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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 박물관에는 개화기 선구적 지식인으로 충정공 민영환 선생과 서유견문록의 저자 유길준을 선정하여 이 분들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다. 충정공 민영환선생의 유품으로는 대표적을 잘 알려진 선생이 자결한 자리에서 솟아난 혈죽과 '대한 이천만동포에게 남기는 글'이라는 유서가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역사책으로만 보았던 충정공의 여러 유품들을 보면서 구한말을 어려웠던 국가의 형편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유품들은 부인 박수영씨가 수습하여 간직해 오다가 후손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 반대하면서 자결로서 순국한 분이다. 민영환 선생은 명성황후의 조카로서 구한말 권문세가로 등장한 민씨 집안에서 개방적이고 강직한 면을 보여준 대표적인 관료라고 할 수 있다.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정부 주요부처의 요직을 두루 역임했었다. 선생은 구한말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면서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접하게게 되었으며, 1987년에도 유럽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발령받고 여러국가를 방문하는 등 개화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원로대신들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와 같이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실패하고, '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자결했다고 한다.


충정공 혈죽. 충정공 혈죽은 선생이 자결하고 8개월 지난후, 피묻은 옷을 간직한 방에서 솟아 올랐다고 하며, 당시의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혈죽은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씨가 수습하여 간직해 오다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혈죽이 피어난 사진.


충정공 민영환선생이 자결하면서 남긴 편지글 형식의 유서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아,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에서 잔멸하리라.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살 수 있는 법인데, 여러분은 왜 이것을 모르는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과하노라. 영환은 죽어도 죽지않고, 저승에서 여러분을 돕고자 하니 우리 2천만 동포 형제들은 천만배로 보답하여 마음을 굳게먹고, 학문에 힘쓰며, 일심협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몸도 저승에서 기뻐 웃으리라. 아, 실망하지 말라. 우리 대한 제국 2천만 동포형제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출처:위키백과>


충정공이 자결할 당시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관복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인장과 호패


편지글


특명전권공사 임명장
 
민영환(閔泳煥, 1861년 음력 7월 2일~1905년 양력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본관은 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다. 1861년 음력 7월 2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민겸호였으나, 뒤에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878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등 민씨정권에 요직에 올랐으나, 임오군란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 민영환은 벼슬을 내놓고 3년간 장사를 지냈다.그뒤 도승지,이조참판,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윤,독판내무부사등 관직을 지냈다. 1895년 8월, 주미전권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이해 10월에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해 두문불출했다.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미국,영국등지를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귀국후에 그는 의정부찬정(贊政),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대영제국,독일제국,프랑스,러시아제국,이탈리아왕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된 민영환은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열강세력들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그의 상소는 군사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등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공적들 덕분에, 추후에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였고, 보다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할려다가 수구세력인 민씨일파에게 반감과 미움을 사게되어 요직에서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참정대신(參政大臣)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와 같이 을사조약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의 강제진압에 의해 실패하게되고,〈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국민들에게 남기고 자결하였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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