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카테고리

rss 아이콘 이미지


 고구려는 삼국시대를 주도했던 국가로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동시대를 이끌었던 주도세력이었지만, 휴전선으로 남북이 갈라진 오늘날 고구려 유물이나 유적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는 않다. 다만 한성백제기 고구려와 백제가 한강유역 패권을 다투던 시기에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주둔했던 고구려 군대가 쌓았던 산성이나 보루, 요새 등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편이서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삼국시대 고구려 유물은 경주를 비롯하여 남부지역에서도 일부 출토되기는 하지만,  많은 유물들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서 쌓았던 아차산 일대 보루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들 보루에 주둔했던 고구려인들은 대부분 군인들이었으며, 둔전의 형태로 농사를 짓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되는 유물들은 철제무기, 말갖춤, 각종 농기구 등이 있으며, 생활에 사용했던 토기류와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기와류도 일부 출토되고 있다.

삼국의 각축
475년 백제 수도 한성(서울)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이후 76년간 고구려가 서울과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551년에 백제는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내쫓고 한강유역을 되찾았다. 그러나 553년부터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약 350여 년간 신라는 이곳을 북장의 주요 거점이자 중국으로 가는 교통로로 활용하였다. 백제는 한성이 함락된 뒤 웅진(공주)로 수도를 옮겨 국가체제를 정비하였고 538년 사비(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 웅진과 사비에서 백제는 중흥기를 맞아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백제문화는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고대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삼국, 한강에서 만나다
한반도의 중부지역을 가로지르는 한강은 백제.고구려.신라의 발전과 밀접히 관계되어 삼국간 충돌이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다. 한강유역을 차지한 주인은 백제, 고구려, 신라순으로 바뀌었다. 백제는 한강유역에 나라를 세워 서울지역을 수도로 삼아 최대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백제에 이어 한강 유역을 차지한 고구려는 이 지역을 남쪽 진출의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그 뒤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으로 통하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했으며, 뒷날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고구려의 한강진출, 4세기 후반에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활발한 영토확장을 거쳐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올랐다. 396년, 광개토왕은 친히 군을 이끌고 남쪽의 아리수(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고 58개 성 700개 마을을 빼앗은 뒤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다. 그 뒤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임진강유역과 양주분지일원, 한강유역 등 고구려의 남진로 곳곳에는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한 크고 작은 군사시설을 축조하고,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고구려, 아리수를 건너다
4세기에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축출하는 등 정복전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396년 광개토왕은 백제를 공격해 58개 성 700개 마을을 빼앗고,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돌아갔다. 이후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도읍인 한성을 합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한강유역의 요충지에 크고 작은 군사시설을 만들고 군현을 설치했으며,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까지 이 지역을 76년간 지배하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한강유역의 고구려 유적지

고구려의 군사와 철기
한강유역 북안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일대 능선에는 고구려의 크고 작은 군사시설인 보루가 20여 기 정도로 줄지어 분포한다. 이 일대의 고구려 보루는 산성보다는 규모가 작고 성벽 둘레가 200~400m 정도 되는 방어시설로 이곳에는 소규모의 군사가 주둔하였다. 보루는 남쪽으로는 한강, 동쪽으로는 왕숙천, 서쪽으로는 중랑천에 둘러싸여 있어 높은 곳에서 한강 건너편에 위치한 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내려다 볼 수 있고, 사방을 조망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이곳은 한강유역에 진출한 고구려 군대의 전초기지였다. 아차산 일대의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 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 규모가 작은 구의동보루에는 10여 명, 홍령봉 1보루에는 50명, 아차산 4보루와 시루봉보루에는 10여 명의 고구려 군사가 생활하였다. 아차산4보루와 구의동보루에서는 치.배수시설.온돌.저수시설이 확인되었다. 보루에서는 무기류를 비롯한 철기류와 생활용품이 출토되었다. 특히 철기류는 무기류가 가장 많고 마구류와 농공류 등이 그 다음을 잇는다. 무기는 칼.화살촉.도끼.창, 마구는 재갈.등자, 농녹우는 보습.철낫.쇠스랑 등이 출토되었다. 고구려 군사들이 평소 전투가 없을 때에는 농사를 지었음을 보여준다. 아차산3보루와 4보루에서는 무기와 농공구를 자체적으로 수리할 수 있는 대장간시설도 확인되었으며, 홍련봉보루에서는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쇠투겁창(고구려 5~6세기, 아차산 홍련봉2보루), 발걸이(고구려 5~6세기, 아차산4보루, 복제)


쇠화살촉(고구려 5~6세기, 아차산 홍련봉 1보루)


살포(고구려 5~6세기, 아차산 홍련봉2보루), 보습(고구려 5~6세기, 구의동 보루, 복제)


쇠도끼(고구려 5~6세기, 아차산4보루, 복제), 가래(고구려 5~6세기, 구의동 보루, 복제), 집게(고구려 5~6세기, 아차산 홍련봉2보루, 복제)

고구려사람의 일상생활
한강유역 아차산 일대에 분포한 고구려 보루 유적은 군사들의 군대생활, 생산활동, 일상생활 등을 볼 수 있는 복합유적이다. 특히 아차산보루에서는 철제 농공구와 함께 많은 양의 토기가 발굴된 것으로 볼 때 군사들이 일정한 식량을 자급하면서 생활한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 토기는 장동호를 비롯하여 호.옹.완.동이.시루.접시 등 30여 종이 출토되었다. 쓰임새에 따라 저장용.조리용.배식용.운반용기 등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동이와 시루 등은 조리용, 완과 접시류는 배식용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접시를 비롯하여 배식용 토기에는 군사들이 개인용 식기를 구별하기 위한 여러 종류의 문자와 부호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고구려 군사들은 건물의 바닥에 벽돌을 깔고 생활하기도 하였다. 구의동보루에서 출토된 벽돌은 정사각형.직사각형.삼각형.부채꼴 등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크기도 여러가지이다. 홍련봉보루에서는 공공건물에만 사용된 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병, 사발, 용마산 제2보루


뚜껑, 접시, 용마산 제2보루


곧은 입 항아리, 원통모양 네발토기, 용마산 제2보루

 
고드랫돌, 가락바퀴, 용마산 제2보루


목달린 그릇, 사발


동이,


부호새김 항아리, 시루


긴 항아리, 시루

고구려의 문자와 예술
고구려의 문자자료는 수도, 지방지배의 거점, 산성이나 보루 등 주요 요충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고분벽화에 보이는 기록하거나 문서를 보고하는 장면은 고구려가 4세기 중반에 문서행정에 기반한 정치를 했음을 보여준다. 「광개토왕비」,「중원고구려비」, '호우' 글자가 있는 청동합과 같이 고구려의 문자는 정치 일선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건축용 전돌과 기와, 금속세공 등에도 문자를 사용하거나 아차산보루 군사의 개인용 식기에 이름을 기재하는 등 여러 면에서 고구려의 문자문화를 엿볼 수 있다. 문자와 함께 고분벽화, 수막새의 문양, 불상조각, 각종 장신구 금속공예 등 여러 면에서 고구려 특유의 예술감각이 다양하게 발휘되었다. 고구려의 문자와 예술은 동아시아 주변국에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글자가 있는 벽돌(고구려 5~6세기, 중국 집안, 복제)

고구려 수막새
고구려는 일찍부터 기와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고구려 기와는 도읍이던 집안과 평양에서 가장 많이 출토되며, 한강유역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 기와는 대개 적갈색을 띤다. 수키와의 끝장식인 수막새에는 구름, 연꽃, 덩굴풀, 도깨비얼굴 등 여러 가지 무늬가 새겨져 있다. 특히 연꽃무늬가 주류를 이루면서 형식적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변화상이 보인다. 연꽃무늬는 홑잎양식이 대부분이며, 점차 몇 개의 선으로 구획하고 연꽃잎을 배치한 형식이 주류를 이룬다. 한강유역 홍련봉1보루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는 남한에서 나온 고구려 연꽃무늬의 첫 사례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감꼭지무늬 수막새(고구려 5~6세기, 중국집안, 복제), 용무늬 수막새(고구려 5~6세기, 중국집안, 복제), 연꽃무늬 수막새(고구려 5~6세기, 평양, 복제), 원형돌기무늬 수막새(고구려 5~6세기, 중국 집안, 복제), 연꽃무늬 수막새(고구려 5~6세기, 화성, 복제), 당초무늬 수막새(고구려 5~6세기, 중국 집안)


'연가7년' 글자가 있는 금동불상(국보119호, 고구려 6세기, 경남 의령, 복제),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으며, 원형의 연화문 대좌 위에 석가여래가 똑바로 서 있고 광배에 운용문이 새겨져 있다. 광배 뒷면에 연가 7년이라는 연대와 평양 동사의 승려들이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든 것으로 29번째 것이라는 내용의 명문이 있다.
뚝섬금동불상(고구려, 서울 뚝섬, 복제), 1959년 뚝섬 부근 한강변에서 출토되었으며, 우리나라 초기 불상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불상이다. 양식상으로 보아 400년 무렵 중국 선정불좌상과 매우 유사할 뿐 아니라 이동성이 큰 소형 금동불상이라는 점에서 초기에는 중국 불상으로 간주되었으나 현재는 고구려 또는 백제불로 보고 있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우리나라 초기 불상의 면모를 알려주는 예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호우'글자가 있는 합(고구려 5세기, 경주 호우총, 복제),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뚜껑이 달린 청동합으로 바닥에 명문이 있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알 수 있다.


불꽃뚫음무늬 금동보관(고구려 5~6세기, 평양, 복제), 해뚫음무늬 금동 꾸미개(고구려 5~6세기, 평양, 복제)


금귀걸이(고구려 5~6세기, 1.진천 회죽리, 2.서울 능동, 3. 청원 상봉리, 복제)


금동신발(고구려 5~6세기, 전 중국 집안, 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