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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풍경

영덕 강구항 - 오십천 어귀에 자리잡은 동해안의 전형적인 어항

younghwan 2009. 12. 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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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 강구항은 동해안에서도 몇번째로 끈 하천에 속하는 영덕의 오십천이 태백산맥에서 흘러내려 동해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동해안에서는 제법 큰 편에 속하는 어항이다. 지금은 우리모두에게 영덕대게가 가장 많이 잡히는 어항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 사실은 대게에 대한 어업권에 강구항 선적에 어선에 많이 주어져서 대게가 강구항으로 출하되기 때문이고 이로 인해서 강구항이 유명해지면서 다른 어항 선적의 대게들도 강구항으로 잡은 대게를 가져오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 10년전 쯤에 인기를 끌었던 드라만 '그대 그리고 나'에서 최불암 아저씨가 사나이답게 열심히 일하던 곳으로 유명해 졌다. 이곳에는 동해안 어항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어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덕 서쪽 낙동정맥의 산악지대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모인 오십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강구항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곳으로 흘러드는 오십천이 큰 하천이기 때문에 동해안에서는 큰 규모의 항구가 형성될수 있었다.

영덕 오십천 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강구항의 전경. 동해안에서는 많은 어선이 정박해 있는 항구중의 하나이다.

영덕 강구항을 유명하게 만들어 준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를 홍보하는 간판. 영덕 강구항 이미지와 잘 어울렸던 모양이다.


큰바다로 접어드는 부분에 방파제와 등대.

영덕 강구항에 해가 질때 모습입니다.


영덕 명물 영덕대게.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 있다.

영덕 강구항 항구주변에 어시장과 대게를 파는 식당들이 많다.




 

지세는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관계로 서쪽은 높고 동쪽은 경사진 지세를 가지며, 군의 젖줄인 오십천이 금호와 원직리 일대에 넓은 들을 만들면서 동해로 유입되고 있다. 또한 이 강의 하구에는 천연의 어항인 강구항이 있어 동해안 일대의 주요한 어업기지의 하나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지계는 남쪽으로 남정면과 접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영덕읍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달산면과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있다. 읍내를 지나는 주요 하천으로는 달산, 지품을 지나오는 오십천이 읍을 서에서 남으로 흘러 강구항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고 있으며, 덕곡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덕곡천이 삼각주 공원 앞에서 오십천 본류와 합류하여 강구항으로 흐르고 있다. 교통으로는 면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7번 국도와 달산과 강구를 연결해주는 군도 6호가있으며, 강구와 축산, 영해를 연결하여 주는 지방도 918번인 강축도로가 강구에서 시작하고 있다. 현재 이 도로를 따라서 강구와 축산, 영해에 이르는 해안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으며, 면내의 금진과 금호리를 이어주는 농어촌 도로가 해안과 내륙을 이어주고 있어서 면내의 교통은 편리하다. 면내를 통과하는 하천으로는 약 40㎞의 길이와 유역면적이 약 30㎢인 오십천이 있다. 특히 하구에 위치한 강구항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천연항으로 오래 전부터 동해안에 있어서 어항과 군사적 요충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 강구항이 현재의 형태로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1901년부터이다. 이때는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로 이에 편승한 일본인 어부들이 강구 앞바다의 풍부한 어자원을 약탈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몰려올 때이다. 이들은 강구항을 이용하기 위하여 오십천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토사들이 항내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것을 여러 차례 준설한 후 임시정박지로서 강구항을 이용하며 그들의 어업기지로 삼았으며, 이후 일제는 자국민들의 어업기지화를 위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축항을 축조하기 위한 공사를 강구항에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919년부터이다. 강구항의 규모는 도수제인 남쪽 방파제의 길이가 255m, 북쪽 방파제 길이가 340m, 물량장 및 호안축대가 500m로 어엿한 항구의 형태를 가졌으며, 광복 이후에도 여러번 증, 개축이 되어 오늘과 같은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보다 앞서 강구항은 국가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는데, 조선시대 전기(前期)인 중종(재위 1506~1544)때에 순변사 고형산이 둘레 1,490척, 높이 9척의 돌로 오포성을 쌓고는 만호진(萬戶鎭)의 본영으로 삼아 해상으로 침입하는 왜적들을 방비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시대 후기인 고종8년(1871)에는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경계하기 위하여 연안 일대에 척화비를 세울 때 강구항에도 이 비가 세워질 정도로 중요한 항구였다. 오늘날에도 강구항은 연안과 원양어업의 전진기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연간 수천톤의 수산물이 거래되고 있다. 또한 강구항을 중심으로 홍게, 고동, 명태 등을 이용한 수산물 가공공장이 여러 곳에서 가동되고 있어 지역경제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면내의 농경지로써는 비옥한 토질 덕분에 양질의 쌀 생산지로유명한 오십천 유역의 금호평(錦湖坪)과 직천평(直川坪)에서 논농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내륙 산간 및 해안을 따라서 일부 밭농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면내의 대체적인 경제적 기반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형태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강구면의 해안선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전복, 미역, 김 등의 해산물이 풍부하며, 육지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급격하게 깊어지는 수심으로 연안 어장이 발달하여 대소의 삼각망, 정치망 등이 연안 바다에 펼쳐져 있어 성어기에는 많은 물량의 고기를 잡아서 높은 어획고를 올리고 있다. <출처: 강구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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