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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조선의 신분제도, 호적, 족보, 노비

조선시대 사회제도의 기본이 되는 신분제도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국가에서 관장하는 대표적인 신분제도로는 호적제도를 들 수 이쓸 것이다. 호적은 아마도 국가가 형성된 이래로 조세와 병역 등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으로서 안정기에는 정기적인 호구조사를 통해서 호적 제도가 유지되었지만, 혼란기에는 은익호구의 발생, 양민의 노비화 등으로 인해서 관리가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가 관리하던 호적과는 달리 족보는 양반계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관리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양민들은 족보나 호적제도에 의해서 관리되었다면 노비는 토지와 같은 유형의 재산으로 분류되어 목록으로 관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호적. 고려시대에 작성된 것으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이 호적은 조선..

중앙박물관 2010.02.01

강화 고려궁지, 강화 동종(보물)

강화 고려궁지에 있는 강화동종 복제품과 강화 역사관에 전시중인 강화동종 원본품입니다. 강화동종은 사찰에서 사용하던 범종이 아니라 성문 입구나 시장 주변에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출입 시간을 알려주던 행정 목적으로 만든 동종입니다. 서울의 보신각 종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면 무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강화 역사관에서 보관/전시 중인 강화 동종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많은 동종이 사찰에 남아 있지만 관청에서 사용하던 동종은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강화동종은 서울의 보신각 종과 같은 역할을 하던 동종으로 강화산성의 출입구 역할을 했던 남문에 있었다고 힙니다.강화 고려궁지에 있는 강화동종입니다. 원래의 동종은 강화산성의 출입구 역할을 했고, 시장과 가장 가까운 남문에 있었으나, 최근에 고려궁지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합천 해인사 - 팔만대장경, 우리의 기록문화 유산

우리의 위대한 기록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합천해인사입니다. 소박하면서도 단아하게 지어진 건물에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팔만대장경'이라고 쓰여진 큼지막한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이 건물안 쪽에 보입니다. 어뜻 보기에도 귀한 곳임을 느끼게 합니다. 관람객들이 팔만대장경을 밖에서 보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잘 만들어진 건물로 보입니다. ☞ 고려대장경판 고려대장경판은 그 경판의 갯수가 8만1258개나 된답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으로 흔히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경’이란 뭘까요? 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적어 놓은 글을 말하며 법문이라고도 합니다. 예를 들면 살생하지 말라, 욕심내지 말라 등의 교훈적인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조선의 법치와 정치

조선은 유교사상을 구현한 성문화된 법전인 '경국대전'을 중심으로 법치국가이자, 왕을 중심으로 한 유교국가이기도 했다. 중앙박물관에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법전인 성종때 만든 '경국대전'과 마지막 법전인 '대전회통'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관료제 국가인 조선을 대표하는 제도인 과거제도 유물들과 각종 공신임을 증명해주는 교지들도 전시하고 있다. 조선시대는 현재와 멀지 않은 시대임에도 불국하고 전해지는 유물은 많다고 볼 수 없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전해지는 유물은 조상들의 과거합경증인 교지와 공신임을 말해주는 교지일 것이다. 얼마전 공주박물관에서 전시한 공주지역 명가 유물 전시회에 전시된 유물의 상당수 이런 종류의 교지였다. 또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물 중의 하나인 조선왕조실록 또한 조선시대 정치의 모습을..

중앙박물관 2010.01.31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조선의 국가의례

조선은 유교국가로 왕실과 국가에서 주관하는 많은 의례가 있었고, 이 것들이 국가경영에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국가를 다스리는 법인 경국대전과 같은 법전만큼의 이런 의례절차를 정리한 국조오례의 등도 중요하게 여겼으며, 기록의 나라답게 행사에 대한 많은 결보 보고서를 의궤와 같은 형태로 남겨 놓고 있다. 그 중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가져간 의궤도 이런 행사 결과를 정리한 내용 중의 하나라고 한다. 사직단친향병풍, 사직단에서 왕이 제사 지내는 절차 등을 기록한 병풍(복제품). 종묘 제사와 함께 국가에서 진행하는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다.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 서울 사직단에 왕이 직접제사 지내는 절차 등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병풍이다. 사직단은 서울과 전국의 큰 고을에 설치되었다. 서울에 ..

중앙박물관 2010.01.30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우리의 글, 한글

조선초 세종대왕이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이룬 한글 창제는 우리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자, 현 실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일본어도 있고, 만주어,몽골어 등 많은 글자들이 주변국가에서 존재해왔지만 독창적이 표기 방법과 음운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한글의 의미는 아주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그 내용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것 이었기에 수백년이 지난 지금 우리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복제품), 해례본으로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학자들과 세종대왕의 서문있다. 원본은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세종 26년에 백성에게 반포한 책이다. 세종..

중앙박물관 2010.01.30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조선의 왕궁

조선은 태조 이성계가 지금의 서울은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줄곧 서울을 수도로 하였으며, 한양 도성안에는 북궐인 경복궁, 동궐인 창덕궁, 창경궁, 서궐인 경희궁과 지금은 덕수궁으로 불리는 구한말 역사 현장인 경운궁이 있었다. 그 중 창덕궁을 비롯한 동궐은 태종이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그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으며, 경복궁은 임진왜란때에 불타버린것을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국력을 총 동원하여 복원한 궁굴이다. 서울을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읍이었으며, 임진왜란 등의 전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권위가 높았던 까닭에 일본 교토에 비해서 궁궐의 규모나 수량에 있어서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중국 북경자금성과 비교해서는 작지만 유교 법도에 따른 동아시아 국가의 궁궐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

중앙박물관 2010.01.30

경주 황남대총, 주변의 고분들

경주 대릉원 내에 있는 많은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무덤인 황남대총입니다. 남북으로 두개의 무덤이 연결된 쌍분으로 북분은 여자, 남분은 남자의 무덤으로 판명되었으며 왕릉인지는 알 수 없는 고분입니다. 황남대총 앞쪽에도 규모가 작은 쌍분이 있으며 주위로 많은 고분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천마총 맞은 편 연못가에 자리잡고 있는 대릉원에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입니다. 대릉원 황남대총 남쪽에 있는 작은 규모의 쌍분으로 만들어지 고분입니다. 황남대총 주변의 대릉원 고분들입니다. 미추왕릉 뒷편에 있는 소규모의 대릉원 봉분들입니다. 일부 봉분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대릉원 황남대총과 천마총 사이에 있는 작은 연못입니다. 경주 제98호 고분이라고도 불리는데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는 쌍무덤[瓢形..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112호), 한국 석탑을 대표하는 두개의 탑

우리나라 석탑을 대표하는 국보 112호로 지정된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다. '두개의 탑'이란 의미가 저절로 다가오는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후대 석탑의 전형을 제공하는 탑으로 정림사지 석탑과 함께 보통 생각했던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상당히 크고 당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은 규모의 석탑니다.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신라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국사에서 토함산 고개를 넘어 자동차로 한참을 달려가다가 동해와 만나기 직전 북쪽편에 우뚝 서 있는 두개의 탑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책으로만 보아왔던 웅장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직접 눈으로 보는 첫번째 장면입니다. 감은사지는 통일신라 가람배치의 특징인 1금당, 쌍탑형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개의 탑'이란 느낌이 저절로 ..

경주 분황사석탑 (국보 30호),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전 석탑

경주 황룡사와 더불어 신라시대 경주 시가지에 존재했던 사찰인 분황사에 있는 국보 30호로 지정된 분황사 석탑이다. 신라의 석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며,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과 대조를 이루는 석탑입니다. 이 분황사석탑은 모양은 구운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전탑처럼 보이지만 돌을 깎아서 벽돌처럼 만들어 쌓아 올린 아주 특이한 석탑으로 전탑을 모방했다고해서 모전석탑이라고 불린다. 사방의 입구에는 인왕상이 새겨져 있으며 기단의 4곳 모서리에는 사자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전탑을 흉내냈었으면서도 아주 독창적인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인 분황사 모전석탑입니다. 생긴 모양새는 전탑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작을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서 전탑처럼 세운 모전석탑입니다. 현재 보이는 분황사석..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 (국보 16호), 낙동강가 철로변에 서 있는 탑

안동시내에서 낙동강변을 따라서 안동댐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중앙선 기차가 다니는 철로가 있다. 그 중앙선 철로 너머에는 국보 16호로 지정된 안동신세동칠층전탑과 고택이 외롭게 숨어 있다. 안동 신세동칠층전탑은 자동차로 지나가다 보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 의미가 커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전탑은 흙으로 만든 벽돌로 쌓은 탑으로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고, 중국에 아주 보편화된 탑의 형태이다. 이 곳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전탑이지만 그 내력이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안동 신세동칠층전탑은 중앙선 철로변에 법흥동 고택과 함께 숨어 있는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안동 신세동칠층전탑은 1단의 기단과 7층의 탑신으로 이루어져..

영양 산해리 모전오층석탑 (국보 187호), 반변천가에 홀로 서 있는 아름다운 석탑

국보 187호로 지정된 봉감모전오층석탑으로 불리웠던 산해리 모전오층석탑은 영양에서 안동으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강변에 홀로 서 있는 석탑이다.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이 석탑은 외형상으로는 전탑처럼 보이지만 작을돌을 벽돌처럼 쌓아올린 분황사 석탑과 같은 종류인 모전석탑이다. 이 봉감모전오층석탑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있는 상당히 화려한 석탑이다. 이 석탑으로 규모로 볼때 이 곳에는 상당히 규모가 큰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기준으로는 도로에서 많이 떨어진 강가에 자리잡고 있지만, 옛날의 기준으로 보면 안동에서 강을 따라 올라오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던 거대한 평지사찰이었던 것 같다. 봉감모전오층석탑은 자연석을 벽돌처럼 깍아서 쌓았기때문에 전탑처럼 보인다. 분황사모전석탑과..

충주 탑평리칠층석탑 (국보 6호), 한반도 중심이라 중앙탑으로 불리는 석탑

충주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중앙탑으로 정식 명칭은 중원탑평리칠층석탑이고 국보 6호로 지정된 중요한 문화재이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중앙탑이라고 많이 불린다. 중부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석가탑처럼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장식은 별로 없지만 웅장함이 돋보이는 석탑이다. 이 지역은 고구려 전성기때 신라와 고구려간의 분쟁이 치열했던 곳으로 이 곳에서 수킬로미터 이내에 중원고구려비와 고구려 산성인 장미산성이 있다. 한반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 충주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탑평리 칠층석탑입니다. 충주 남한강변에 조성된 공원 중앙에 탑평리칠층석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주위는 약간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탑으로 석가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백제 석탑의 전형

백제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국보 9호로 지정된 정림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이후 대부분의 석탑이 이 형태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탑에 낙서를 하는 바람에 소정방이 세운 석탑이라는 오해를 갖고 있었던 석탑으로 그 제작연대가 석탑 중에서는 상당히 이른 편이고, 탑의 크기와 웅장한 자태, 균형미 등이 뛰어난 석탑이다. 감은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웅장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당나라 소정방이 세겨 놓았다는 글씨입니다.(?)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측면쪽에서 본 정림사지 오층석탑입니다. 정림사지 본당 건물쪽에서 본 오층석탑입니다. ☞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基壇)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국보 86호), 대리석으로 만든 화려한 중국풍의 석탑

새로이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인 국보 86호인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이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대리석으로 만든 석탑으로 중국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불교 석탑이지만 석탑을 구성하는 요소와 세부 조각들은 도교에 나오는 신선의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다. 이 석탑은 고려 충목왕때 세워졌다고 하는데 이런 석탑의 형태가 만주족, 몽고족을 포함해서 북방 민족들이 선호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도 북경을 가서 보면 상당수 문화재들이 이 경천사지 십층석탑에 표현된 내용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경천사지 10층석탑은 새로이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로서 박물관 로비에 전시되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석탑은 3층의 기단과 10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국보 289호), 백제계 석탑 양식 흔적 남은 고려전기 석탑

익산 왕궁리는 마한시대 도읍지로 알려져 있으며, 백제 무왕이 왕궁을 조성했던 장소에 있는 오층석탑이다. 왕궁리는 서동요로 잘 알려진 무왕이 궁궐로 조성했으나, 의자왕대에 이르러 사찰로 변모했다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이 왕궁리 오층석탑은 궁궐이 사찰로 변한 후에도 존재않지 않았으며, 지금 석탑이 있는 자리는 원래는 목탑이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국보 289호로 지정된 왕궁리 오층석탑은 고려전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밝혀졌으며, 1단의 기단과 5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석탑 기단부가 낮아서 약간 균형미가 떨어지는 느낌을 주고 있다. 백제계 사찰에 많은 여러가지 면에서 백제 석탑의 양식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이 왕궁리 석탑 주변에는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백제시..

익산 미륵사지 석탑 (국보 11호), 석탑 해체/복원 현장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이 세운 사찰인 미륵사터에 있는 석탑으로 목탑의 형식을 석탑으로 구현한 것으로 반쯤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 몇년 동안 해체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석탑이다. 2006년에 이 곳을 방문했을 때에도 해체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아직도 해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올해 최대의 문화재 발굴 성과인 미륵시자 석탑 사리장엄이 이 곳에서 발굴되었고, 사리장엄이 새로운 미륵사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금은 석탑의 형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도록 되어 있고, 석탑을 구성하고 있었던 석자재들이 내부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조만간 아름다운 미륵사지 석탑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하는 문화재 복원작업의 현장이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현장. 지금은 석탑 대부분이 해체..

안동 운흥동 오층전탑 (보물 56호), 안동역 구내에 숨어 있는 전탑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은 보물 56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문화재이지만, 현재 이 탑이 있는 위치는 안동역 구내 주차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벽돌로 쌓은 전탑으로 규모가 크지는 않은 편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심 기차역 한 구석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는 위치에 외롭고 서 있는 탑이다. 안동역 구내 주차장 한구석에 외롭게 자리잡고 있는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탑이 아주 깨끗하고 탑신의 지붕돌에 기와가 아직도 얹혀 있는 것으로 최근에 수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탑신 지붕돌의 기와를 얹은 흔적이 목탑 양식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은 각층의 몸돌마다 불상을 모시기 위한 감실이 있다.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2층 몸돌에 새겨진 인왕상. 조각..

안동 평화동 삼층석탑 (보물 114호), 주택가 한 가운데 위치한 석탑

안동 구도심 주택가 한 가운데에 외롭게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 보물 114호로 지정된 안동 평화동 삼층석탑이다. 바로 옆에 점집이 있어서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 석탑의 존재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주위 골목길들은 온통 '탑길'로 이름 붙혀져 있다. 통일신라 중기 이후 석탑이 보편화된 시기에 세워진 석탑으로 보이며, 그 내력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석탑의 규모는 초기 석탑인 감은사지 석탑 등에 비해서 상당히 작아졌지만 균형미, 조형미는 나름대로 갖추고 있는 석탑이다. 안동 옥동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의 형태를 보이며, 크기는 작아졌지만 조형미는 상당한 수준이다. 안동 옥동 삼층석탑은 주택가 한 가운데 있고 마치 개인주택 마당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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