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중명전은 정동길 정동극장 뒷편에 옛 미국대사관과 나란히 있는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덕수궁 일원에서 제외되어 서울구락부라는 사교단체 등에 임대되었던 건물이다. 중명전은 1897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진 건물로 원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덕수궁 화재때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서 중명전이라는 이름으로 바뀐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덕수궁과 떨어져 있지만, 동쪽편의 미국대사관저, 서쪽편의 예원학교와 함께 덕수궁 궐역에 포함되어 있었다.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영역은 원래의 1/3정도로 축소되어 대한제국의 궁궐이었음에도 다른 궁궐에 비해 좁아 보인다. 이 곳은 덕수궁 화재 이후 편전으로 사용되어 외교사신의 접견이 이루어졌던 장소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중명전은 러시안 사바찐이 설계한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축물로 다락방이 있는 2층 규모의 건물이다. 원래 왕실도서관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당시에 지어진 다른 서양식 가옥들과 비슷한 형태로 지어졌다. 1층은 가운데에 복도를 두고 양쪽에 넓은 거실과 서재를 두고 있는 형태이며, 2층은 공개되지 않고 있어 볼 수는 없지만 1층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 건물바깥쪽에는 3면에 테라스를 두어서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최근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공사가 진행되었고, 지금은 1층에 을사늑약과 헤이그밀사 파견에 대한 각종 자료를 전시해 놓고 있다.
중명전과 예원학교 일대는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였다가, 1897년에 경운궁(현 덕수궁)을 확장할때에 궁궐로 편입되었다. 경운궁 본궁과 이 일대 사이에 이미 미국공사관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별궁과 같이 사용하였다. 중명전은 왕실도서관으로 지은 2층 벽돌 건물이며, 정관헌과 독립문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낀(A.I. Satbtin)이 설계했다. 중명전 외에도 환벽정을 비롯한 10여채의 전각들이 있었으나, 1920년대에 이 일대가 덕수궁에서 제외되면서 다른 건물들은 없어졌다. 중명전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비운의 현장인 동시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특사를 파견한 곳이기도 하다. <출처:문화재청>
왕실 도서관으로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인 덕수궁 중명전. 한옥 기준으로 앞면 7칸의 정사각형 형태의 건축물로 3면에 테라스를 설치해 놓고 있다. 러시안 건축가 사바찐이 설계한 건축물로 러시아풍 양식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중명전 정문 출입문. 이 건물의 설계한 러시아인이 독립문을 설계했다고 하는데, 건물 입구에서 독립문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건물은 3면이 복도 형태의 테라스로 둘러져 있어서, 한옥의 툇마루처럼 의자에 앉아 정원을 감상하면서 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중명전 테라스
중명전 출입문
출입문을 들어서면 가운데에 복도가 있고 양쪽으로 방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왼편에는 공식행사나 만찬 등을 할 수 있는 넓은 거실이 있고, 오른편에는 서재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2개의 방이 있다.
중명전의 탄생
중명전은 1897년경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했다.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이었으나, 1904년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명전은 덕수궁에서 홀로 떨어져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 궐역에 속한 전각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제국 당시 전각들이 대부분 훼손되어 현재 덕수궁은 1/3 정도로 축소되었다. <출처:문화재청>
중명전 복도 왼쪽편 넓은 방. 이곳에서 공식행사나 만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중명전의 유래에 대해 설명해 놓은 자료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중명전을 침범하여 을사늑약을 강요하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경. 중명전에서 치욕의 <을사늑약>이 강제된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출처:문화재청>
중명전 1층 복도 오른쪽 첫번째 방에는 고종이 을사늑약 무효을 알리기 위해 각국 정상들에게 보낸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광무황제,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 사회에 알리다. 일제의 총칼 아래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고종은 주권 회복을 위한 외교적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원수들에게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는 친서를 보내어 지지를 호소하였다. <출처:문화재청>
힐버트에게 내린 고종의 친서, 고종은 힐버트에게 구미열강의 원수들에게 자신의 친서를 전달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임무를 맡겼다.
고종 친서, 고종이 영국 <트리뷴>지의 스토리 기자에게 전달한 친서(1906년.1.29)
1. 1905년 11월 17일 일본 사신과 박제순이 체결한 조약 5조는 황제께서 처음부터 인허하지 않았고 또한 서명하지 않았다.
2. 황제께서는 이 조약을 일본이 마음대로 반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3. 황제께서는 독립 황제권을 조금도 다른 나라에 양여하지 않았다.
4. 일본이 외교권에 대해 조약을 강제한 것도 근거가 없는데 하물며 내치상에 한 문제라도 어떻게 인준할 수 있는가.
5. 황제께서는 통감이 와서 상주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고 황제권을 조금이라도 외국인이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6. 황제께서는 세계 각 대국이 한국외교권을 함께 보호하고 그 기한은 5년으로 할 것을 원한다. <출처:문화재청>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다.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알리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2차 만국평화회의(1907)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이는 열강들이 주도하는 평화회의에서 일제의 침략주의를 폭로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함이었다. <출처:문화재청>
거실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2번째 방. 이곳에는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당시의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실상. 2차 만국평화회의(1907.6.15~10.18)는 46개국에서 주로 외교관과 군인들이 대표로 참석했다. 회의의 주요 의제는 전쟁법규의 제정이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과 미국이 각기 군비 증강에 혈안이 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출처:문화재청>
헤이그 특사 탄원서, 1907.6.27, 네덜란드 국립문서 보관소, 복제
헤이그 특사 임명장
만국평회회의보, 1907,7.5, 네덜란드 국림문서보관소, 복제
헤이그특사, 그후
돌아오지 못한 특사들, 일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특사들에 대한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는 교형, 이위종과 이미 순국한 이준에게는 종신징역을 선고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이후 그들은 <정미조약>을 강제하고, 마침내 군대 해산령을 내려 한국군을 무력화시키고 1910년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이준
1907년 7월 14일 헤이그 현지에서 순국하였다. 동년 9월 헤이그 니우에익 엔 되이넨이라는 공동묘지에서 이상설과 이위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출처:문화재청>
이상설
1980년 미국을 방문하여 재미 한인동포들의 독립운동을 촉구한 뒤 노령 연해주로 돌아와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을 도왔다. 그리고 1910년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의 의병을 규합하여 12도의군을 편성하고, 병합 직후 성명회를 조직하여 '한일합병'에 반대하는 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국제사회에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일제강점 이후에도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행하면서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나아가 1914년 만주.노령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광복군을 세우기도 하였고, 1915년 상해에서 신한혁명단을 조직하여 끊임없는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3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48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이위종
이상설과 헤어진 후 러시아로 돌아가 주러한국공사였던 아버지 이범진을 대신해 연해주 의병활동을 대행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다음 해인 1911년 병합의 울분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 이범진이 자결하자, 이위종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1916년 1월 블라디미르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제정 러시아군 장교로 임관한다. 그러나 1918년 4월을 전후하여 제정 러시아군에서 붉은 군대로 옮겨가서, 일본군을 상대로 혁명투쟁을 전개하여 한인 적군부대 사령관으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중명전은 러시안 건축가 사비찐이 설계하였는데, 그는 덕수궁 정관헌, 독립문 등 많은 서양식 건축물들을 설계하였다.
중명전을 만든 사비찐
중명전은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에 의해 설계되었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건축 기술자로 활동했는데, 1883년 한국 정부에 고용되어 인천과 서울에서 활발한 건축 활동을 벌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기도 한 그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고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약 20여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근대 서양식 건축물을 설계하였다. <출처:문화재청>
복원공사가 한참 진행중이던 2010년 봄 덕수궁 중명전. 구한말 기준으로는 규모가 큰 건물로 보이며, 건물 전체에서 러시아풍 건축물의 느낌이 난다.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 중명전은 덕수궁에서 떨어전 정동극장 뒷편, 예원학교와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궁궐_종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덕궁] 낙선재 부속 건물들과 승화루, 상량정 (1) | 2013.01.09 |
---|---|
[창덕궁] 낙선재 일원 (보물 1764호), 마지막으로 왕족이 거처하던 곳 (0) | 2012.11.18 |
[창덕궁] 성정각과 관물헌,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 (0) | 2012.10.12 |
[창덕궁] 선정전(보물814호), 국왕이 집무를 보던 편전건물로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 (0) | 2012.10.10 |
[창덕궁] 인정전(국보 225호), 창덕궁과 동궐의 중심이 되는 정전 (0) | 2012.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