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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사찰

서울 봉은사, 조선 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

younghwan 2010. 11. 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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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는 종로의 조계사와 더불어 현 시대를 대표하는 도심 불교 사찰이다. 봉은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조선 9대 국왕인 성종의 능을 이 곳 강남지역에 조성하면서 원찰 역할을 할 작은 사찰인 견성사를 중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봉은사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걸 중 한명인 문정왕후가 선릉 옆에 있던 사찰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고양 서삼릉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옮기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정왕후는 조선시대 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는데, 봉은사와 양주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고, 승과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문정왕후가 배출한 많은 인재들 중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임진왜란 당시 승병으로 전란을 극복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조선후기에 많은 사찰들이 중창할 수 있었던 근원이 되었다. 물론 문정왕후의 불교장려 정책은 유림들의 미움을 받아서, 문정왕후와 함께 불교 중흥을 이끈 보우대사는 문정왕후 사후에 제주도로 유배되어 참형을 당했고,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던 양주 회암사는 폐사되는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봉은사는 선정릉을 지키는 원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어서 폐사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으며, 그 후에 한양에서 가장 가까운 사찰로서 그 명성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또한, 강남 개발과 함께 강남 도심권에 위치한 장점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제력있는 사찰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같다.

 1. 출입문인 진여문, 법왕루, 종루


봉은사 출입문인 진여문. 강남 COEC 컨벤션센터와 마주하고 있는 출입문으로. 일반적 사찰의 산문이나 천왕문 등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그림으로 그려진 사천왕상이 있다.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궁궐 출입문을 연상시키는 구조로 아마도 현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출입문이라 전통적인 예법을 무시하고 만든 측면이 있다.


봉은사 진여문을 들어서면 일군의 부도와 탑비를 볼 수 있는데, 봉은사의 내력이 길지 않고 한양에 가까웠던 까닭에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봉은사 강당역할을 하는 법왕루. 현대에 지어진 누마루 형태의 강당으로 앞면 7칸 규모의 큰 건물이다. 이 또한 전통 예법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법왕루 옆쪽에 있는 관음상. 도심에서 가까운 까닭에 기도을 원하는 신도들을 위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봉은사의 현재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웅장한 종루

2. 봉은사 요사채인 선불당


봉은사 대웅전 앞 경내 동쪽편에 위치한 선불당. 규모가 있는 한옥처럼 지은 건물로 원래 이곳에는 요사채인 심검당이 있었다고 하며, 요사채 목적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수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봉은사가 도심에 위치한 까닭에 손님이 묵을 이유가 별로 없어서인지 경내에 큰 요사채를 운영하지 않는 것 같다. 보통 산중에 있는 사찰은 요사채의 규모가 날로 커지는 경향이 있다.


대웅전 서쪽편에 있는 작은 요사채


선불당 뒷편에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낡은 건물이 있다.

3. 중심불전인 대웅전과 지장전


봉은사의 중심불전인 대웅전. 앞면 5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궁궐 전각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현재의 봉은사 경제력에 비해서는 크게 욕심을 내지 않은 건물이다.


봉은사 대웅전 앞 계단은 궁권 법전의 답도와 계단을 모방한 형태의 계단을 만들어 놓고 있다. 답도는 마치 자금성 답도를 연상시킨다.


현대 불교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죽은자들의 명복을 비는 지장전이 대웅전 옆에 있다. 물론 왕릉을 지키는 원찰인 봉은사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불전이다.

4. 북극보전(칠성각), 영산전, 영각


봉은사 뒷편에 있는 민간신앙의 장소인 북극보전(칠성각). 이 곳에는 기도를 드리오 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 보인다. 내부에는 발디딜 틈도 없이 많은 신도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강남이라서 그런지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특징이다.


영산전에는 목 십육나한상, 삼존불상, 영산전 불화가 있다


영산전 앞 언덕에서 본 강남 삼성동 COEC 빌딩군


고승들의 영정을 모신 영각


이 곳에는 조선중기 문정왕후와 함께 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보우대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때 크게 기여하여 조선후기 불교 중흥에 기여한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보통은 조사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곳 봉은사에는 영각이라 부른다.

5. 판전,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남아 있는 불전


조선중기 이후 불교를 크게 중흥시킨 봉은사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는 판전이다. 이 곳에는 많은 불경 목판을 보관하고 있으며, 불교를 체계적으로 중흥시킨 불교계의 문정왕후와 보우대사의 업적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추사 김정희가 죽기 직전에 쓴 글씨로 잘 알려진 판전 현판


봉은사 대웅전 서쪽편에 있는 거대한 미륵보살입상.


미륵보살입상 앞에는 미륵전이라는 건물이 있다. 건물 형태는 누마루인 강당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불전인 미륵전이라고 부른다.

6. 봉은사와 관련된 왕릉


봉은사가 지켜야 하는 왕릉인 중종의 정릉, 봉은사의 원래 위치는 이 곳 부근이었다고 한다. 문정왕후의 희망과는 달리 정릉에는 중종만이 묻혀 있다.


오늘날 봉은사를 존재하게 하는 성종의 왕릉인 선릉


서울 동북쪽에 위치한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 문정왕후는 봉은사를 크게 중창시키고, 자신은 정릉에 묻혀서 봉은사와 함께 하고자 했지만, 유림들의 미움을 받아서인지 태릉에 묻혔다.

봉은사의 창건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없다. 신라시대 말기 원성왕 10년에 창건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나와 있으나,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봉은사"와 현재의 봉은사 간에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실질적인 봉은사의 시작은 1498년 연산군 4년에 선릉 옆에 있던 견성사(見性寺)를 중창하면서 부터로 보고 있다. 1562년 명종 17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처음에 봉은사는 왕릉의 수호와 제례 담당이 주 역할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일반 사찰로 커졌다. 상대적으로 한양 도심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왕릉의 수호를 담당하였고, 선종의 으뜸 사찰로서 과거 제도 중 승과를 담당하기도 했던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절은 1939년 대화재와 한국 전쟁 기간 중에 2차례 대부분의 전각을 소실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컸는데, 이 피해를 복구하는데 근 40여년이 걸렸다. <출처:문화원형백과>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년~1565년 음력 4월 6일)는 조선 중종(中宗)의 제2계비이다. 시호는 성렬인명문정왕후(聖烈仁明文定王后)이다. 파산부원군 정평공 윤지임(坡山府院君 靖平公 尹之任)과 전성부부인 이씨(全城府夫人 李氏)의 딸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들 명종의 즉위 후 약 9년간 수렴청정을 맡았으며, 이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감각과 유교적 식견을 발휘해 신하들을 제압했다. 능은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태릉(泰陵)이다. <출처:위키백과>

보우(普雨, 1515년 ~ 1565년)는 조선 명종 때의 승려이다. 호는 허응당(虛應堂)·나암(懶庵)이다.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1548년 불심(佛心)이 깊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키고, 봉은사(奉恩寺)를 선종(禪宗),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본산(本山)으로 삼았다.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등, 승유억불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후에 도대선사에 올랐으나 문정왕후가 죽자, 유림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삭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 되었다가 제주목사가 참하였다. 저서로 《허응당집》, 《불사문답》 등이 있다. <출처:위키백과>


조선왕릉을 모시는 사찰
조선왕릉 근처에는 왕과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례를 지내는 사찰이 있다. 이러한 사찰은 원찰, 능사 또는 조포사라고도 하였다. 조포사는 조선시대 사찰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산릉제례에 사용하는 두부를 만들어 제공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건국초 태조 비 신덕왕후 정릉에 흥천사를, 태조 건원릉에 개경사를 세웠지만, 그 후 태종의 명으로 태종 헌릉부터는 사찰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조 비 정희왕후가 세조 광릉에 봉선사를 세우고, 이후 주로 왕후와 대비 등 내명부의 지원을 받으며 세워진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선.정릉의 봉은사와 융릉의 용주사 등이 있다. <출처:조선왕릉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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