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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풍속과 놀이

younghwan 2013. 11. 2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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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농업사회였던 조선 사회에서도 세시풍속과 놀이, 살아가는 모습 등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지방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수도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대로 권문세가였거나,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관직에 진출하여 서울에 살았던 관료들, 중앙부처에 속한 전문직 관료 또는 하급관리 등의 중인 계층과 군인들, 상업에 종사했던 상인들, 이들의 삶을 지원하면서 살았던 하층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농업사회에서 세시풍속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도시민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활력을 주는 의미가 강했으며, 농민들과는 달리 농사를 준비하거나 농사를 짓기위한 필요한 공동체로서의 의미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사람들의 세시 풍속은 대부분 계절을 즐기는데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의 풍속과 놀이
한양사람들은 다채로운 놀이를 즐겼다. 만리재에서 치열하게 벌이던 편싸움(석전), 청계천변에서 열리던 연날리기(방연) 등은 남자 어른이나 아이들의 놀이였다. 화창한 봄날 담 밑에 모여앉아 했던 풀각시놀음과 교외나 야산에서 진달래 꽃잎을 지져먹던 화전놀이, 집안 뜰에서 담장 밖을 훔쳐볼 수 있었던 그네뛰기 등은 여자들의 놀이였다. 여름날 탕춘대나 삼각산 및 벽송정 아래에서 발을 씻던 탁족은 양반들의 놀이였고, 동네 마당에서 즐기던 윷놀이는 서민의 놀이였다. 또한 대보름날 남산에 올라 달을 보고 소원을 빌던 영월과 밤새도록 청계천의 다리들을 밟고 다니는 답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즐겼다. 놀이는 보통 세시 혹은 절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봄철에는 새 생명의 기운을 누리는 마음에서 놀이를 하였다면, 여름에는 더위를 씻고, 가을에는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겨울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풍속으로 행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씨름하는 모습을 그른 풍속도

석전(石戰), '와와'하는 함성 들썩이는 한밤 성안, 편갈라 돌싸움 승부 겨루네, 밀물 썰물처럼 용기를 자랑하니, 만리현.아현.비파정은 이름난 싸움터라네 - 홍석모 「도하세시기속시」-

대보름 맑은 밤 달은 가득차고, 병조는 임금님의 통금 해제 명령을 받들었네. 금년에 다리 병 없기를 바라면서, 열두 개의 긴 다리 남겨 놓지않네. - 강이천 「한경사」대보름 답교 -


장기도, 18세기말 ~19세기 초, 한양사람들이 주요 놀이 중 하나인 장기를 두는 장면이다. 조선중기의 절파 양식과 김홍도의 화풍을 따랐다.

풍속도병, 복제, 김홍도, 18세기, 프랑스 기메동양박물관, 선비가 세속을 유람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장면들을 소재로 한 병풍 그림으로 당시의 풍속, 기물, 복식 및 한양의 풍경을 살펴볼 수 있다. 주제와 화풍으로 보아 김홍도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려풍속도병>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1폭, 백성이 사또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
2폭, 기생집 안팎 인물들의 모습
3폭, 사당패들이 거리에서 부적을 파고 있는 모습
4폭, 멀리 보이는 남산을 배경으로 말을 탄 양반이 소를 타고 지나가는 여인을 바라보는 모습


5폭, 사대부집 후원에서 양반과 기생들이 연회를 즐기는 모습.
6폭, 선비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 목화 따는 여인을 부채뒤로 훔쳐보는 모습
7폭, 눈쌓인 겨울, 거리에서 양반과 기생들이 만나는 모습.
8폭, 달밤에 눈이 쌓인 성곽 아래에서 양반과 기생들이 고기를 구워먹는 모습

한양의 봄, 생명의 기운을 누리다.
대보름에는 인근 언덕에 올라 처음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올 한 해도 무사하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또한 약밥과 오곡밥을 해먹고, 귀밝이술을 마시고, 호두 등 부럼을 깨물었다. 밤에도 종루의 종소리를 들으면서(청종) 광통교와 수표교 등 청계천의 다리를 밤새 밟고 다녔다. 입춘이 되면 대문에 '입춘대길 건양다경'과 같이 봄을 맞이하는 글을 써 붙였다. 모두 풍년과 복을 바라고 액운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밝고 활기찬 3월 삼짇날에는 강남 갔던 제바가 돌아와 봄을 알렸다. 이때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가에 가서 때를 씻었다. 또 동대문 밖의 들에 나가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을 밟으며 산책을 하가나(답청), 필운대.북둔 등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살구꽃.복사꽃을 보는 꽃놀이(화류)를 하면서 새로운 생명이 기운을 마음껏 누렸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토정비결, 19세기, 토정 이지함이 지었으며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한 해의 운수를 알아보는 데에 이용되었다.


세화판, 조선후기, 정초에 집 안팎에 붙이는 그림인 세화를 찍기 위해 무늬를 새겨 넣은 판이다.


약과판, 조선후기

한양의 여름, 더위를 나누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명절이지만, 단오는 설날, 한식,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였다. '수릿날'이라고도 부른 음력 5월5일 단오는 양수인 5가 중복되어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다. 궁중에서는 신하들에게 부채(단오선)와 얼음, 그리고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단오부)을 내려 주었다. 남녀 어린아이들은 창포 뿌리로 비녀를 만들어 꽂고, 그 달인 물로 머리를 감았다. 남정네들은 남산 기슭이나 북악산의 신무문 근처에 모여 씨름판을 벌였다. 음력 6월 보름인 유두에는 일가친지들이 정릉계곡 같이 동쪽으로 흐르는 맑은 시내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물맞이) 뒤 밀전병이나 수단 등 제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서늘하게 하루를 보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부채, 등걸이, 조선후기

한양의 가을, 잔치를 열다
더위가 물러가고 서늘함이 시작되는 음력 8월15일은 한가위(추석)이다. 이날 신창안장(현재 남대문시장)과 배오개장(현재 동대문시장) 등에는 그해에 거둔 햅쌀과 토란.송이 등 채소, 사과와 배 등 햇과일이 나와 장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더도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처럼 모든 것이 풍성했다. 추석에는 차례를 지낸 다음 산소에 올라가 성묘를 하며, 송편과 국화떡을 만들어 먹었다. 밝고 활기찬 양수인 9가 두번 겹치는 음력 9월9일 중앙절에는 삼짇날에 왔던 제비가 강남으로 되돌아간다. 국화가 한창인 이즈음에는 꽃을 구경하며 국화떡을 만들어 먹고, 남산.북한산.도봉산.수락산 등에 올라가서 국화주를 마시며 단풍을 감상했다.(등고) 특히 인왕산 아래 청풍계는 단풍놀이의 명소였다. 중앙절에는 삼짇날처럼 궁궐 마당에 노인들을 초대해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기도 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찬합, 조선후기


표주박, 휴대용 벼루, 조선후기

한양의 겨울, 새해를 기다리다
24절기 중에서 밤이 가장 긴 동지 이후로는 낮이 길어져 양의 기운이 싹트게 된다. 때문에 동지를 '작은설'이라 했다. 이날은 팥죽을 쑤어 먹고 문짝에 뿌려서 액을 물리쳤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 밤은 제야라 하여 묵은 세배를 드리고, 방.마당.부엌.뒷간에 밤이 새도록 등불을 켜고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닭이 올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수세) 이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샌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을 쫓으려고 윷놀이를 하면서 새해의 점을 보거나 화롯가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기도 했다(난로회). 궁궐에서는 새해의 달력과 청심원 같은 귀한 약, 그리고 제주도에서 진상한 귤 등을 신하들에게 내려 주었으며, 민가에서는 복조리를 팔았다. 이 모두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유제 삼각화로, 조선후기


화류윷, 연밥윷, 조선후기

출생
조선시대 사람들은 조상의 생명이 후손의 몸을 통해서 이어진다고 여겨 자식을 못 낳는 것을 큰 불효라고 생각했다. 특히 가계계승을 위하여 아들을 낳기 위해 지극히 노력하였는데, 굿을 하거나 바위나 계곡을 찾아가 정화수를 올리기도 하고, 기자도끼라 하여 은도끼나 쇠도끼를 속옷 긑에 차고 다니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자하문 밖 기자암이나 인왕산 서쪽 선바위에서 아들을 비는 신앙행위를 하곤 했다. 산모가 아이를 가지면 마음과 행동을 바로 하여 태교에 힘썼고 아이가 태어나면 탯줄을 태항아리에 넣어 묻거나 깨끗한 곳에 따로 묻어 소중하게 보존하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후에는 백일 잔치를 , 1년 후에는 돌잔치를 하여 축하하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동의보감, 조선후기


백자 태항아리, 17세기


도끼노리개, 조선후기


복건과 굴레, 조선


인왕산 서쪽 자락에 위치한 기도의 명소인 선바위

혼례
남녀가 성인이 되어 가정을 가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의례로서 양가의 결합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결혼이 성사되려면 먼저 양가를 잘 아는 중매쟁이를 통해서 배우자를 구하였는데, 정혼을 하게 되면 서로 사주단자와 택일기를 주고 받았다. 여자 집에서 혼삿날을 정해서 보매면 신랑집에서는 혼인 전날에 혼수 예장을 넣은 혼수함을 보냈다. 혼례날 신랑은 나무기러기를 가져와서 두 번 절하는 전안례를 치르고, 초례상을 차린 후 집례자가 읽는 홀기에 따라 교배례(부부가 번갈아가며 절하는 예)와 합근례(부부가 잔을 나누어 마시는 예)를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혼수함, 20세기 초


혼서


나무기러기와 기러기보

관직
양반가 자식들은 5세 때부터 과거공부를 시작하였다. 과거는 보통 30~35세가 되어야 합격하였으니, 거의 25~30년 동안 과거에 전념하게 된다. 서울에서는 문과시험의 경우 3차에 걸쳐 모두 열렸는데, 1차 초시는 서울 사는 유생과 생원, 진사를 위한 시험이었고, 2차인 복시는 초시합격자 중에서 33명을 뽑았으며 3차 시험인 전시는 복시합격자의 성적을 매기는 시험이었다. 여러 관문을 힘겹게 통과한 합격자들은 임금으로부터 홍패와 어사화, 술과 과일 등을 하사받았고, 삼일유가라 하여 시가행진을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정유식년사마방목, 1657년


이회 녹패, 1856년


경수연도, 1655년


상아 홀

제례
제사는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며, 조상에 대한 효행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에 거행한느 기일제와 설.단오.추석.동지 등 사명절에 묘소에서 거행하는 절일제가 있었다. 또 먼 조상에게 1년에 한차례 묘소에서 지내는 세일제와 한식이나 추석 때의 성묘 등도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와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이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가 있었으나, 후기에는 성리학적 질서가 강화되고 부계 중심의 종법제도가 확립되면서, 제례도 4대봉사가 확립되고, 맏아들이 제사를 전담하게 되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백자 투각 용문 향로, 백자제기, 19세기


주독, 19세기


백자명기, 백자 청회 제석 및 제석함, 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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