구가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조선중기 이후 지방에서 서울로 인구가 유입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파는 빈민을 중심으로 이들 지역에 사는 인구가 증가하여 조선후기에는 전체 인구의 50% 이상이 성밖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한양도성 밖에는 숭례문(남대문), 돈의문(서대문), 흥인문(동대문)과 연결되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세곡과 물자가 집결되는 마포,용산,서강과 연결되는 남대문바깥에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마포는 한양의 관문으로 연안항로와 한강내륙수운을 통해 전국의 물자들이 배를 통해 집결하였으며, 조선중기까지는 시전상인들의 통제하에 있었으나, 조선후기에는 마포나루를 통해 전국의 물자를 운송.거래하는 마포지역상인들이 조선의 상업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성밖에는 배추,무 등 채소를 재배하는 근교농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도시민들을 위한 생필품을 공급에 종사하는 인구 또한 크게 늘었다. 

남대문 이야기
남대문은 한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이었다. 5경3점(새벽3시~5시경)에 파루의 종을 치면 성문을 열고, 초경3점(저녁6시30분~8시30분경)에 인정의 종을 치면 성문을 닫았다. 성문이 개방된 시간에는 도성 안팎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인파로 들끓었다. 또한 성문 바로 안쪽에는 대동법 시행 이후 선혜청이 설치되어 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이나 공물을 보관하고 포나 전을 출납하게 되면서 상품유통이 활발해졌다. 인근에는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으니 바로 남대분 밖 칠패시장이다. 또한 대문의 안팎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다보니, 속칭 '남대문입납'이라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남대문입납, 흥미로운 속담으로 '남대문 입납'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방에서 주소를 몰라도 '모처모가입납'이라고만 하면 서찰의 전달이 가능하지만, 한양 특히 남대문 인근에서는 정확한 주소가 아니면 집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이 말은 뒤에 주소나 이름도 모르고 집을 찾는 사람을 놀리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저자가 한창 성하여 벌이 들끓는 것 같고 성문 주변이 분주하니 새가 날갯짓하는 듯하네. - 이덕무 「숭례문을 나가 한강을 건너며」-


남대문 약도가 그려진 편지

도성으로 가는 정문, 숭례문
시골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한양에 들어오면서 처음보고 놀라는 것이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은 1395년9태조4)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7)에 완성한 한양 도성의 남쪽 성문이며 흔히 남대문이라고 불렀다. 이 문은 중앙부에 호예문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이층의 문루를 세워 도성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숭례문을 통하여 한양과 조선팔도가 연결되어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오는 10개의 길 중에서 삼남지방과 이어진 5개의 길이 이곳을 지나갔다. 따라서 남쪽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상당부분이 숭례문을 통해 운종가의 시전 등으로 공급되었다. 숭례문부터 서울의 중심부인 종루까지는 일찍이 대로가 건설되었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도성도(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혜청도(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선혜청은 남대분 안쪽에 위치하였는데 현재의 남대문시장 내부가 된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미,포,전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남지 기로회도, 남지는 남대문 바깥쪽에 위치하였는데 현재의 남대문로 5가 1번지 부근이다. 이 기로회도는 1629년(인조7)에 남지 인근에서 이귀.서성 등 12명의 기로소 회원들이 계회를 치른 장면이다.


옛 남지가 있던 자리에서 본 숭례문. 선혜청이 있던 자리에는 남대문시장이 들어서 있다.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 및 대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양화도 및 고양 덕수원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한강 및 노도에 이른다. - 『세종실록지리지』「경도한성부」-

모든 길은 한양으로
조선시대의 서울 한양은 전국의 물산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곳이었다. 한양과 지방을 잇는 간선도로망은 18세기 중엽 6대로에서 18세기 후반 9대로, 19세기 후분 10대로로 증가하였다, 10대로에는 한양-의주, 한양-경흥, 한양-평해, 한양-동래, 한양-봉화, 한양-강화, 한양-수원, 한양-해남, 한양-보령, 한양-통영으로 이어지는 도로였다. 간선도로망의 확대는 지방과 한양이 그만큼 밀접해졌음을 말해준다. 이들 도로망에는 기존에 여행하는 관리에게 역마와 숙식을 제공했던 역과 원이 점차 쇠퇴하고 상인이나 일반여행객들이 이용하는 점막들이 늘어났다. 특히 의주-평양-개성-한양을 잇는 관서대로는 사행로이면서 중국의 물자가 반입되는 중요한 도로였다. 또한 남쪽의 물산들은 삼남의 길목이 광주 송파장에 모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양으로 가는 10대 대로


한양으로 연결되는 주요 도로

도성 밖 한양, 성저십리
조선시대 한성부는 도성 안과 함께 성 바깥 약 10리(약 4km)까지를 관리하였다.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현과 대현까지, 서쪽으로는 양화도와 고양 덕수원까지,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량진까지가 그 범위에 속한다. 조선전기에는 도성 밖에 많은 사람들이 살지 않았지만 후기가 되면 한양 인구의 약50%가 거주하게 된다. 성 밖에 살았던 이들 가운데에는 지방에서 상경하여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파는 빈민들이 많았다. 마포, 용산, 서강 등지는 전국에서 올라운 세곡과 상품들이 몰려들어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하였다. 그리고 동대문 밖 왕십리나 살곶이벌 등지는 한양사람들이 소비하는 채소 등을 재배하는 근교농업의 중심지였다. 도성 밖 성저십리는 조선후기 한양이 왕도에서 상업도시로 변모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경조5부도, 1861년경, 보물850-2호, 한양의 행정구역인 5부 전체를 그린 것으로 냇산을 비롯 삼각산, 한강, 중랑천과 난지도까지 표현되어 있다.

마포와 경강상업
경강은 전국 해로유통권의 중심이면서, 전국 최대 시장인 한양의 관문이었다. 경강지역 중에서도 서강과 용산이 세곡운송의 중심지였다면 마포는 상품유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다양한 상업세력이 터를 잡고 있었는데, 선상을 접대하고 매매를 주선한 대가로 돈을 받았던 여객주인, 세곡운송을 전담하였던 경강선인, 우월한 수송능력을 토대로 상품유통을 전개했던 선상들이 있었다. 18세기 후반 여객주인업, 선운업, 선상업은 권력 가문과 결탁한 대상인들이 차지하였다. 특히 경강상인들은 2천석을 싣는 경강대선을 앞세워 전국의 상품유통망을 장악하였다. 이들은 신속한 수송능력과 정보를 기초로 지역간 가격차이와 독점상업 행위인 도고를 통하여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이들 경강상인은 큰 상인이란 의미인 강상대고라 불리며 조선후기 상업자본을 가장 많이 축적한 세력이 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강가의 창고에는 곡식이 억만 섬이요, 안개 낀 수면에는 삼남의 선박 끝이 없도다. -이덕무 「성시전도」-

선전관 이희섭이 아래기를 "강가 각처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술을 많이 담그면 거의 수백석이었고, 3강(마포,서강,용산)의 술집들은 600~700백 곳에 이르니 전체를 합치면 1년에 소비하는 양이 거의 수만 석에 이릅니다"라고 하였다. - 『정보병오소회등록』「이희섭 소회」

삼강어사 조영진이 아뢰기를 "삼강에서 술을 파는 것이 어지럽게 흩어져 천여 항아리를 양조해 둔 자가 있습니다." -『영조실록』118권 영조 48년 4월12일 -


마포나루터

마포의 경강상인들
마포는 서해안과 한강 상류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기에 전국의 상선들이 몰려들었다. 상선이 도착하면 여객주인들은 상품을 보관해주고 숙식을 제공하였으며 시전상인에게 알려서 상품을 중개하였다. 선상이나 여객주인들은 시전과 흥정이 맞지 않는 경우에도 물건을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할 수 없었다. 발각되면 난전으로 지목되어 상품을 압수당하고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전상인이 보유한 금난전권으로 인해 손해를 보면서도 그들에게 물건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전상인에게 종속된 처지였던 여객주인들은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자본을 축적하여 자유롭게 매매를 중개함으로써 점차 시전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여객주인들은 시전의 금난전권을 무력화시키면서 사상중심의 상품유통체계를 창출하여 점차 거대 자본으로 장사를 하는 부상대고로 성장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1833년 쌀폭동' 사건
1833년(순조33) 춘궁기인 3월, 일군의 사람들이 장안의 미전과 잡곡전을 불 지르고, 한강변으로 달려가서 쌀을 보관하던 가옥15채를 불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원인은 경강상인들과 시전이 합심해서 쌀을 매점해두고 팔지 않아서 춘궁기에 서울의 쌀값이 2배로 올랐고 그나마 모든 싸전들이 문들 닫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폭동의 주모자7명과 경강상인 1명, 싸전상인 1명이 사형에 처해진 뒤에야 사건이 알단락되었다.  -『순조실록』33권 순조 33년 3월11일 -


호남공선정예부편, 1820년, 19세기 호남에서 보내오는 진상품을 각 지역별로 배정한 기록이다.

도성밖 관공서
도성 밖 성저십리 곳곳에는 관공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성안의 관공서들은 대부분 행정기능을 담당했지만, 도성 밖에 위치한 관공서들은 곡물과 얼음의 보관과 반급, 생산, 구휼 등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강으로 들어온 조세곡은 한강 주변의 창고에 저장되었다. 광흥창, 군자감창, 만리창은 각각 관료들의 녹봉, 군량미, 대동미를 보관하는 창고였다. 또한 기와를 공급하는 와서는 용산 동쪽 둔지방에, 종이를 제조하는 조지서는 창의문 밖에 각각 위치하였다. 동빙고와 서빙고는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로 한강변에 있었으며, 병자와 걸인을 돌보는 활인서는 혜화문 밖에 있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도성밖 관공서

병조에서 아뢰기를, "도성의 각 문은 인정과 파루의 종소리에 따라 열고 닫게 하여야 사람과 물건이 일정한 때에 드나들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 『세종실록』세종12년(1431) 5월 25일 -


목민심서, 19세기, 정약용


신편집서마의방, 각종 마상.마병에 관한 치료서


진헌마 정색도, 보물 1595호, 1663년, 복제품, 시복시 소속의 목장 중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지도로 임금에게 진상한 21필의 말과 목장주변을 묘사한 것이다.


중랑천을 건너는 살곶이다리. 중랑천너머 살곶이다리 일대는 말을 키우는 목장과 사냥터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최근까지도 뚝섬경마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성들의 바람, 제사와 신앙
성저십리에는 백성들의 소망을 담아내는 장소가 있었다. 유학을 기반으로 예치를 표방했던 조선은 유교의례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종묘나 사직과 같은 대사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적인 제사들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도성 밖 성저십리에는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제사 중에서 중사.소사에 속하는 제사시설들이 있었다. 명산대천에 지내는 산천단을 비롯하여 농사신과 감신에게 각각 제사하는 선농단과 선잠단, 기우제를 지내는 우사단, 곡식과 농사의 별에 제사하는 영성단, 말의 조상에게 제사하는 마조단,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없는 외로운 혼령에 제사하는 여단 등의 제단이 마련되었다. 한편 남대문과 동대문 밖에는 관우를 모신 관왕묘가 있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장소들

0 대사: 사직단, 종묘
0 중사: 풍운뇌우단(바람.구름.우뢰.비의 신), 악해독단(삼각산.한강 등), 선농단, 선잠단, 우사단(기우제단)
0 소사: 영성단(별), 명산대천단(목멱산 등), 사한단(얼음 신), 마조단(말의 조상)
 - 『세종실록오례』「변사」


주요 제사시설 중 그 터가 남아 있는 선농단과 선잠단


이만승 차첩, 조선후기, 빙고 결검 이만승을 선농단 제사의 제관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문서이다. 오성노 녹표, 1828년, 관원 오성노에게 쌀10말과 콩5말을 녹봉으로 지급한 급여명세서로 서강부근 광흥창에서 수령하게 되어 있다.


동적전식례, 1824~1853년, 흥인문 밖 동적전에 관해 기록한 책으로 동적전은 농사의 신에게 제사하고 국왕이 농사 시범을 보이는 장소였다.


심흥택 차첩
1893년 장례원에서 심흥택에게 이조재 현관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해준 문서이다.
1902년 장례원에서 심흥택에게 종묘춘향대제의 친행시에 제14실 재랑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해준 문서이다.
1896년 장례원에서 심흥택에게 환구대제에 배위축사로 임명하면서 발급해 준 문서이다.
1897년 장례원에서 심흥택에게 남관왕묘제에 문신위헌관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해 준 문서이다.
1902년 장례원에서 심흥택에게 황제가상존호시에 봉책거안0사로 임명하면사 발급해준 문서이다.
1902년 장례원에서 심흥택에게 종묘세모대제에 봉조관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해 준 문서이다.


어제 문효세자 효창묘 신도비명, 18세기,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는 5세에 요절하였다. 그의 묘원은 효창묘로 현재 효창동의 동명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관우도, 19세기, 관우는 황실, 관청, 민간에서 널리 모셔졌다. 화격으로 보아 관청의 부군당에 모셨던 그림으로 보인다.


관제보훈상주, 1882년


백자 '동묘'명 병, 19세기, 동며에 치성을 드릴 때 사용했던 것이다.


관성제군명성경, 1886년, 관우를 신격화하여 모시는 종교인 관성교의 경전이다.


관우를 모신 사당 중 하나인 동묘.

왕십리 무, 청파 미나리
조선후기 한양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도성 주민 대다수는 찬거리를 시장에서 구입해 먹는 도시민으로 바뀌어 갔다. 따라서 도성 밖에는 근교농업이 성행하였다. 동대문 밖 왕십리에서는 무, 살곶이다리 인근에서는 순무, 서대분 밖 석교에서는 가지.오이.수박, 연희궁 주변에서는 고추.부추, 남대문 밖 청파에서는 미나리, 이태원에서는 토라, 한강의 밤섬에서는 약초 등이 재배되었다. 이 밖에 마늘, 파, 호박, 수박, 연초 등도 도성 밖 곳곳에서 재배되었다. 근교 농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은 곡물생산의 10배가 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채소 재배에 종사하였다. 근교농업에 필요한 비료는 도성 안 주민들의 인분을 활용하였다. 예덕선생 엄행수라는 사람이 이 일대에 인분을 공급하였는데 1년에 60냥을 벌었다고 한다. 이 시기 상업적 근교농업의 성행을 잘 말해주고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후기 근교농업이 발달했던 주요 지역들

똥바가지를 진 대은자, 예덕선생
종본탑 동쪽에 엄행수라는 자가 살았는데 그는 도성 밖의 농경지인 왕십리, 살곶이 등에 거름으로 인분을 공급하였다. 실학자 이덕무는 궂은 일을 하면서도 넉넉한 인품을 가진 그를 높이 평가하여 예덕선생이라고 하였다.

엄행수와 같은 이는 어찌 자신의 덕행을 더러움에 묻고 세속에 사는 큰 은자가 아니겠는가? - 박지원 『연암집』「예덕선생전」-


속대전, 18세기, "경성 안의 화전, 내농포, 근전 외의 곳에서 경작하는 자는 장 100에 처한다" 규정은 한양에 만연했던 상업작물의 무분별한 재배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동호에서 서호까지
조선시대의 한강에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명승이 많았다. 호수같은 강과 금빛 모래섬, 갈대 무성한 습지, 전망 좋은 언덕 등은 강에서만 접할 수 있는 풍광들이다. 한강변의 명소들은 한도십경, 서호팔경 등 여러 경관을 노래한 시에도 빠짐없이 들어 있다. 지금의 동호대교 인근인 동호에는 거대한 모래섬인 저자도와 한명회의 별장인 압구정이 있었고, 양화대교 인근의 서호에는 잠두봉과 선유봉이 최고의 명승으로 꼽혔다. 이곳은 양반들의 누정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는 풍류와 문예의 현장이었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서호를 유람하고 보기 드문 경관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사라진 한강의 명승들은 겸재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과 <양천팔경첩> 등의 진경산수화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강 주변 명승지


금오계첩, 19세기경, 17세기경 의금부 관원들이 한강에서 모였던 계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화첩이다.


한강변에 있던 많은 정자 중 하나인 망원정

동호의 물 한 굽이에, 드넓은 물결 유리처럼 푸르네, 고깃배들은 여울에 의지하는데, 향초들은 온통 언덕을 덮었도다. - 김종직 『점필재집』「압구정」-


동호 서호도, 1904년, 6폭 중 제1.2폭으로, 제1폭은 물자의 주된 운송길인 용산포, 마포, 동호, 서호가 표기되어 있다.


동문선, 17세기,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쉬던 낙천정(현 광진구 자양동 소재)에 변계량의 '낙천정기'가 현판으로 걸려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