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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회화

younghwan 2010. 11. 2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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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실은 회화를 국가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서 다양한 회화를 제작하였다. 현재 프랑스와 반환 문제로 이슈화되어 있는 조선왕조 의궤를 비롯하여 많은 왕실 기록문서에는 화려한 채색이 들어가 있는 그림들이 남아 있는데, 이들은 중요한 역사적 기록문화이자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상당히 높은 작품들이다. 조선왕조는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바대로 도화서라는 관청을 두어 왕실에 필요한 그림을 그렸으며, 국정의 중요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도록 하였다. 특히 정조대에서는 다양한 궁중행사들을 화려하고 정밀하게 그린 각종 의궤를 상당히 많이 제작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활용하였다. 또한 국왕의 어진은 왕실 도화서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업무로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화원이 제작하고 이를 진전에 모셔서 철저하게 관리하였다고 한다.

 고궁박물관에는 많은 작품들은 아니지만, 조선왕실에서 그린 작품들을 대표한 특징을 가진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그림을 그려서 병품으로 만든 것으로 기록화적인 의미를 갖는 것도 있고, 왕실 생활과 의례에 사용하는 다양한 병풍들의 모습을 보여는 모란꽃이 그려진 병풍, 산수화가 그려진 병풍과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옛 청동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물과 꽃.채소 등을 곁들여 그린 기명절지도 등을 전시해 놓고 있다.


왕세자 병세호전 축하잔치 병풍. 궁중화원이 왕실행사를 그린 기록화의 성격을 갖는 작품이다.


이런 행사그림 사실을 보이는 대로 그린 그림이라기 보다는 기록의 의미를 각기 위해 조감도 형태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1875년 12월12일에 왕세자(훗날 순종)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21일에 병세가 호전되자 이를 기념해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했던 축하 의식 장면을 그려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 병풍의 첫폭과 마지막 폭에는 그림의 제작 배경과 함께 축하 인사를 드린 신하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왕조의 궁중기록화
조선왕조의 궁중에서는 왕실의 존엄을 나타내고 국가의 안정적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행사가 자주 열렸는데, 이는 '국조오례의' 등 의례와 관련한 조선왕조의 규율에 따라 엄격하게 치러졌다. 궁중의 행사는 그림으로 그려져 그 의미를 기념하고 기록하였으며, 이를 궁중기록화라고 한다. 왕과 왕비, 왕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의 출산, 생일, 쾌유 등 경사와 장례 등의 애사가 궁중기록화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궁중기록화의 목적은 의식의 규모 및 진행 과정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정확성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도화서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화원들이 제작을 담당하였으며, 화려하고 장엄한 의식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하여 밝은 채색이 주로 사용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책 가득한 책꽂이 그림

궁중화원의 업무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쳐 도화서에 들어온 궁중화원들의 업무는 매우 다양하였다. 국정이나 왕실과 관련하여 붓으로 줄 긋고 채색하는 일은 모두 화원들의 업무였다. 화원의 일은 어진 등 초상화 제작, 장식 또는 행사용 그림을 그리는 외에도 국가의례와 관련하여 어보.어책의 각자한 글씨를 금가루로 메우는 전금, 의물 상자들의 표면 장식 그림 그리기, 국가 기록물을 편찬할 때 글자쓰는 관리 (사자관) 들이 바르게 쓰도록 보조선을 긋는 인찰, 의궤반차도와 도설 등 책에 실을 삽화 그리기 등 매우 다양하였다. 또 외교.국방과 관련해서는 중국 연행과 일본 통신사행을 수행하여 그림 업무를 도맡았고, 각종 지도와 지형도를 제작하였다. 이외에도 궁궐 건축과 왕실 생활에 관련되 업무로 궁궐 건물과 편액 등에 단청을 하였고, 왕실에서 사용하는 도자기의 표면 장식 그림이나 임금이 착용할 의복의 수본 그리기도 화원의 일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모란병과 괴석모란병. 괴석모란병은 흙무지 위에 피어난 모란에 괴석을 더하여 그린 모란병이다. 모란이 그려진 병풍은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을 그리는 일반적인 병풍과는 달리 모란꽃이 수직으로 배열된 도식적인 장식성을 강조한 병풍으로 격식과 위엄을 강조하는 각종 궁중행상에 사용되는 병풍이라고 한다.

궁중의 모란그림 병풍
각폭마다 과장된 크기의 모란 꽃송이를 세로로 길게 배치하고 초목색 잎사귀와 함께 화려하게 채색한 장식병풍으로, 궁중의 각종 행사에 널리 사용되었기에 '궁모란병'이라고도 불린다. 모란 병풍은 수직 방향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로 꽃송이를 번갈아가며 정렬시킨 도상을 매 폭마다 반복하여 그림으로써 일반적인 화조도 병풍과 달리 도식적인 장식성을 극대화하였다. 도식적 장식성이 주는 질서정연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로 인해 모란병풍은 엄숙함과 질서가 요구되는 의식.의례 등에 사용된 조선왕실의 대표적 의례용 병풍이었다. 가례나 존호를 올리는 의식, 영정을 봉안하는 등의 각종 궁중행사에 두루 사용되었다. 왕세자의 관례의식을 그린 '수교도첩' 중 관례를 올린 주인이 의례를 주도하고 참석한 이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예물을 올리는 장면을 묘사한 <회빈객의도>에서도 모란병풍이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전해지는 궁모란병은 4폭 또는 8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얕은 흙무지에 피어난 모란의 모습 또는 괴석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모란괴석그림과 화훼그림. 꽃그림은 여성의 방을 꾸미는 장식용으로 많이 그려졌으며 궁중화훼도는 도화서 화원들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중요한 분야였다고 한다.

궁중의 꽃그림
동양의 전통적 사유방식 속에서 꽃은 천지를 장식하고 천하를 화려하게 해주며, 여러 사람에게 보여 화기를 조화시킨다고 여겨졌다. 또한 그 자체의 아름다움과 특유의 상징성으로 인해 고금으 많은 시인과 화가들의 창작 주제가 되었으며 특히 여성의 방을 꾸미는 장식용 그림에 즐겨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화훼도는 그림에 관한 사무를 맡은 도화서 화원의 시험과목으로 채택되었을 정도로 비중있는 화목이었으며, 궁궐의 실내를 꾸미는 장식병풍의 주요한 소재로 그려졌다. 화훼도에 등장하는 꽃과 나무에는 모란.매화.연화.동백.송죽.오동.석류 등이 있으며 각양각색의 새나 풀벌레와 어울려 그려진 화조화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되어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더불어 부부간의 금슬 등 길상의 의미를 담아내기도 하였다. 궁중 화훼도는 뛰어난 화원들이 안정된 구도와 정교한 필치로 그려내어 회화성이 돋보이며 민간이도 영향을 주어 다양한 화풍의 화훼도가 그려졌다. <출처:고궁박물관>


연꽃과 물새그림. 연꽃은 늪속에서 피는 그 자연적 특징으로 인해서 동서양을 통해서 많은 사랑을 받은 꽃그림의 주제이자, 지금도 많은 사진작가들에게 사랑받는 꽃이기도 하다.


그림 중 활짝 핀 연꽃 아래 물새들이 노니는 장면이다.

연꽃그림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자라면서도 더러운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만큼 깨끗하게 꽃을 피워내는 특성으로 세파에 물들지 않는 청아함과 고결한 모습을 간직한 군자의 꽃으로 비유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연꽃의 고고한 자태와 속성을 애호하여 정원에 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이를 벗 삼았다. 왕실에서도 궁궐 후원의 못에 연꽃을 심어 가까이 감상하였는데, 숙종은 창덕궁 후원에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은 후 '내 평생 이목을 부리지 않고 홀로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범속을 벗어나 맑고 깨끗한 속성이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그 이유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처럼 연꽃은 고고한 속성으로 폭넓게 사랑 받았으며, 많은 조선시대 문인들은 연꽃을 소재로 한 시와 그림을 통해 고결하게 살고 싶은 염원을 표현하였다. 여름날 녹음이 우거진 가운데 화사하고 청아하게 피어난 연꽃을 그린 그림은 산뜻하고 시원스러운 마감으로 인해 실내를 꾸미는 장식그림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었다. 장식용 연꽃 그림에는 연꽃만 그린 것도 있으나 잠자리나 나비, 개구리, 송사리나 각종 민물고기 및 백로.오리.원앙.물총새.해오라기 같은 물새와 함께 그려지면서 과거급제.득남.부부화합 등의 상징적 의미를 담기도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진귀한 그릇.꽃.열매. 구한말 청나라 금석학의 영향으로 화가 장승업에 의해서 크게 유명한 진기한 그릇, 꽃과 열매가 있는 기명절지도이다.


옛 청동표면에 새겨진 부조의 묘한 질감을 적절히 묘사하는데 묘미가 있었던 그림으로 보인다.

옛 청동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물과 꽃.채소 등을 곁들여 그린 기명절지도는 부귀.복.장수와 같은 세속의 행복을 기원하는 그림이다. 기명절지도는 중국 청대 고증학과 금석학의 발달을 배경으로 등장했던 금석화파의 박고도 영향으로 조선시대 말기 장승업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으며 왕실의 회화를 담당했던 직업화가에 의해 정교한 필치와 채색으로 발전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해오라기와 매


산수. 김은호가 그린 그림이다. 김은호는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생존했던 화가로 많은 산수작품을 남겨 놓고 있으며, TV쇼 진품명품에 아마도 제일 많이 등장하는 화가가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순종 어진을 그리는 등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산수도는 조선말 남송화풍의 전통이 남아 있는 산수도라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유행했던 남종화풍의 전통과 청록산수를 절충해서 그린 산수도이다. 김은호는 안중식.조석진의 제자로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백학도'와 1928년 순종 어진 및 태조, 세조 어진을 그리는 등 근대기 왕실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이다. 조선시대 말기에 많이 그려졌던 관념 산수화풍의 작품으로 숲이 우거져 가는 초여름의 경치를 두 폭에 담아 그렸다. <출처: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회화
조선 왕실에서는 일찍부터 회화의 효용성을 인정하여 적극적으로 국가 통치에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회화를 제작하였다. 궁중 회화에는 어진.궁중 기록화. 장식 병풍. 장식 벽화.궁궐도.회화식 지동 등이 있으며 이외에 왕을 비롯한 왕실 가족들이 여가나 취미 활동으로 그린 그림과 감상을 목적으로 소장했던 국내외 명작들도 있었다. 왕의 초상인 어진은 솜씨가 뛰어난 화원을 선발하여 제작한 후 진전에 예를 모셔 철저하게 관리하였다. 궁중에서 있었던 주요 행사 장면을 그린 궁중 기록화는 행사를 기념하고 후에 참고가 될 수 있도록 제작하였으며, 때로 참석했던 관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집안 대대로 귀감이 되게 하였다. 또 단청하거나 벽화를 그려 궁궐 건물의 안팎을 꾸몄고, 일월오봉도.십장생도.모란도 병풍 등을 만들어 궁권내부를 장식하는 한편 효과적으로 왕실을 상징하였다. 이 밖에도 군사.정치적 목적에 따라 각종 지도를 제삭하였고, 궁궐도.산릉도와 같은 그림도 그려 건축이나 국정 운영의 사전 점검 자료로 활용하였다. 조선 왕조는 국가의 신성한 권위와 왕실의 영원한 위엄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독창적 양식과 기념비적 규모로 궁중 회화를 제작하였고 국정 최고 결정권자의 정책 판단을 돕기 위해 사실성에 기초한 궁중 회화를 그렸다. 이 모든 회화 업무는 국가의 예를 담당했던 예조의 감독에 따라 회화 전담부서였던 도화서 화원들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궁중 회화는 창조적 예술성보다는 사실성.기록성.상징성.장식성을 중시하여 제작되었고 이렇게 그려진 회화는 미래의 제작을 위한 범본으로 축적되어 조선의 독창적인 궁중회화 전통을 수립할 수 있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중화원과 도화서
조선시대의 화원은 도화서에 소속되어 궁중의 갖가지 그림업무를 도맡았던 관원이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을 국가와 왕실을 위해 일하는 직업화가까지 포함하여 화원이라 이르기도 했다. 도화서는 고려시대의 도화원을 계승하여 조선 초에도 예조 소속의 5품직 기관으로 설치하였으나, 성종 임금 때에 도화서로 개칭하고 6품직 기관으로 격하하였다. 도화서는 궐밖에 위치하고 있어서 필요한 때 명령을 내려 작업을 시행하는 체제로 운영하였다. 도화서의 구성원은 정직인 제조 1명, 별제 2명과 잡직인 20명의 화원과 생도 15명, 배첩장 2명 등 40명 정도였다. 화원의 사회적 지위는 그리 높은 편은 아니어서 의관.역관.사자관과 같은 기술직 중인 가운데에서도 낮게 취급되었고, 선발도 과거시험보다 하위인 취제(실기시험)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편 조선후기 정조 임금때 국왕 중심의 개혁정치를 실현하고 운영했던 규장각을 중심으로 자비대령화원 제도가 정착되어 화원들은 궁궐내에서 더욱 긴밀하게 국정에 이바지 할 수 있었다. 이들이 주요 업무는 왕권 강화를 위해 추진하였던 어제(임금이 직접 지은 글)의 편찬을 돕는 일이었다. 더나아가 어지제작과 같은 중요한 회화업무를 전담해 나갔다. 국정과 관련된 그림 업무의 수행으로 탁월한 기량을 키웠던 조선 화원들의 활약은 일반 화단에까지 영향을 미쳐 조선시대 회화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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