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지역박물관

[서울 고궁박물관]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꽃놀이하면서 지은 시

younghwan 2010. 11. 27. 01:13
반응형


 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궁중 미술 관련 유물 중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정조대왕이 당대의 핵심관료이자 학자들이 규장각 관헌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꽃놀이를 하면서 지은 시들이다. 1792년 봄의 '내원상화임자갱재축'과 1793년 봄의 '내원상화계축갱재축'에서 약 40명 정도의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꽃구경을 하면서 시를 읊고, 글을 쓰면서 신하들과의 우의를 다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규장각 관헌과 그들의 자제들인데, 정조대왕이 살갑게 규장각 학자들을 대했음을 알 수 있다. 참석한 사람들의 이력을 보면 정조 사후에 몰락한 사람도 있고, 무난히 살았던 사람도 있고, 다양한 인생경로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글들을 보면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글을 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깨끗한 색종이 위에 당대의 학자들답게 다들 글씨체가 힘이 있어 보인다. 글자들을 모두 읽을 수는 없지만, 박물관에서 정리해 놓은 내용들을 한번 옮겨 보았다.


내원상화임자갱재축
1792년 3월 21일에 정조는 규장각 관원과의 꽃구경 모임을 가졌다. 정조는 규장각 관원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우대를 표명하며 그 자제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어 함께 모임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제학 오재순과 그 아들을 비롯한 27인의 신하와 자제가 참여하였는데, 조선후기 명문장가인 남공철이 정조의 스승인 남유용의 아들이란 사유로 특별히 참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날 모임에서 정조는 신하들과 농산정에서 꽃구경을 하고 수택재(부용정)에서 고기를 낚았으며 춘당대에서 활을 쏘았다. 이후 주찬을 내리고 운자를 나누어 연구시를 지어 그 즐거움을 기록하였다. 이 <내원상화임자갱재축>은 1792년 당시 정조와 신하들이 짓고 쓴 친필 시를 모아 연결한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


정조대왕이 규장각 관원들과 꽃놀이를 즐겼던 창덕궁 후원 농산정.


꽃놀이를 마치고 정조대왕이 낚시를 즐겼다는 창덕궁 후원 부용지와 부용정


남공철, 서유구의 글.

남공철은 정조의 스승인 남용구의 아들로 '규장전운'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정조의 지극한 우대를 받았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하였다.

"순임금의 궁전에서 원수(임금)을 노래하니, 주나라 조정에선 준모(현자)가 화답하네, 신 남공철"

서유구는 1760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교.부제학.이조판서 등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서명웅과 아버지 서호수의 가학을 이어 특히 농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만년에 '임원경제지'를 완성하였다.

"용루(궁궐)에 송축의 노래 소리 드날리고, 조정에선 명군과 현신이 참으로 잘 만났네, 대교 신 서유구"


서용보, 윤행임의 글

서용보는 직계가문에서 3대에 걸쳐 정승이 나온 명문태생으로 1789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평안도관찰사, 규장각제학 및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말 위에서 글 짓는 재주는 한에 부끄럽고, 물고기 관상하는 낙은 호보다 낫구려, 신 서영보"

윤행임는 1782년 별시 문과에 급제해 규장각대교.이조참의.대사간 등을 거쳐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 시파로서 벽파의 정치공세로 인해 유배와 복직을 반복하다가 서학을 신봉하였아는 탄핵을 받아 참형 당하였다.

"뜨락 옆의 명협은 세 잎이 나왔고, 바다 가운데 반도는 열매를 한 번 맺었네, 신 윤행임."


정동준, 서용보의 글

정동준은1775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규장각대교.직각을 거쳐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의 측근 심복으로서 활약하다가 1795년 탄핵을 받아 음독자살하였다.

"은혜의 이슬이 누런 깃발을 적시니, 하늘의 향기는 녹색 도포에 풍기네, 신 동준"

서용보은 1774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1783년 규장각직각을 거쳐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정조와 정순왕후의 신임이 두터워 항상 측근에서 정사를 보좌하였고 민심수습에 공로가 컸다.

"짐승을 그린 과녁은 저물녘 숲과 가지런하고, 날아갈 듯 전각은 맑은 파도를 굽어보네, 원임직각 신 서용보"


박우원, 이병모의 글

박우원은 1774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까지 올랐다.

"신령한 못엔 잠긴 물고기가 노닐고, 향기로운 뜰엔 상서로운 봉황이 깃을 펴네, 원임직제학 신 박우원"

이병모는 177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평안도감찰사 및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경륜과 문장 및 글씨에 두루 뛰어났다.

"직책은 친근하고 자리는 나란한데,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은 은혜, 신 병모"


서호수, 오재순의 글.

서호수는 1778년과 1795년에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청나라의 선진문물 도입이라는 정조의 내밀한 임무부여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대사성.대사헌 등 청관직을 거쳐 당대 문화사업의 핵심 기관이었던 규장각의 직제학이 되었으며 규장각의 여러편찬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친밀하신 은혜를 홀로 흠뻑 입었으나, 재주가 거칠어 터럭만한 보답도 못하네, 검교직제학 신 서호수"

오재순은 1772년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예문관의 대제학 및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는데 왕은 그의 겸손하고 과묵함을 가상히 여겨 '우불급재'란 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두터운 은혜는 천지의 화육과 같고, 재주가 시원찮아 현인 호걸들께 부끄럽네, 신 재순"


정조어제어필.

"내원에서 어조변을 노래하니 앞 연못에 어진 자제들이 있도다"
"각신은 내가 우대하는 신하들이므로 그 자제들에게까지 은혜를 넓혀 한집안 사람으로 여기는 바이다. 이날의 모임은 다만 오늘을 길게 늘일 뿐만 아니라, 무릇 이 자리에 함께한 사람은 모두 각자의 덕을 힘써 닦아서 국가와 복을 같이 누리고, 우리 원자와 어울려 여기에서 즐거이 노닐어 대대로 수많은 자손들까지 서로 변함이 없는 것이 장차 지금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므로 여기에 기록해 둔다. 3월 경인(21일)에 송나라 천장각에서 꽃구경하고 고기를 낚던 고사를 따르고자 각신(규장각 관원) 및 그들의 자제들을 불렀다.  (중략) 드디어 농산정에서 꽃구경을 하고 수택재에서 고기를 낚고, 이윽고 춘당대로 옮겨 과녁에 화살을 쏘고 주찬을 내린 후 운자를 나누어 연구시를 지어서 그 즐거움을 기록하였다. "

내원상화계축갱재축
1793년 3월 20일에 이루어진 정조와 규장각 관원의 모임은 그 해가 계축년인 것을 기념하여 난정수계 고사를 본떠 진행되었다. 난정고사는 353년(계축) 3월에 왕휘지.사안 등 중국 동진의 명사 42명이 난정에서 액운을 떨쳐 버릭 위한 계제사를 지낸후 곡수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시를 짓는 곡수유상을 베풀었던 모임이다. 난정고사에 부합하기 위해 규장각 전.현직 관원 및 그 자제 및 일찍이 승지나 사관을 지낸 사람까지 특별히 불러들여 참석자가 41명에 이르렀다. 이날의 모임은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정조는 신하들과 소요암의 곡수구에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이 모임에서 정조가 손수 짓고 쓴 시 두 수와 신하들이 각자의 장기대로 지은 시 40수가 <내원상화계축갱재축>에 고스란히 실려 전한다.


정조대왕이 신하들에게 곡수유상을 베풀었던 곳으로 보이는 옥류천 어정. 지금도 물위로 술잔이 떠 다니는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홍낙유의 글. 1789년 별시 문과에 급제한 후 사방인 감설을 거쳐 1792년 봉교로 승진하였다. 1794년에는 홍문관의 관리 임명을 위한 인사기록인 홍문록과 도당록에서 최고의 평점을 받았으며, 경기도 고양.파주.장단.풍덕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조참의와 대사간까지 역임하였으나 1803년 탄핵을 받기도 했다.

"봄이 다시와서 남정에 모이니 금원의 곡수가에 임금꼐서 노니시네. 꽃 아래 푸른 도포 붉은 비를 덜쳐내고 솔밭 사이 화려한 고깔들은 별처럼 찬란하다. 금전에 해 비치자 붓을 뽑아 휘두르고 옥술잔 물결 따라 흰 깃을 띄우네. 다행히 이 좋은 날 멋진 잔치 참석하니 태평성대 이 멋진 일 영원히 빛이 나리. 봉교 신 홍낙유가 지어 올리다."


이해청의 글. 1787년에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경서를 외는강경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기에 임금 앞에서 과거합격자의 순서를 가르는 최종시험인 전시에 직접 으시하였다. 정언을 거쳐 <승정원일기>등의 기록을 담당한 주서가 되었다. 순조 대에 왕명의 출납을 담당한 정삼품 당상관 승지에 올랐으나 1827년에 이조원을 탄핵했다는 사유로 유배되었다.

"난정의 멋진 모임 잔치 열리니 그 귀한 반열에 욕되게도 참석했네. 진나라의 풍류를 오늘 다시 보게되니 영화. 연간 봄빛은 몇 번이나 돌아왔나. 꽃이 따뜻한 햇빛을 맞으니 앵무새가 머물고 비 내리자 임금 은혜 술장에서 물결치네. 진첩은 장차 명주의 사랑을 받을 텐데 시신 중에 그 누가 우군의 제목인가. 주서 신 이해청이 지어올리다"


정문시의 글. 1789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1793년에 임시로 승정원의 기록을 담당하는 주서가 되었으며, 1794년에는 금천.수원.광주 지역에서 어사와 함께 지방수령의 잘잘못을 규찰하는 적간사관으로 활약하였다. 1813년에 정삼품인 통정대부에 올랐다.

"임금님 타신 수레가 소각에 행차하니 봄비는 티끌 먼지 씻어 내린다. 기수엔 어른 아이 모여 놀았고 좋은 봄 세월은 돌아 오누나. 술잔은 배처럼 굽이굽이 내려오고 사령은 마음대로 퇴고한다. 넘치는 태평성대 기상속에서 술잔되어 마음껏 놀아 보고파. 가주서 신 정문시가 지어 올리다."



홍인모의 글


홍석주의 글


이존수의 글. 정조 대 이조판서를 지낸 이문원의 아들이다. 1794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과 교서관의 정9품 관직인 정자를 겸임하였다. 순조 대에 승진을 거듭하여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저서로는 편서인 <팔보자경편>이 있다.

"버들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목욕을 마쳤고 꽃들은 봉오리 머금어 예쁘게도 단장했네. 향기가 소매에 가득하나 임금 얼굴 가깝고 궁에서 빚은 술동이를 기울여도 시간이 더디가네 문적은 비로 우주에 콩알만 하지 않아도 옥소리는 오히려 맑게 물결치듯 들려오는데 우리 중에 재주 없는 게 부끄럽고 거문고는 어디서 빌려올까나, 온 나라에 오늘이 비가 고루 적시면 태평성대 풍년이 들었으면 진사 신 이조수자 지어올리다."


서봉보의 글. 규장각 직각을 거쳐 영의정까지 오른 서용보의 아우로 1801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수제한 일 산음의 모임인데 올 해엔 임금께서 노니시네. 안개와 꽃들은 금지에 둘려 있고 관연은 군현을 숙배하여. 오장은 붉은 구름에 쌓여 있고 흐르는 술잔은 벽옥처럼 맑구나. 태평성대 원래가 모습이 있으니 물고기와 새들도 새로 지은 시 속으로 들어온다. 유학 신 서봉보 지어 올리다."


정성우의 글. 정조 즉위 후 홍국영과 함께 발탁되어 극진한 사랑을 받은 정민시의 아들이다.

"곡수에 술잔 띄우고 취했다 깨었다 하는데 상림의 늦봄에 서운이 가득하다. 좋은 날 멋진 일 오늘이 옛날 같은데 임금님 모시고들 태평성대 즐긴다네. 신 정성우"


심응규의 글 1780년 규장각 직제학을 지낸 심영조의 아들로 1790년 진사가 되었다.

"임금의 웃음소리 봄날은 끝이 없고 꽃향기 피어나니 비마저 때를 아네. 곡수 물결 속에 술잔은 떠가고 중당 문채는 곤룡포에 어리네. 진사 심용구가 지어 올리다."


심승규의 글 1780년 규장각 직제학을 지낸 심영조의 아들이다.

"태평성대 어느 날인들 아름답지 않으리오. 더욱이 화창한 삼월열흘인데서야. 이 때의 끝없는 즐거움으로 오래도록 우리 임금 섬기고파라. 봉래산 오색구름 쫓아 들어오더니 춘당의 꽃과 버들 하늘거린다. 난정의 수계가 성대한 행사였지만 그들이 언제 임금을 모시고 있었던가? 유학 심승규"


박종연의 글

"난정의 아름다운 자취는 먹 속에 향기를 남기고 이 날의 은혜는 옥소리를 따라 울려퍼지네. 한낮의 상서로운 구름에 화려한 의장을 옮기고 새 비 내려 불어난 샘물에 옥잔을 띄운다. 무지몽매한 이사람은 어찌해야 은혜를 갚을 수 있으리오. 저 산에 만수무강 축원할 수 밖에. 유학 신 박종연"


서유민의 글

"난정의 멋진 일, 오늘 같은 봄날이었는데, 임금꼐서 영대에 계시니 모든게 새롭구나. 소신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모여 임금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노라. 유학 신 서유민."

<자료출처> 고궁박물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