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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박물관] 금관가야의 성립, 김해 양동리고분 유적

younghwan 2012. 4. 15.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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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관가야의 중심이었던 대성동고분군과 수로왕릉이 있는 김해 구도심에서 7km 정도 떨어진 양동리고분군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 오랜기간에 해당하는 다양한 형태의 50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으며, 약 5천여점에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이곳은 낙동강유역가 가장 가까운 항구인 마산항에서 약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또다른 삼한시대 지방의 유력세력이었던 마산에서 13km정도 떨어진 주남저수지에 위치한 창원 다호리지역과 이는 가야연맹체의 일원이었던 함안의 아라가야와도 비슷한 조건으로 한반도 연안해상교역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졌으며 교역을 통해서 상당한 수준의 경제력을 누렸던 지역으로 여겨진다. 양동리고분군에서는 상당히 많은 5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한.중.일 해상무역활동과 관련된 외래 유물인 수정제 구슬을 비롯하여 일본계 청동투겁창, 쇠솥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는 금관가야에서 양동리지역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야는 삼국시대에 낙동강의 서쪽을 중심으로 연맹왕국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그 명칭은 가야, 가라, 가량, 가락, 임나 등 다양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야 영역은 오늘날의 낙동강 하류, 남해안, 지리산, 가야산 일대로 낙동강 서쪽의 영남지역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야 후기의 영역으로 초기가야는 고고학 연구성과에 따르면 부산 등 낙동강 동쪽 지역도 포함하고 있었다. 가야는 5가야, 6가야, 혹은 가야7국, 포상 8국, 임나10국 등 연맹체 형태로 백제.신라와 서로 패권을 다투었지만,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어 막을 내렸다. <출처:김해박물관>

새달린 미늘쇠
3세기에서 6세기까지 자야와 신라지역에서 많이 출토되는 철판에 미늘이 달려있다. 무기로 보기도 하지만, 특정집단을 상징하는 의기로 파악하기도 한다. 미늘의 형태는 고사리무늬.C자형태.새모양.삼각형 등이 있다. 이 중 새모양 미늘쇠는 합천 옥전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 등 서부경남지역에 한정되어 출토되는데, 새를 숭배했던 고대인들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출처:김해박물관>


미늘쇠(Saw knife),함안 도항리. 길쭉한 철판의 양쪽 가장자리를 오려내어 만든 것으로 미늘의 형태는 고사리나 가시모양이 많다. 말탄 무사를 말에서 끌어 내릴 때 사용하는 무기였으나 새모양의 미늘을 만드는 등 의기로 변모하게 된다.

오리모양토기
3세기경에 남부지방에서는 새를 본떠 만든 토기를 죽은 이와 함께 묻었다. 등과 꼬리부분에는 액체를 담거나 따를 수 있는 구멍이 있다. 변.진한의 새모양토기는 오리모양이 주류를 이룬다. 머리에는 벼슬이 있고 대체로 두 마리가 한 쌍을 이루어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목을 자른 오리모양토기, 혹은 머리만을 넣은 경우도 있어 오리모양토기와 관련된 다양한 제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김해박물관>


오리모양토기(Duck-shaped pottery). '가야 사람들은 죽은 이가 하늘을 날도록 바라고, 새가 죽은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 가야무덤에서 많이 나오는 것으로 액체를 담을 수 있는 구조이다.


영혼의 전달자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매개자로서 새를 신성시하였음을 보여준다. 낙동강을 생활기반으로 하는 변한 사람들에게 해마다 찾아오는 철새는 친숙하면서도 인간보다 신에게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였다. <출처:김해박물관>


금관가야의 성립
양동리 고분군은 1969년 알려진 이래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500여 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5세기까지에 해당하는 널무덤, 덧널무덤, 돌덧널무덤 등이 확인되었는데 약 5,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변한과 가야의 물질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형무덤에서 출토된 중국, 일본의 유물들은 활발한 해상교역과 금관가야 문화의 국제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출처:김해박물관>




양동리 고분에서 발굴된 수정으로 만든 목걸이입니다. 현재 거리에서 팔고 목걸이와 차이가 없는 유물을 2천년전에 사용했다고 한다.


목걸이(Necklaces). 가야사람들이 좋아하고 소중히 여겼다는 구슬로 만든 다양한 장신구들이다.


가야무덤에서는 금은(金銀)과 같은 귀금속 대신에 구슬로 만든 목걸이, 곱은옥[曲玉] 등 여러 가지 꾸미개[裝身具]가 많이 출토된다. 이는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에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 (구슬을 재보로 삼았으며, 혹 옷에 꿰어 장식하고, 혹 목에 걸고 귀에 달았지만, 금, 은, 비단을 진기하게 여기지 않았다.)" 라는 기록을 증명하는 것이다. 수정옥은 12면체, 10면체, 8면체 등 여러 가지 다면옥이 있으며, 이외에 주판알모양, 둥근모양, 대롱모양 등이 있다. 수정옥을 만드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리며, 만드는 방법은 원석(原石)을 일정한 크기의 형태로 다듬고 난 다음 가죽을 사용하여 거친 면을 곱게 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멍을 뚫는다.  <출처:김해박물관>


쇠솥(Iron cauldron),


쇠투겁창(Iron spearhead), 쇠칼(Iron dagger), 김해 양동리. 김해 양동리 고분에서 발굴된 다양한 철기 무기류들이다. 철기 유물이라서 녹이 많이 있습니다만 가야의 화려한 철기문화를 엿볼 수 있다.


쇠화살촉(Iron Arrowhead), 쇠낫(Iron sickle)


쇠도끼(Iron axe)

도끼로 무엇을 했을까요?
도끼는 선사시대부터 사냥이나 생활도구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적을 쓰러뜨리는 공격무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돌도끼, 청동도끼, 쇠도끼 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쇠로 만들어지면서 무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성을 공격하고 무너뜨리거나 굴을 파는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도끼를 종교적인 대상물로 여겨 점을 치기도 하였는데 도끼에는 병든 사람의 고통을 없애준다거나 마귀를 내쫓는 힘이 있는 등 민속신앙이 깃들여져 있기도 합니다. <출처:김해박물관>


항아리(Jar with horn-shaped handles),


주머니호(Pocket-shaped pottery)


항아리(Jar with handle)


화로모양토기(Brazier-shaped pottery)


굽다리접시(Mounted cup, 부산 노포동)


주머니호(Pocket-shaped pottery)


목항아리(Long-necked jar)


항아리(Short-necked jar)

김해시 주촌면에 위치한 양동리 고분군. 워낙 많은 고분들이 모여 있어서 아직 발굴이 완료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김해시 남쪽 남해고속도로변에 위치한 이 곳은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다른 가야의 고분과 마찬가지로 구릉위에 무덤이 조성되어 있으나 봉분들은 그 형태가 남아 있지 않다.

 김해시 주촌면에 위치한 양동리 고분군은 1969년 처음으로 알려진 이래, 199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되었다. 목관묘, 목곽묘,석곽묘 등 500여기의 무덤에서 토기.청동기.철기 등 5,0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김해지역의 고대문화를 밝히는데 좋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무덤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2세기~기원후 5세기까지로 목관묘에서 목곽묘으로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한식청동거울과 폭넓은 창 등의 중국 및 일본계 유물은 양동리 고분군의 유력집단이 낙동강 하류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및 일본 열도와 활발한 해상교역활동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제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는 양동리 고분군이 금관가야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세력의 집단무덤이었음을 보여준다. <출처:김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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