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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강한 압박을 받아 개로왕이 죽고 한성을 버리고 남하하게 된다. 새로운 도읍지로 금강을 방패삼아 공산성이 있는 웅진으로 왕성을 옮기게 된다.이후 538년 지형적으로 좁은 웅진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배후에 두고 있는 사비성으로 옮겨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 존속하게 된다. 백제가 수도를 웅진(공주)과 사비(부여)에 자리를 잡았던 시기는 약 200여년의 백제 역사에서 27% 정도의 기간이지만 오늘날 남아 있으면서 잘 알려진 백제유적과 유물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강유역에 물러난 이후 백제는 주변국과의 동맹에 크게 주력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중국 남조, 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비롯하여 다양한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에 전해주는 국제적 성격이 강했던 국가로 볼 수 있다.

한성 그후, 다시 강한 나라가 되다, 한성에서 웅진으로
475년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고 수도 한성(서울)이 폐허가 되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은 곧바로 금강유역의 웅진(공주)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백제의 중심지는 한강유역에서 금강유역으로 옮겨졌다. 웅진기(475~538)는 백제 전체 역사의 9%에 해당한다. 사비(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3년간 5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웅진기 초기에는 혼란이 있었으나 무령왕 떄에 이르러 국력을 회복하고 중흥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다. 무령왕이 이룩한 성과는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하고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기록에도 잘 나타난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무령왕릉 출토유물
무령왕릉은 공주 송산리고분군 안에 있는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중국 양나라 무덤 형식을 본 떠 쌓은 벽돌무덤으로 무덤의 주인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출입구에 놓여 있었다. 무덤 안에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덤 형식과 유물을 통해 중국 남조문화의 영향, 일본과의 문화교류 등 웅진기 백제문화의 국제성을 알 수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금으로 만든 관장식(복제)


'다리작'글자가 있는 은팔찌(복제), 청동숟가락.젓가락(복제)


금동신발(복제)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국보156호, 복제)

웅진문화
웅진(공주)은 475년부터 538년까지 63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이 기간에 문주왕.삼근왕.동성왕.무령왕.성왕 등 5명의 왕이 차례로 즉위하였다. 웅진기에는 한성기의 문화를 계승하고 중국 남조, 특히 양나라와 교류하면서 문화의 꽃을 피워 신라.가야.왜에 전하였다. 웅진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무령왕릉이 포함된 송산리고분군과 공산성, 대통사지 등이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긴목항아리(공주 제천리), 항아리(1.공주 단지리, 2.공주금학동, 3.공주 금학동)


굽다리접시(공주 금학동), 세발토기(공주 단지리)


연꽃무늬 수막새(공주 공산성)

문화의 꽃을 피우다
538년 백제의 성왕은 웅진(공주)의 서남쪽 금강변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로 바꿨다. 사비기(538~660)는 백제 전체 역사의 18%에 해당한다. 나라가 멸망때까지 122년간 5명의 왕이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 납여는 당시 적대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에 맞서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의식을 표명한 것이다. 사비 천도 후 백제는 중앙과 지방의 통치제도를 완성했으며, 불교 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하고 세련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특히 왜에 불교를 비롯한 여러 문물을 전해주었으며, 지금도 일본 곳곳에 백제 관련 유적이 남아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문화
사비(부여)는 53ㅐ년부터 660년까지 122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성왕이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위덕왕.혜왕.법왕.의자왕 등 5명의 왕이 차례로 즉위하였다. 사비기에는 백제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불교문화는 왜에 전해져 일본 불교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천문.지리.역.방술도 전해졌다. 사비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부여에는 부소산성.나성.능산리고분군.능사지.정림사지.궁남지.왕흥사지.군수리사지 등이 있고, 익산에는 왕궁리유적.미륵사지.제석사지 등이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은제 허리띠 꾸미개(백제 7세기, 부여 능산리, 복제), 풍경판(백제, 부여 능산리, 복제)


금동삼존불입상(백제 7세기, 부여 부소산성, 복제), 금동광배(백제, 부여 부소산성, 복제)


남성용변기(백제, 부여 군수리, 복제), 여성용변기(백제, 부여 군수리, 복제)


목간(백제, 부여 궁남지, 복제), 나막신(백제, 부여 능산리, 복제), 청동숟가락.젓가락(백제 6~7세기, 부여 능산리, 복제)


백자벼루(백제, 부여 이궁지, 복제)


짚신(백제, 부여 궁남지, 복제)


산수무늬벽돌, 상자모양 벽돌, 연꽃무늬수막새,


석제마구리장식기와(백제, 부여 부소산성)

사택지적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 출토
백제 의자왕 때의 대신 사택지적이 남긴 비석이다. 1948년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글씨를 새긴 부분은 한변 7.6cm의 정방형으로 구획하여 그 안에 약 4.5m 크기의 글자랄 한자씩 음각하였다. 비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동그라미 안에 봉황을 새겨 붉을 칠을 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비분의 내용은 갑인년(645년, 의자왕14)에 내기성의 사택지적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사택지적은 백제 후기 대성8족의 하나인 사택씨 출신으로 의자왕2년(642)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 대좌평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의자왕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문의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에 유행한 사륙병려체로 유려하며 글자체는 웅건한 구양순체로서 당시 백제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백제의 최고급 귀족이 남긴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사택지적비(백제654년, 부여 관북리, 복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보288호, 백제 567년, 부여 능산리, 복제)
사리감은 능산리고분군과 나성 사이에 있는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다. 이 사리감은 화강암제로서 윗부분을 아치형으로 처리하여 전체 모양이 능산리고분군의 중하총현실과 같은 모양을 나타내고 있으며, 측면을 파서 감실을 마련하였다. 사리감 내부의 사리장치는 남아 있지 않았으나 감실 입구 양쪽 면에 10자씩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리감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절의 창건 연대와 발원자 등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창왕은 위덕왕이며, 창왕12년은 567년이 된다. 이는 절대연대가 밝혀진 몇 안되는 백제 사원 중 하나이다. 또한 창왕의 누이로 대표되는 왕실에서 발언하여 창건된 절임이 확인되었다. 이를 절의 위치와 관련하여 보면 능사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금동대향로,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사지 출토
7세기 때의 백제향로이다.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무게는 11.8kg이고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이 새겨졌다. 여기에 16인의 인물상, 39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 밖에도 나무, 바위, 산길,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서 있는 봉황이 따로 붙어 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의 향 연기가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핀 연꽃모양이며, 연잎의 표면에 불사조,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물고 고개를 쳐들고 떠받치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표현되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듯하나,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백제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귀중한 작품이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금동대향로(국보287호, 백제 6~7세기, 부여 능산리, 복제)

일본속의 고대 한국문화
한국문화는 선사시재부터 일본열도에 전파되기 시작하여 기원후 7세기 말까지 일본 고대국가와 고대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 규슈 신석기문명을 대표하는 소바타토기는 한국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의 금속기시대를 대표하는 야요이토기는 한국의 민부늬토기와 연결된다. 이후 4세기 무렵 규슈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고대국가와 고훈문화 형성에 한반도 삼국에서 건너간 이주민의 역할이 컸다. 그 가운데 특히 백제사람은 일본 고대사와 밀접한 인연을 맺었다. 백제는 한성기, 웅진기, 사비기를 거치면서 독창적인 문화를 창출하여 문화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일본으로 전파하였다. 규슈를 비롯한 긴키.간토.주고쿠 지방 등에는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삼국과 관련된 문화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일본의 주요 유적지

고류지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 국보
일본 고류지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일본의 국보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닯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에 상주함녀서 장차 용화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미륵보살은 종종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 가운데 왜와 긴밀한 협력돤계를 이루었으며, 멸망한 뒤에도 백제유민 일부가 일본 열도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교를 비롯해 백제의 다양한 문물이 왜로 전해져 일본 곳곳에는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일본 교토 고류지, 복제)과 신라의 반가사유상(국보83호,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