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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궁박물관] 궁중음악과 조선의 악기

younghwan 2010. 11. 28.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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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궁중음악은 예악禮樂을 실천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예악은 유교사회에서 필수교양으로 예禮는 자연의 이치를 절차로 만들어 스스로 체득하게 하는 것이고, 악樂은 정조를 길러 감정의 융화를 도모하는 것이라 하여 조선사회에서는 도덕에 의한 이상 정치를 달성하는데 예악을 보조수단으로 크게 중시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궁중음악은 조상에 제례를 올리는 종묘제례를 중심으로 한 제례음악과 조회나 연회때 연주하는 예식음악, 왕이 행차할 떄 연주하는 행차음으로 나눈다. 조선에서는 음악과 더불어 춤을 추는 가무 또한 크게 중시되어 각종 의궤나 문서 등에 이와 관련된 많은 기록들을 남겨 놓고 있다. 조선시대 궁중음악을 규정하는 법규에 준하는 문서로는 '악학궤범'을 들 수 있는데 궁중음악에 대해서 법전 수준으로 아주 세밀하게 기능과 목적, 구성 등을 기록해 놓고 있다.

 서울 고궁박물관에는 편종,편경,특종,특경,운라, 쇠대금 등 궁중음악에 사용된 악기들과 '악학궤범' 복제본, 궁중 무용을 정의한 기록 등을 전시해 놓고 있어서 우리나라 전통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조선시대 궁중음악에 사용된 악기는 유교사상에 근거하여 쇠, 돌, 줄, 대, 나무, 가죽, 바가지, 흙 등 만물의 기본 물질을 대표하는 8가지 재료로 만들어서 음양오행에 따라서 각 악기들을 배치한다고 한다. 


편종. 대표적인 국악기인 편종이다.


편종은 종의 두께에 따라 음계를 달리 하도록 만들었으며, 조선 세종때 박연이 중국 종을 개량한 것이라 한다.

편종은 고려 1116년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어 궁중제례악에 사용되었다. 송나라에서는 종의 크기에 따라 음계가 결정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박연이 크기는 같고 종의 두께 차이로 음계를 달리하도록 제작하였다. 두 개의 사각대 위에 사자 한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이 틀에 16개의 종을 2단으로 나누어 매달고 뿔망치로 종 아랫면에 있는 둥근 부위를 쳐서 소리를 내었다. 12율(한 옥타브 안의 열두가지 음계)과 한 옥타브 높은 4청성의 음역을 갖는다. <출처:고궁박물관>


편경. 편경은 돌로 만든 악기로 온도,습도 등 환경변화에도 음정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국악기를 조율할 때 표준이 되는 악기라고 한다.


편경에 사용되는 돌은 원래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주선중기부터 경기도 남양에서 그 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편경은 고려 1116년에 편종과 함께 들어와 궁중제례악에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재료를 중국에서 수입해서 만들었으나 조선 1425년부터 경기도 남양에서 양질의 재료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두 개의 사각대 위에 흰 기러기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봉황머리를 조각하였다. 편경은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를 조율할 때 표준이 된다. <출처:고궁박물관>


특종. 특종은 편종가 같은 형태인데 종이 하나만 달려서 그 역할을 한다.
 
큰 종 한 개로 구성되며 편종과 연원을 같이 한다. 장식은 편종과 같고 나무틀 위에 세마리 공작을 세웠다. 제례악을 시작하면서 박을 치고 난 다음에 특종을 한 번 치고, 그 다음 축을 세번, 북을 한 번 치는 것을 세 차례 반복하고 다시 특종을 한번 치고 나면 음악이 시작된다. 현재는 문묘와 종묘제례악에서 댓돌 위에 배치하여 노랫말 없는 등가 음악을 연주할 때 사용된다. <출처:고궁박물관>


특경. 특경도 특종과 같이 큰 경 하나만 매달려 있다.
 
특종과 같이 한 개의 큰 경을 틀에 매단 것이다. 세종 때에는 댓돌 위에서 노랫말 없는 등가 음악을 연주하는 데 한 틀, 댓돌 아래에서 노랫말 있는 현가 음악을 연주하는 데는 아홉틀이 쓰였으나 성종 때에는 노랫말 없는 등가를 연주할 떄 황종의 특경 한 틀만이 사용되었다. 지금은 문묘와 종묘제례에서 댓돌 위에 배치하여 노랫말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데 쓰인다. <출처:고궁박물관>


운라. 운라는 군악대인 취타에 많이 사용되던 악기이다. 조선후기에 주로 취타와 당악에 사용되었다. 행진할 때는 대를 왼손으로 잡고 치며 진연에서는 손잡이를 대 받침에 꽂아 놓고 친다.


금은입사 쇠대금. 쇠대금. 쇠대금. 대금은 가로로 부는 악기로, 바람을 불어 넣는 취구, 떨림 소리를 내는 청공, 소리높낮이를 주는 6개의 지공 그리고 높은 음을 조절하는 칠성공이 있다.


나각. 소라껍데기로 만든 악기로서 고려 의종 때 썼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태평소.징 등과 함께 대취타에 편성되고 있다.


태평소. 새납,호적,날라리라고도 불린다. 음이 강하고 높아서 행진음악에 주로 쓰였으며 지금은 다양한 음악에 쓰이고 있다.


방향. 편종과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쇠로 만든 철편을 쳐서 소리를 낸다.

철향이라고도 하며 16개의 철편을 틀의 상단과 하단에 각각 8개씩 매어 놓고 뿔망치로 쳐서 소리를 낸다. 철편의 크기는 같고 두꼐가 다른데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낮다. 중국 양나라때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당.송.원에서는 주로 연향악에 쓰이다가 명.청시대에는 아악에 쓰였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1세기 고려 문종 때 이 악기로 당악을 연주한 이래 줄곧 당악과 고취에 편성되어 쓰였다. 음역이 노무 높고 음색이 고르지 못하고 탁하여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고 종묘제례악에 사용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어와 축.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악기이다. 축은 그 근원이 가장 오래된 악기라고 하며, 이 두 악기는 가장 유교적인 성격을 갖는 악기로 볼 수 있다.

어는 엎드린 호량이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그 등에 27개의 톱니를 세운 것이다. 연주할 때는 9조각으로 갈라진 대나무 채로 먼저 호랑이 머리를 세번 치고 이어 톱니를 3번 끍어 내린다. 한국에서는 고려 1116년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온 후 문묘 및 종묘제례악에서 끝남을 알리는 신호악기로 사용하였다. 흰색을 칠해서 서쪽에 배치하여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축을 푸른색으로 칠해서 동쪽에 놓는 것과 짝을 이루었다.<출처:고궁박물관>

축은 중국 고대황제시대에 만들었다고 전하며우리나라에는 고려 1116년 송나라로부터 들여왔다. 아악과 전정헌가에 쓰였으며 등가에 쓰일 때는 따로 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축은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악기로 푸른색을 칠하여 동쪽에 놓고 음악의 끝남을 알리는 어는 흰색을 칠하여 서쪽에 놓는다. 'ㅗ'모양의 막대기로 밑바닥과 좌우순서로 세번 쳤으나 오늘날에는 밑바닥만 세번 친다. 축은 어와 함께 종묘와 문묘제례악에 사용된다.<출처:고궁박물관>


절고.금고.진고. 국악에 사용되는 북들이다.
 
절고는 음악의 마디마다 북을 쳐서 음악의 구절을 짓게 하는 북이다.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수나라에서 쓰던 것이 조선 세종 때 들어온 것이라는 설과 조선 중기에 한국에서 제작하였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현재 문묘와 종묘제례에 쓰이며 음악 연주를 시작할 때와 끝날 때 3번씩 친다. 또 연주의 중간에서는 문묘제례악은 1소절의 끝 박에 2번씩 치고 종묘제례악에서는 대개 이 악절의 첫 박에 1번씩 친다.<출처:고궁박물관>

금고. 북의 가죽면에 '금고'라고 쓰여있다. 금고는 불교의식 법구의 이름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원래는 군악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군사활동에서 명령이나 신호를 하기 위한 장비로 주로 징과 북을 사용하였는데 징을 '금', 북을 '고'라 하였다. '금은 금할 '금'의 뜻으로 전진이나 후퇴를금지하여 징을 치면 멈추고 '고'는 움직이는 신호로 북을 친면 움직였다고 한다. 이 북은 군대나 왕의 행차시 등에 사용했던 신호악기로 북통에 용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출처:고궁박물관>

진고. '악학궤범'에 따르면 진고는 가죽의 지름이 3척5촌3푼, 북통의 길이가 5척이나 되는 매우 큰 북으로 절고와 짝을 이룬다. 절고는 등가에 사용되는 데 반하여 진고는 현가에만 쓰인다. 현가악의 시작과 끝네 쓰며 절과 같이 음악의 매 구절마다 친다. 4개의 기둥에 가름대를 설치한 나무틀 위에 올려 놓는다.<출처:고궁박물관>

악기의 상징성.
우리나라 악기는 천지.음양.오행의 자연 질서를 따라 조화된 자연의 음을 나타내는 것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겼다. 따라서 악기의 재료 역시 팔음이라 하여 쇠金, 돌石, 줄絲, 대竹, 나무木, 가죽革, 바가지匏, 흙土 등 만물의 기본 물질을 대표하는 여덟가지 재료로 만들었으며, 이들 팔음 재료로 만든 악기를 모두 갖추어야 완전한 음악이라 여겼다. 팔음은 여덟 가지 바람과 관련되어 악기를 불어서 천지를 아루르고 이 음악을 듣는 인간의 심성을 온화하게 하여 개인적으로는 심신을 수양하고 국가적으로는 나라의 평안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악기의 배치 역시 바가지.대나무.나무로 만든 악기는 만물이 생장하는 동쪽 방향에 놓고 쇠.돌.흙으로 만든 악기는 만물이 융축하는 서쪽 방향에 놓는다. 또 명주실은 여름에 완성되기 때문에 현악기는 여름을 상징하는 남쪽 방향에, 가죽은 겨울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죽으로 만든 북쪽 방향에 배치한다. 그리고 색깔을 입혀 만든 아기로서 흰 빛깔의 어는 서쪽에, 푸른 빛깔의 축은 동쪽에 놓는다. <출처:고궁박물관>


악학궤범(복제). 1493년 왕명에 따라 성현 등이 펴낸 음악서로 궁중음악의 이론 및 제도, 법식 등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궁중무용의 절차와 배치. 정재는 궁중의 경사스런 잔치에 추던 춤이다. 내용 중에는 39종목 정재의 방법, 배용도와 무동의 이름까지 자세히 적혀 있다. 효명세자가 창작한 정재가 대거 수록되어 있다.

악학궤범의 편찬
유교의 예약사상에 기초하여 교화정치를 표방한 조선 왕조는 '국조오례의'라는 예전, '경국대전'이라는 법전과 함께 '악학궤범'이라는 악전을 완성함으로써 유교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악학궤범'의 편찬은 세종대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수행된 국가의 통치 틀을 구축하는 최종적 완결을 의미하는 셈이다. '악학궤범'은 음악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경우를 담은 '표준화된 교범'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시행하였던 악제까지도 수록, 보존하는 기록적 성격까지 지닌다.' 후대에 악재와 악기가 없어진 경우에도 이 책만 있으면 원래대로 재현할 수 있도록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는데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악기가 모두 불타버리고 악재가 훼손된 후 악학궤범에 의하여 열무와 종묘재례악을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악학궤범'은 성종 때 완성된 후 1610년, 1655년, 1743년에 다시 발간되었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 판본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1610년 태백산본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궁중음악
조선의 궁중음악은 유교의 예악사상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정비되고 변화되었다. 유교에서 예는 자연의 이치를 절차로 만들어 스스로 체득하게 하는 것이고, 악은 마음의 성정을 자연과 화합시키는 것으로 예와 악의 조화로 자연의 이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악은 음악과 노래와 무용을 모두 포함하는 악가무의 공연예술을 의미하며 사람을 감동시키고 풍속을 변화시키고 바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윤리와 도덕의식을 북돋우는 데 활용되었다. 궁중에서는 각종 의례를 행할 때마다 의례의 규모와 성격, 중요도 등에 따라 그에 맞는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같은 의례라도 시기에 따라 연주음악이 달랐다. 행사 종류에 따라 종묘.사직.문묘 등의 제례에서 연주하는 제사음악, 조회나 연회 때 연주하는 잔치.예식음악, 왕이 행차할 때 연주하는 행차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악풍의 유래에 따라 아악.당악.향악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아악과 당악은 고려 때 중국 송나라의 궁중 제사음악과 연향음악을 들여오면서 시작되었으며 이와 대비하여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향악이라 하였다. 아악.당악.향악은 오랜기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행사의 성격과 내력에 따라 고루 사용되었다. 궁중음악은 다른 나라의 음악을 수용하여 우리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쳐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 음악과 더불어 제례에서는 일무를, 각종 잔치에서는 정재를 추었다. 일무는 줄을 지어 추는 춤으로 군인과 궁중에 속한 남자들 중 일정한 훈련을 받은 이들이 맡았다. 조선초기에는 6줄6열의 6일무였으며 대한제국시대에는 황제국으로서 8줄 8열의 8일무를 추었다. 정재는 각종 궁중행사에서 추던 춤으로 대개 무희와 무동이 추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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