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성곽(산성_읍성)

남한산성 수어장대(서장대), 청량산 정상에 세운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

younghwan 2013. 8. 22. 14:19
반응형


 남한산성에 쌓은 4개의 장대 중 서장대에 해당하는 수어장대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안에서 최고 높은 곳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성내부와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특히 도성인 한양과 한강, 그리고 한양과 남한산성까지의 길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삼전도비가 있는 송파구 일대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라 인조가 직접 수어장대에 올라 전행을 지휘했다고 한다.

 수어장대는 원래 1층 누각이었으나, 영조때 다시 위에 2층 누각을 지었으며, 바깥에는 '수어장대', 안쪽에는 병자호란의 시련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는데, 현재 '무망루'현편은 수어장대 오른쪽에 별도의 보호각을 만들어서 전시해 놓고 있다. 인조때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공사책임자 중 한명인 이회장군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는데 그를 기리는 사당인 '청량당'과 그의 죽음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는 매바위가 수어장대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가 청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피난갈 때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인 '손돌목'과 관련된 전설과 함께 의심이 많고 무능한 인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씁씁한 느낌을 가지게 만든다. 지금 남한산성에 올라보면 난공불락의 요새인 이 곳에서 적절한 수의 병사와 충분히 저장된 식량이 있었다면, 청나라에 굴복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당시 이 곳에 궁녀를 비롯하여 수많은 불필요한 사람을 피난시켜서 식량을 소모하게 하고, 전쟁이 있을 줄 알았음에도 적절한 군량미를 저장해 놓지 않았던 당시 집권세력의 무능함이 남한산성을 오를때마다 느껴지게 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출처:문화재청>


현재의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영조때 2층 누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주심포 양식으로 만든 앞면 5칸, 옆면 4칸의 규모가 있어 보인다. 대표적인 우리나라 산성의 장대이다.


2010년 여름


수어장대는 조선후기 영조대에 지어진 것으로 기존 읍성이나 산성의 장대의 누각은 사방이 개방되었던 것에 비해, 판문을 달아 놓아 조총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수어장대 현판


측면에서 본 수어장대. 옆면은 4칸 규모로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졌으며 양쪽에 1칸씩 통로를 두고 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두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 곳의 책임자가 왕이 아니고 이곳을 다스리던 광주목사(유수)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어장대 공포와 단청


수어장대 1층는 가운데에 앞면3칸, 옆면 2칸짜리 넓은 마루를 두고 4면으로 통로를 만들어 놓고 있다.


수어장대 1층 내부. 마루가 깔려 있어서 남한산성을 오르는 사람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수어장대 2층 문루 내부에 있던 '무망루'라 적힌 현판은 별도에 보호각에서 전시하고 있다.

무망루,
조선 영조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 내편의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하였다. 무망루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다. <출처:광주시청>




'무망루' 현판을 보호하고 있는 보호각.

매바위
남한산성 남쪽 추조를 맡았던 이회는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철저히 점검을 하여 공사를 진행하다가 기일내에 완공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결국 이회는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고 그는 죽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죄간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그가 절명하는 순간 매 한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슬피 울다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출처:광주시청>


수어장대 앞쪽에 위치한 매바위. 이 곳에서 이회 장군이 참수당할 때 매가 날아와 앉아 그의 죽음을 지켜 보았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당시 이회 장군의 죽음에 대해서 여론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그를 위한 사당을 짓고, 이런 전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어장대 앞에 심어진 소나무


탁지부측량소 삼각점, 대한제국 말기(1908~1910년초) 탁지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건국 이래 최초로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일부 지역에 지적세부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일제히 삼각점을 설치하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을 구소감점이라고 하였다. 이곳 경기도 남한산성 도립공원의 수어장대에 설치되어 있는 구소삼각점은 '장대'라고 불리며, 머리 부분에 '+'자가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는 '탁지부'라고 음각되어 있다. <출처:광주시청>


수어장대 앞 마당


2013년 남한산성 수어장대


2010년 남한산성 수어장대


수어장대 아래에서 본 모습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