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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797

고양 행주산성누리길(1), 고양시정연수원 부근 한강변

고양 행주산성누리길은 행주산성 아래 행주나루터가 있던 한강변에 조성된 공원에서 한강변을 따라서 약 3.73km에 거리의 산책로이다. 이곳에는 1970년대 무장공비 침입에 대비하여 세워졌던 철책선을 20008년제거하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능해진 곳이다. 이곳에는 고양시 시정연수원 주변에 넓은 공원을 조성해 놓고 있으며 옛 철책선의 일부를 기념으로 남겨 놓고 있다. 공원은 한강 남쪽편 개화산과 그 양쪽편 방화대교와 행주대교, 한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행주대교가 건설된 1970년대까지 한강을 건너던 행주나루가 있었던 곳이다. 행주나루는 일산 이산포나루와 함께 한강을 건너던 중요한 나루터로 조선시대 한강을 오가던 세곡선, 상선 등이 서해안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여 물때를 기다리면서 잠시 쉬어..

한국의 풍경 2014.02.19

[중국 취푸(曲阜)] 공묘(孔庙), 영성문과 홍도문 그리고 3개의 패방

공묘(孔庙)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중국 북경 국자감을 비롯하여 중국 전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성균관 대성전, 각 지역 향교 대성전도 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북경 국자감 공묘(孔庙)와 함께 공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수도 취푸(曲阜)의 공묘(孔庙)가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취푸의 공묘는 공자가 죽은 2년 되던 해에 공자가 살던 집을 묘(廟)로 삼면서 시작되었으며, 한고조 유방이 공묘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12명의 역대 황제들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올렸으며 100명 이상의 황제가 대리인을 파견하여 제사를 올렸다. 현재의 공묘는 북송대에 궁궐 형식을 사당을 건설하였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명나라대 크게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취푸(曲阜) 공묘(孔廟)는 곡부읍성 남문..

중국(China) 2014.02.19

고양 행주산성, 흙으로 쌓은 삼국시대 토성

행주산성은 한강 하류 북쪽편 낮은 야산인 덕양산에 자리잡고 있는 산성이다. 주변은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한강과 고양시를 관통하고 있는 창릉천이 천연해자를 이루고 있다. 행주산성은 한강유역 쟁탈전이 극심했던 한성백제기에서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삼국통일이 될때까지는 한강하구 수운을 장악하기 위한 중요한 요새였지만, 비교적 안정된 시기였던 조선시대에는 크게 중요시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다른 산성과는 달리 석축을 별도 쌓지 않고 삼국시대에 쌓은 토성을 보완하고 있다. 넓은 평야을 통제하기 위해 천연요새같은 지형에 쌓은 전형적인 삼국시대 산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임진왜란때 이 곳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기때문에 유명해진 곳이다. 행주산성의 토성은 요즘 도시 근교의 작은 산에 많이 조성된..

[중국 취푸(曲阜)] 공림 명묘군(明墓群), 명대 연성공(衍圣公)을 지낸 공자 종손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

공림(功林)은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의 묘역이 조성된 이래로 10만이 넘는 공자의 후손들이 묻혀있는 세계 최대의 가족묘역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한대에 유학이 국가이념으로 정착된 이래로 성역화되었으며 역대왕조의 후원을 받아 그 면적이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현재의 면적은 183ha에 이른다. 특히, 명왕조와 청왕조때에 황실의 후원을 받아 면적이 크게 확장되었는데, 명대에는 서쪽편으로, 청대에는 확장되었으며 명묘군, 청묘군이 형성되어 있다. 공자의 후손 중 장손은 송인종(1010~1063년)이래로 연성공으로 임명되어 공림과 공묘를 관리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직위와 역할 외에 세금을 걷고 곡부지역을 다스리는 제후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런 전통은 원,명,청대를 거쳐 중국에 사회주의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이어졌다고 ..

중국(China) 2014.02.17

고양 행주서원지와 충장사, 권율장군을 모신 서원과 사당

조선시대 임진왜란 3대 대첩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행주산성 아래에 있는 조그만 서원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강학과 제사기능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 서원에 모신 인물의 학풍을 따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학문과 사상을 논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곳 행주서원은 구한말인 1842년에 권율장군을을 모시는 서원 없어서 국왕인 헌종의 명으로 세워진 서원으로 제사기능을 주로 하고 있는 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제사기능을 1970년에 행주산성내 사당인 충장사로 옮겨져서 그 기능을 잃어버린 서원이다. 그래서 이름도 행주서원 옛터라는 의미로 행주서원지라고 부른다. 행주산성 아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행주나루터 인근에 세워진 이 행주서원 주변은 서울에서 가까운 대표적인 먹거리촌을 형성하고 있다. 행주서원지, 고양시 ..

고양 행주나루터와 먹거리촌이 형성된 행주산성마을

행주산성 아래 행주대교 부근에는 1978년 행주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많은 사람이 오고가던 행주나루터가 있다. 행주나루는 옛 양천현 공암진(개화산 부근) 나루와 연결되며, 한강 하류에서는 일산 이산포나루와 함께 중요한 나룻터였다. 행주나루는 남쪽 부평, 부천 지역과 북쪽 고양, 파주를 연결해 주는 육상교통로의 주요 나루이자 한강수운을 이용하는 세곡선을 비롯하여 화물선들이 서해안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던 나루였다. 행주나루의 한성백제시기부터 중요한 교통의 요지로 행주산성에는 지금도 백제가 쌓았던 토성이 남아 있다. 행주산성 아래 나루터 부근은 1970년대 행주대교가 세워지기 전까지도 나루가 운영되었으며, 나루를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마을로 한강이북 수도권에서는 명동성동, 약현성당 ..

한국의 풍경 2014.02.11

[중국 취푸(曲阜)] 공림(孔林), 공자가 묻힌 공자묘(孔子墓, Confucius' Tomb)

공림(孔林, Konglin)은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수도였던 취푸(곡부성) 북쪽 사수(泗水) 부근에 위치한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묘역이다. 공역은 2㎢의 넓은 숲으로 수십만그루의 진귀한 수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3,600여개의 비석과 10만기의 무덤들이 그 속에 자리잡고 있다. 공림에서도 중심이 되는 영역은 공자가 묻힌 무덤이라 할 수 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공자묘가 있는 영역은 제사시설이라 할 수 있든 형전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묘역안에는 공자와 그의 아들 공리, 손자이자 맹자의 스승이기도 한 공급의 무덤이 같이 있다. 형전을 통과하면 향나무처럼 생긴 울창한 고목들이 마치 도열한 것처럼 서 있는 길이 공자묘까지 이어지고 있고, 왼쪽편에는 '자사'로 잘 알려진 공자의 손자이자..

중국(China) 2014.02.05

고양 행주성당, 행주나루터 부근에 세워진 한옥형태의 성당 건축

고양시 행주산성로에 있는 행주성당이다. 이 성당은 서울부근에서는 명동성당, 약현성당 다음으로 오래된 성당으로 1910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28년 이곳으로 이축하면서 원래의 건축자재들을 대부분 재활용하여 지어졌다고 하며, 1949년에 다시한번 증축하였다고 한다. 한옥형태를 하고 있는 성당으로 장식을 하지 않은 간결하면서도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행주성당이 있는 행주산성 아래 위치한 마을은 지금은 행주대교와 자유로에 막혀 외딴 섬처럼 느껴지는 마을이지만, 1978년 한강을 건너는 행주대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나루터가 있었던 마을이다. 한강나루는 인천.김포지역과 한강 이북 지역을 연결해주는 주요 교통로였으며, 자유로를 비롯하여 많은 도로가 생겨나기 전까지 행주대교를 건넜던 자동차들..

[중국 취푸(曲阜)] 공림(孔林), 수수교(洙水桥)에서 형전(享殿)까지

공림은 옛 노나라 수도였던 산동성 취푸시 사수(泗水, 현 泗河) 남쪽편 공자 무덤 주위에 조성된 인공림으로 10만여 기의 공자 후손들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는 묘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동한시대에 공자묘를 성역화하면서 여러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역대 황제들이 땅을 하사하여 오늘날 규모로 확장되었다. 공림입구 광장에 매표소가 있는 패방을 지나서 향나무 고목들이 가로수 역할을 하는 길을 지나 공림의 실질적인 출입문인 '지성림문'을 들어서면 향나무를 비롯하여 수많은 종류의 고목 10만여그루가 숲을 이루고 그 아래 주인을 확인하기 조차도 힘든 10만여 공자후손들의 무덤들과 비석들을 볼 수 있다. '지성림문'을 들어서 공림안을 흐르는 작은 하천인 수수(洙水)를 볼 수 있다. 수수(洙水)는 묘역과 바깥세상을 ..

중국(China) 2014.01.30

서울 백련산(해발 215m), 산책하기 좋은 도심 뒷동산

백련산은 서울 서대문구와 은평구 사이에 있는 해발 215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북한산 향로봉에서 탕춘대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는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줄기는 남가좌동과 모래내를 지나 성산동에서 한강과 만나다. 백련산 양쪽으로는 북한산에서 발원한 홍제천과 불광천이 흐른다. 등산객들이 찾는 큰산이라기 보다는 동네 뒷산으로 공원역할을 하고 있는 작은 산이다. 백련산에는 통일신라시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백련사라는 사찰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양반들이 매사냥을 즐겼다고 하여 응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련산을 산책하는 길을 여러길이 있지만, 대체로 백련사 주변에서 정상에 세워진 은평정까지 약 1.4km의 등산로를 많이 이용한다. 해발 215m로 높지 않은 산이기때문에 산책하기에 좋..

한국의 풍경 2014.01.27

[중국 취푸(曲阜)] 공림(孔林), 광장에서 수수교(洙水桥)까지

곡부 공림(曲阜 孔林, 취푸 공린)은 공자와 후손들이 묻힌 무덤군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무덤군이다. 문헌에 공자가 죽은 뒤 노나라 성 북쪽 사상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원래의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한나라대에 공림이 조성되면서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고 하며, 여러왕조를 거치면서 그 면적이 확장되어 청대에는 면적 2백만평방미터에 10만여 그루가 넘는 나무가 심어진 거대한 인공림을 형성하고 있다. 곡부(曲阜, 취푸)는 공자의 출신지이자 춘추시대 주나라 무왕의 동생이자 건국공신이었던 주공 단이 분붕받은 이래로 노나라의 수도이자 오랜 세월동안 중국인의 정신적인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옛수도는 공자를 모신 공묘와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공부를 중심으로 청나라때 쌓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읍성의 형태를..

중국(China) 2014.01.27

고양 노고산(429m), 북한산성 맞은편에 위치한 북한산 경치가 아름다운 산

고양시 노고산(老姑山)은 해발 429m의 높지 않은 산으로 금강산에서 뻗어내린 광주산맥이 북한산 북쪽 우리령에서 갈라져서 행주산성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고양시와 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북한산 줄기와 나란히 남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사이에 창릉천이 흐른다. 산이 그리 높지 않고, 많은 등산객이 찾는 서울의 명산이 북한산 부근에 있어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산으로 예비군훈련장이 있는 곳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노고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북한산성 입구 맞은편 고양시 지축동 흥국사를 뒷편으로 오르는 길과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금바위저수지 뒷편 언덕으로 오르는 등산로를 비롯하여 여러갈래 길이 있는 것 같은데, 금바위저수지를 통해서 오르는 등산로가 잘 알려진 길로 보인다. ..

한국의 풍경 2014.01.25

[중국 칭다오(Qingdao] 우육면(牛肉面, 니우로미엔), 시원한 육수와 면발

우육면(牛肉面, 니우로미엔)은 중국 감숙성 난주(蘭州, Lanzhou)가 원산지로 알려진 음식지이지만, 중국 황화강 주변과 북부지방에서 만두와 함께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서민음식이다. 소고기 육수와 고기, 면을 함께 먹는 것으로 서민들이 많은 가는 시장 골목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대도시 중심부에는 우육점을 전문으로 하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볼 수 있다. 산동지방 대도시인 칭다오(Qingdao)와 제남(Jinan) 기차역 부근에서는 체인점인 가주우육면(加州牛肉面)과 이선생우육면(李先生牛肉面)을 많이 볼 수 있다. 맛은 약간 짠 편으로, 일반 중국음식점에서 느낄 수 있는 고수같은 강한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먹기에 편하다. 칭다오 기차역 앞에 있는 가주우육면(加州牛肉面). 우육면을 중심으로..

중국(China) 2014.01.25

[중국 칭다오(Qingdao, 靑島)] 중산공원과 백화원 주변

칭다오제일해수욕장이 있는 휘천만(汇泉湾, Huiquan Bay) 안쪽은 19세기말 독일이 칭다오를 조차하면서 개발한 구도심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주거지역으로 개발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공원으로 남아 있는 지역이다. 1930년대 중국인들이 독일로부터 넘겨받은 칭다오시를 다시한번 개발하면서 제일해수욕장동쪽편은 '팔대관풍경구'라고 하여 만국건축박람회라고 불릴 정도로 고급스러운 서구풍의 별장들이 들어서 있고, 해수욕장 서쪽 소어산공원 주변은 '소어산문화명인가구(小鱼山文化名人街区)'라 하여 19세기말 무술변법운동을 이끌었던 캉유웨이를 비롯하여 20세기초 칭다오를 대표하는 인사들을 비롯하여 중국인 부유층들이 살았던 주택가이다. 칭다오제일해수욕장 뒷편으로는 최근 북경올림픽을 기념하여 조성한 '휘천광장'과 '손문'..

중국(China) 2014.01.23

강화 용두돈대(龍頭墩臺), 손돌목 해협을 지키는 돈대

용두돈대는 광성보에서 염하(강화해협) 해안의 숲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손돌목돈대 아래에 볼 수 있다. 용두돈대는 고종8년(1871)에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광성포대를 설치할때 외곽초소 겸 포대로 세워졌다고 하다. 용두돈대는 김포와 강화사이에서 수심이 가장 빠르고 폭이 좁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편 광성포대, 덕진진의 남장포대, 김포쪽 덕포진 포대와 함께 강화해협(염하)을 지나다니는 선박을 공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손돌목은 강화해협 중에서도 그 폭이 가장 좁고 물살이 거센 곳으로 이 좁은 해협을 그냥 통과한 후 다시 밀물이 들어 올때까지는 퇴각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지형을 하고 있어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라 할 수 있다. 이 해협을 손돌목이라 하고 인조의 무능함을 ..

[중국 칭다오(Qingdao, 靑島)] 소어산문화명인가구(小鱼山文化名人街区), 칭다오를 대표하는 유명인사들이 살았던 거리

칭다오소어산문화명인가구(青島 小鱼山 文化名人街区)는 20세기초 칭다오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살았던 고택이 있는 주택가이다. 칭다오 기차역과 잔교, 총독부 등이 있는 구도심과 칭다오 제일해수욕장과 팔대관풍경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소어산공원 부근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칭다오시는 19세기말 교주만을 침범하면서 중국으로 부터 얻은 조차지를 개발한 도시로 교통과 무역의 중심이 되는 잔교, 기차역, 항만을 중심으로 처음 도시가 형성되었과 동쪽으로 신호산까지 칭다오 거류 외국인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신호산 동쪽편 소어산공원주변 전망좋은 언덕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조차지에서 물러나면서 5.4운동을 거쳐 중국인들이 근대도시로서 칭다오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주거지역으로 주로 중국..

중국(China) 2014.01.21

[중국 칭다오(Qingdao, 靑島)] 팔대관풍경구(八大关风景区,Badaguan Scenic Area)와 디얼해수욕장(第二海水浴场)

팔대관풍경구(八大关风景区,Badaguan Scenic Area)는 칭다오 디이해수욕장과 디얼해수욕장이 있는 타이핑만(Taiping Bay), 후이천만(Huiquan Bay)을 따라서 난 수킬로미터의 해안선 주변에 조성된 아름다운 도로와 주택들을 일컫는다. 이곳은 칭다오에서 독일이 물러난 이후 중국이 자체적으로 칭다오시를 적극 개발하던 1930년대 초반에 조성된 별장지역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 20여개 국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어 만국건축박람회(World Architectural Fair)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대건축물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으며, 당시 생활상을 보여주는 곳으로 1996는 중국 국가중점유적지로 선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칭다오는 1890년대 독일에 의해 개항된 이후 서구식 도..

중국(China) 2014.01.19

강화 광성포대, 신미.병인양요 이후 설치한 해안 포대

강화 광성보 손돌목돈대 아래 해안에 설치된 해안포대인 광성포대이다. 병인양요.신미양요 이후 해안 방어 화력 증강의 필요성에 따라 고종때 설치된 군사시설로 돈대와는 달리 해안가 낮은 위치에 설치하여 함선을 공격하여 명중률을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광성포대에는 9좌, 4좌, 3좌의 포자를 갖추고 총 16문의 화포를 배치할 수 있는 시설로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18문의 화포를 운영하는 포병대대와 비슷한 수준이다. 남쪽편 남장포대, 강화해협 반대편 김포의 덕포진 포대와 협공을 하며 선박을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정도 화력으로 당시 우리나라를 침공하는 함대를 방어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 1875년 일본의 운양호가 초지진을 침략했을때 거의 힘을 쓰지 못하고 오히려 운양호의 포격에 많은 피해를 ..

[중국 칭다오(Qingdao, 靑島)] 구도심 노사공원 주변 주택가 서양식 건물들

칭다오는 1897년 중국을 침략한 독일이 청나라정부로부터 "교주양허조약"으로 99년동안 칭다오지역을 조차하였다. 독일인 중국 내륙 진출과 식민지교역을 위한 창구로서 칭다오지역을 근대적인 도시로 개발하였다. 칭다오는 잔교와 항만시설, 철도가 건설되면서 무역항으로서 기능을 하게 되며 동시에 도로, 통신, 전력 등 도시기반시설을 갖추고 행정기능을 하는 독일총독부를 비롯한 관청들, 호텔 등 숙박시설, 무역업을 비롯한 상공업에 종사했던 회사들의 업무용 건물, 거주민들의 주택 등이 독일의 도시계획하에 세워졌다. 오늘날 칭다오의 모습을 보면 대체로 칭다오 기차역을 중심으로 상가를 비롯한 상업시설들이 많이 들어섰고, 해안에는 휴양시설을 겸한 호텔들이, 총독부 주변으로는 관청과 각국 영사관들이, 신호산 아래 기독교당 주..

중국(China) 2014.01.17

강화 손돌목 돈대, 광성보 언덕에 위치한 돈대

강화 해안을 지키는 많은 돈대를 중에서도 규모가 크고 높은 곳에 위치한 손돌목 돈대이다. 타원형을 하고 있으며 포를 설치할 수 있는 포좌 3개가 있으며, 여장은 벽돌로 쌓고 있다. 광성보가 관리하는 돈대 중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광성보 주변 포대와 돈대를 지휘할 수 있는 지휘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이며, 내부에는 무기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돈대 아래 해안가에는 용두돈대와 광성포대가 자리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광성포대, 남쪽에는 덕진진에 속한 남장포대와 덕진돈대가 위치하고 있다. 초지진부터 광성보까지는 강화해협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포대와 돈대가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다. 손돌목은 염하(강화해협)에서 가장 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 곳으로 청나라의 침입때 인조가 이곳을 건너서 피신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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