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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려실] 고려의 불교 문화, 팔만대장경

younghwan 2012. 2. 1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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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고려를 대표하는 유물을 꼽으라고면 누구나 주저없이 대몽항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과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불교가 흥성했던 고려에서 불경과 인쇄문화는 밀접합 관계가 있었으며, 최초의 대장경 인쇄본을 비롯하여 많은 불경을 유물로 남겨 놓고 있다. 그 중 팔만대장경은  거란을 물리쳤던 경험을 바탕을 대몽항쟁기간 16년동안 다양한 계층의 참여로 만들어진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과 대몽항쟁
13세기에 들어 중국 대륙의 새로운 강자가 된 몽골이 무리하게 고려를 압박해오자 최씨 무신정권은 전쟁을 불사하며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백성들은 강화도 정권을 떠 받쳐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치열하게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전쟁과정에서 약 2세기 전 거란군을 물리치려고 새겼던 초조대장경판이 소실되자, 최씨 정권은 부처의 가호로 몽골군을 격퇴하기 위해 새로 대장경을 새겼다. 무려 16년에 걸쳐 승려와 진사, 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의 참여 속에 새겨진 대장경은 그 경판이 8만 여장에 이른다 하여 보통 팔만대장경이라 불린다. 몽골과의 오랜 전쟁은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진 이듬해에 사실상 종식되었고(고종 46년, 1259), 뒤이은 무신정권들의 붕괴 속에서 마침내 개경환도가 이루어졌다. 이에 최씨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이던 삼별초는 환도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켜 진도와 제주도로 그 거점을 옮기면서 강력히 저항하였다. 이들은 한때 전라도와 경상도 해안 지역을 장악하기도 하였으나 원종 14년(1273)에 결국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 진압되고 말았다. <출처:중앙박물관>


팔만대장경판으로 인쇄한 열반경(대반열반경), 고려 고종 18년(1241), 송성문 기증
고종 28년(1241)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대반열반경의 유일본이다. 대반열반경은 석가모니의 열반에 대해 말한 경전으로 중국 북량의 인도 승려 담무찬 Dharmakema이 번역한 것이다. 각 경판 맨 앞의 판수제에는 위에서부터 차례로 권차券次, 장차 張次, 함차 函次를 표시하였다. 장차의 단위는 "장 丈"자를 쓴 초조대장경판과 달리 "장 張"자를 썼다. 간혹 함차 아래에 쓴 것은 경판을 직접 새긴 각수의 이름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팔만대장경판으로 후대에 인쇄한 학습용 불교 사전(경률이상), 고려후기~조선전기, 송성문 기증
중국 양나라의 승려 승민.보창 등이 편찬한 일종의 불교 사전으로, 고종 30년(1243)에 남해의 분사대장도감에서 새긴 경판을 후대에 인출한 것이다. 각 판 맨 끝의 작은 글씨는 본문 내용의 출전을 밝힌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팔만대장경의 내용 구성 형식


이규보의 문집(동국이상국집), 조선후기
저명한 문인이자 관료인 이규보(1168~1241)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자체가 뛰어난 문학 작품일 뿐만 아니라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고종214년, 1237)도 그러한 글 중의 하나로서, 대장경을 새겨 그 공덕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겠다는 고종과 신하들의 의지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도하며 대장경의 조판을 부처와 하늘에 아뢰는 글
.. 이에 (현종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가지고, 전후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몽골)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 엎드려 원하옵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헤아리셔서 신통한 힘을 빌려주어 완악한 오랑캐(몽골)로 하여금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여, 전쟁이 그치고 중외가 편안하며, 모후와 저군(태자)이 무강한 수를 누리고 나라의 국운이 만세토록 유지되게 해주신다면, ....
- '동국이상국집' 권25 잡저 대장각판군신기고문 -
<출처:중앙박물관>


합천 해인사에서 보관중인 팔만대장경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을 새긴 곳으로 알려진 강화 선원사지.


거란군을 물리치려고 새긴 대장경의 인쇄본(초조본 유가사지론 권제32), 국보 272호, 11세기전반, 송성문 기증
우라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가운데 '유가사지론'의 제32권을 당시의 경판으로 인쇄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 거란군이 개경을 침범하자 부처의 가호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새기기 시작하였다. 경竟, 경鏡 등 송나라 태조의 할아버지 이름 경敬자와 발음이 같은 글자는 한 획씩 생략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옛 판본을 따라 다시 새긴 화엄경(대광불화엄경 권제20),보물 1083호, 13~14세기
중국 당나라의 승려 반야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 중 '보현행원품'이다. 보현보살의 권유로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는 구도 과정을 다루었다. 표지는 감색종이이며, 표제와 권차, 정원 연간(785~805)의 번역본임을 뜻하는 "정貞"자 등은 금니로 썼다. 판식과 판각기법 등으로 볼 때, 고려 전기의 판본을 따라 후에 다시 새겨 인쇄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기존 사경을 약간 보충한 사경(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재7), 보물1138호
천농 직장 권도남 등이 죽은 아버지와 선조들의 명복을 빌며 공민왕 15년(1366) 안동 봉정사에 봉안하 사경이다. '묘법연화경'을 감색 종이에 금니로 베껴 썼는데, 끝부분과 사성기에 비해 본문 앞부분은 상대적으로 금니 빛깔이 바래고 글씨 획의 일부가 희미하다. 기존 사경의 본문 뒷부분을 보충하고 자신들의 사성기를 써서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 전농 직장: 국가 대재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전농시의 하급 관원 <출처:중앙박물관> 

 

최충헌 가족을 위한 호신용 경전과 경갑(소자본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합각), 보물 691호, 최씨 일가가 들고 다니던 휴대용 다라니경.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1149~1291)과 그 두 아들 최우.최항을 위해 만든 휴대용 불경과 경갑이다. 불경은 이들 최충헌 부자가 자신들의 호신과 재난 예방을 위해 사가판으로 간행한 것으로, 은 바탕에 금을 입힌 경갑에 넣어 끈으로 매어 차고 다니도록 하였다. 불경 맨 끝에 발원문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수선사 제2조 혜심이 지은 공인집이다. 혜심은 불경이나 산문 조사의 어록에서 공안 1,125측을 뽁고 그 강령의 요지를 제시한법과 찬송을 붙여 이 책을 만들었다.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몽골과의 전쟁으로 그 초판이 불탄 뒤 817측을 더하여 고종 31년(1244)에 대장도감 남해분사에서 새로 펴냈다.
* 공안: 선종 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 과정에 모법이 되거나 깨치고 못 깨침을 판정하는 규범을 말한다. <출처:중앙박물관>


현존 세계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 직지 (백운화상초록불직지심체요절,복제품), 고려 우왕 3년(1377),
고려말의 선승 백운화상 경한이 공민왕 21년(1372)에 역대 여러 부처와 고승의 설법, 불탑, 편지, 서문 등에서 선의 요체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만 뽑아 엮은 책이다. 우왕 3년(1377)에 청주목(지금의 청주) 흥덕사에서 비구니 묘덕의 시주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이 책은 독일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물로서, 2001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원래 상하 두 책이었으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하권 한 책뿐으로 진본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록 활자의 주조와 판짜기 기법 등에서 서툰 점이 적지 않지만, 원나라의 지배로 관청 주도로 금속활자 인쇄가 점차 마비되어 가던 시기에 지방 사찰이 직접 활자를 주조하여 책을 찍어냄으로써 금속활자 인쇄의 맥을 이어주었음을 보여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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