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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의 불상, 불사와 발원

younghwan 2012. 2. 1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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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는 불교가 크게 흥성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와는 달리 불상, 석탑 등은 화려한 문화재를 남겨 놓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신앙의 중심이 탑이나 불상 같은 상징물에서 불경 같은 것으로 변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호족들이나 향리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철불상을 제작하거나 사찰을 건립하는 등 많은 불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경주 중심의 통일신라와는 달리 지방적인 색채가 강한 투박하면서도 지역색이 강한 토속적인 불상들이 많이 제작되면서 고려적인 특징을 갖는 많은 불교 유물들을 남겨 놓고 있다. 

고려의 불상
국가와 왕실의 후원 속에서 성장한 고려시대의 불교는 민간에서도 현세적인 기복 신앙으로서 크게 융성하였다. 불상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불교 예술품으로써 불화와 함께 고려만의 독특한 전통이 만들어졌다. 고려시대 전기에는 통일신라 말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지방에서는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통일의 위업을 기념하기 위해 대규모로 사찰이 건립되었고, 대형 철불과 거대한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고려의 체제를 갖추게 되는 11세기 이후부터는 신라적인 색채에서 벗어나 고려적인 특징이 완연해지면서도 지역색이 강한 불상이 등장하였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나 한송사 석조보살좌상이 대표적이다. 고려후기인 13~14세기는 통일신라 후기적 요소나 고려 중기에 보였던 지역색이 강한 토착화된 불상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완숙한 경지의 우아하고 세련된 불상들이 만들어졌다. 아룰러 원과의 관계가 긴밀해 지면서 라마 불교가 전해져 티베트 계통의 이국적인 요소가 반영된 장식성이 강한 불상 양식을 형성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보살상
보살은 본래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가 되기 이전의 단계를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그 수행면에서 부처에 버금가는 최고의 존재로서, 소승불교의 아라한(나한)과 같은 높은 지위에 위치한다. 보살은 아라한과 달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이 세상에 머물며 중생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즉 보살은 부처와 중생을 연결해주는 중간자적인 존재다. 보살의 종류에는 부처의 본성인 지혜와 실천을 상징하는 문수와 보현이 있는가 하면, 힌두교적인 신격에서 영향을 받은 관음이 있다. 보살의 기본적인 형태는 머리를 묶고 보관을 쓰며 화려한 장신구와 천의를 걸친 귀인의 모습을 띤다. 아울러 손에는 각각의 보살을 상징하는 지물을 지니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온화한 표정의 보살상(금동보살좌상,왼쪽), 명상에 잠긴 듯한 보살상(금동보살좌상,가운데), 연꼭 봉오리를 쥐고 있는 보살상(금동보살좌상, 오른쪽), 고려후기
온화한 표정의 보살상(왼쪽)은 생각하고 있는 듯한 온화한 표정의 보살상이다. 머리카락은 상투처럼 높이 틀어 올린 후 두 귀 옆으로 다시 몇 가닥을 드리워 내렸다. 가슴과 배, 다리에는 화려한 장식을 걸쳤으며, 두 손은 각각 엄지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을 굽혀 중생을 구제하려는 염원을 나타냈다. 동으로 주조한 후 표면에 금박을 잘 입히기 위하여 검은색의 칠을 발랐다. 명상에 잠긴 듯한 보살상(가운데)은 깊이 명상에 잠긴 듯한 보살상이다.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올린 상투모양의 보계는 당시 보살상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배 부근에 노출된 속옷과 띠매듭, 무릎 옆으로 내린 소맷자락의 형태, 왼쪽 무릎을 덮은 나뭇잎꼴 옷자락 등은 같은 시기 여래상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연꼭 봉오리를 쥐고 있는 보살상(오른쪽)은 두 어깨를 감싸는 법의를 입고 몸 전체에 화려한 장신구를 한 보살상이다. 둥근 얼굴에 아래로 내려 감은 듯한 눈은 조용히 명상에 잠긴 듯하다. 머리에는 윗부분이 떨어져나간 상투모양의 보계가 남아 있다. 왼손에는 연꽃봉오리가 쥐여 있고, 오른 손은 가슴 쪽까지 올라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나한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로 소승불교의 수행의 네 단계 중 최고인 아라한과의 경지에 도달한 자를 가리킨다. 초기에는 부처도 아라한으로 불리웠으나 차츰 부처의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제자라는 개념으로 정리되었다. 부처, 보살, 각종 신장과 더불어 불교에서 중요한 신격을 지녔으며, 뛰어난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널리 믿게 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비를 구하고 외적의 격퇴를 염원하는 나한재를 자주 개최하는 등 나한신앙이 성행하였다.<출처:중앙박물관>


웃고 있는 나한상(금동나한입상), 13세기

대구 달성군 비슬산에 있는 대전사터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얼굴 부위가 마모되어 얼굴표정을 살피기는 어렵지만 고개를 쳐들어 웃고 있는 모습과 옷 주름 등은 자연스럽고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에 지물을 쥔 흔적이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나한상(청자나한좌상, 13세기, 왼쪽), 인간적인 모습이 나한상(청자나한좌상, 13세기, 오른쪽)
나한상(왼쪽)얼굴이 위를 향해 있는 나한으로 가슴 아래 부분은 결실되었다. 민머리의 승려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얼굴은 마모되어 표정이 분명하지 않지만, 웃는 모습인 듯하다. 어깨를 드러내지 않는 가사를 입고 있고, 목과 가슴에는 염주모양의 목걸이를 하고 있다. 인간적인 모습이 나한상(오른쪽)은 민머리의 승려형으로 정수리 부분과 눈썹, 눈매, 수염 등은 철화로 표현하였다. 신체 아랫부분과 손은 잘려 나간 상태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모습의 자비롭고 인간적인 나한의 모습으로 눈꼬리가 아래로 쳐진 초승달 모양의 가느다란 눈과 자연스런 입매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불사와 발원

고려인들은 산신이나 하늘신을 모시며 복을 빌듯이 불보살에 대해서도 여러 불사를 통해 정성과 믿음을 표현하며 각자의 소망을 발원하였다. 예컨대 인연 있는 사찰을 위해 불탑을 세우거나 범종과 반자(쇠북), 향로, 촛대, 경자와 같은 불구류를 시주하는 일. 불화의 제작이나 불경의 인쇄, 사경의 제작에 참여하는 일 등이 모두 발원을 위한 대표적인 불사들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불사가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행해졌으며, 왕족이나 고위관료뿐만 아니라 하급 관료나 군인, 향리까지 포함하는 보다 폭 넓은 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장군 부부가 시주한 동종 ("을사"명 동종), 고려 명종 15년(1185), 제천시 인근 출토 추정
상장군 조 아무개가 부친과 함께 발원하여 시주한 종이다. 우리나라 범종의 형식을 비교적 잘 갖춘 이 종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 중생의 편안함 등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상장군 조'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종의 모양이나 발원문에 나타나는 관직명칭 등으로 볼 때, 종을 시납한 '을사'년은 명종 15년이거나 고종 32년에 해당한다. <출처:중앙박물관>


용뉴와 용통(음통)


유두와 유곽


비천상(?)과 꽃무늬 모양의 당좌


청동으로 만든 반자(청동제 반자), 고려

반자(쇠북)는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로서, 주로 공양시간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 때 사용된다. 보통 청동으로 만들고 북처럼 가운데 부분을 쳐서 소리를 내는데, 금고라고도 한다. 이 반자는 아래 부분이 비어 있으며, 윗쪽에는 달아 맬 수 있도록 3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앞 뒷면에 모두 연꽃 무늬와 당초무늬를 채웠다. <출처:중앙박물관>



임금의 만수무강을 빌며 향리들이 시주한 반자("정우12년"명 반자), 고려 고종11년(1224),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출토

손씨 성의 향리들과 품관이 이의사라는 절에 시주한 반자(쇠북)이다. 가장자리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전쟁 종식 등을 기원하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반자가 충북 영동군 가곡리에서 출토된 점을 감안할 때, 반자를 시주한 이들은 토성으로 손씨가 있던 당시 영동현 소속의 풍곡부곡 또는 앙암부곡의 향리와 그곳 출신의 품관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출처:중앙박물관>


부처를 기쁘게 하는 방울(금강령), 고려
불교 의식에서 부처를 기쁘게 하고 중생의 잠자는 불성을 깨우치기 위해 흔든다는 금강령이다. 위 고리의 수에 따라 독고령.삼고령.오고령 등으로 나뉘는데, 이 유물을 원래 오로령이었으나 일부가 결실되었다. 몸통 면에 갑주와 창,활,도끼,검 등을 찬 무사상6구가 양각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은실로 무늬를 넣은 향로 (은입사청동향완), 13~14세기

 불단에 안치해놓고 향을 피우는 데 사용한 향완이다. 고려시대의 향완은 12세기 중반이후에 은입사 기법으로 화려하게 문양을 장식하기 시작하였다. 이 향완은 법지와 함꼐 용.여의주.구름.번개 등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은입사로 표현하였다. 제작시기는 13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향완: 나팔 모양의 기대와 밥그릇 모양의 몸체를 지닌 고배 형식의 향로로서, 우리나라 특유의 불구 형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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