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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서 임금을 뜻하는 말은 시조인 박혁거세때는 거서간, 2대 남해왕때에는 차차웅, 3대 유리왕에서 김씨가 왕위를 세습한 내물왕 이전까지는 '임금'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사금이라고 불렀다. 내물왕때부터는 마립간이라 불렀는데 으뜸이라는 뜻의 '마립'과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왕을 부를때 사용하는 '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 내물왕때 시작된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22대 지증왕 이전까지 사용하는데 이 마립간 시기에 신라는 화려한 황금문화를 남겨 놓고 있다.

 경주 도심 역사지구의 대릉원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는 수많은 고분들에서 오늘날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데 1921년 처음 발견된 금관총 금관을 비롯하여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교동 등지에서 6개의 금관이 발견되었는데 이른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경우라고도 한다. 이들 고분에선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관식, 금제 장신구, 금 그릇 등 수많은 금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이는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하며, 세계적인 관점으로 볼 때도 금제 유물은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는 문화는 중앙아시아 북부지역에 존재했던 고대사회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시기의 황금문화를 신라와 이들지역간의 교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한다. 무덤에 금제 유물들을 껴묻거리로 묻는 것은 왕릉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 또는 지방의 대형무덤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찰의 건립에 좀더 치중하게 될때까지 계속되었다. 현재까지 금제관식 및 금관이 일괄적으로 출토된 곳은 금관총, 황남대총, 천마총이 있는데 그 중 황남대총 출토 유물은 중앙박물관에서, 금관총과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은 경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황금의 나라, 신라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황금의 나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1921년 금관총에서 처음 금관이 발견되 이래,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교동 등지에서 6개의 금관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금제 관모, 금귀걸이, 금목걸이, 금반지, 금그릇 등 수없이 많은 금제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이러한 금제품은 5세기부터 6세기 전반의 왕릉 또는 왕릉급 무덤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됩니다. 고구려, 백제 등 주변국과 비교하면 그 황금 유물의 양이 엄청납니다. 지방의 우두머리에게도 이러한 귀중품을 나누어 주었고 지방의 대형 무덤에서도 적잖은 황금유물이 발굴됩니다. 이렇게 많은 황금유물을 부장하는 문화도 불교라는 새로운 이념이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집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서봉총금관은 경주 도심에 위치한 노서동 고분군에 있는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을 황태자 시절에 초빙하여 같이 발굴한 유물 중하나로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사슴뿔모양의 가지를 세워 올린 형태로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천마총, 금관총,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에 비해서는 금세공기술이 약간 떨어지는 편이다.


금관은 중앙과 그 좌우이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그 끝에는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으며 그 양쪽으로 끝이 꽃봉오리모양으로 마무리한 사슴뿔 장식을 세웠는데 이는 신라 특유의 양식으로 그 기원으로 시베리아 계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금관의 좌우에는 길게 늘어뜨린 태환식 귀고리가 달린 드리개를 늘여뜨려서 장식을 하고 있다.


서봉총 금관


서봉총 금관 발굴당시 사진

서봉총금관 (보물 339호)
경주 노서동 신라 무덤인 서봉총에서 출토된 높이 30.7㎝, 지름 18.4㎝, 드리개(수식) 길이 24.7㎝인 금관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가지를 세웠고, 상하에 점선으로 물결무늬를 찍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으로 장식했다. 관 테에 못으로 고정시켜서 세운 5개의 가지 중 중앙과 그 좌우의 3가지는 山자형 장식을 3단으로 연결하고, 가지 끝은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했다. 이 가지 주위에는 2줄씩 점선을 찍어 금판이 휘지 않도록 했고, 나뭇잎 모양의 원판과 굽은 옥을 달았다. 山자형 장식의 좌우에는 끝이 꽃봉오리 모양으로 마무리 된 사슴뿔 장식을 세웠고, 이 곳에도 원판과 옥으로 장식했다. 내부의 골격은 2개의 금판대를 전후·좌우에서 관 테에 연결하여 반원을 그리면서 교차시켰고, 그 위에 3가닥이 난 나뭇가지를 붙이고 가지 끝에 새 모양을 하나씩 붙였다. 관 테 좌·우에 길게 굵은고리(태환식) 귀고리 드리개를 달아 늘어뜨렸다. <출처:문화재청>


금관, 5세기, 경주 교동


금동관, 6세기, 경주


더듬이모양 관장식, 5세기, 천마총


금드리개, 5~6세기, 경주



금드리개, 5~6세기, 경주 황오동.황남대총



금드리개 (보물 633호), 6세기, 미추왕릉지구


경주 황남동 금제드리개 (보물 633호)
경주 황남동에 있는 신라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길이 15.5㎝의 한 줄은 길고 세 줄은 짧은 금제 드리개(수식)이다.

긴 줄은 속이 빈 금 구슬에 꽃잎장식을 금실로 꼬아 연결하였고, 끝에 비취색 옥을 달았다. 작은 줄 역시 긴 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현재의 상태가 원형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드리개 가운데 가장 호화스러운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금드리개, 5~6세기, 경주 월성로.교동


드리개
드리개는 상하로 길쭉한 나선모양의 장식이 여러 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로서, 귀걸이와 유사하다. 드리개는 금관이나 금동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관테의 둘레에 장식한 것이다.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드리개는 노란 금빛과 곱은옥의 푸른 색깔이 매우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금구슬에 장식된 달개는 화려함을 더해준다. <출처:경주박물관>



금관모 (국보 189호), 6세기, 천마총. 천마총에서는 국보로 지정된 금관과 함께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국보 189호로 지정된 금관모이다. 이는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관모를 무덤 껴묻거리용으로 금으로 세밀하게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금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그 원형이 아주 깨끗하게 남아 있어 새로 만들어 놓은 것 처럼 보인다.

천마총관모 (국보 189호)
천마총에서 발견된 신라 때 모자이다. 천마총은 경주 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불리던 것을 1973년 발굴을 통해 금관, 팔찌 등 많은 유물과 함께 천마도가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금모(金帽)란 금으로 만든 관(冠) 안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높이 16㎝, 너비 19㎝인 이 금모는 널<관(棺)> 바깥 머리쪽에 있던 껴묻거리(부장품) 구덩이와 널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각각 모양이 다른 금판 4매를 연결하여 만들었는데, 위에는 반원형이며 밑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진다. 아랫단은 활처럼 휘어진 모양으로 양끝이 쳐진 상태이다. 윗단에 눈썹 모양의 곡선을 촘촘히 뚫어 장식하고 사이사이 작고 둥근 구멍을 뚫었으며, 남은 부분에 점을 찍어 금관 2장을 맞붙인 다음 굵은 테를 돌렸다. 그 밑에는 구름 무늬를 뚫어 장식하였고 또 다른 판에는 T자형과 작은 구멍이 나 있는 모양의 금판이 있다. 머리에 쓴 천에 꿰매어 고정시킨 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문화재청>


은관모, 5세기, 황남대총. 황남대총에서도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 관식이 일괄적으로 출토되었는데 그 수준이 상당히 뛰어나며 현재 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금맞새김장식, 5세기, 황남대총


나비모양금관식 (보물 617호), 6세기, 천마총

천마총 금제관식(보물 617호)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1973년 발굴하여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에서 나온 관식은 널<관(棺)> 밖 머리쪽에 껴묻거리(부장품)가 들어있는 상자 뚜껑 위에서 발견되었다. 높이 23㎝, 너비 23㎝인 이 관식은 중앙에 새머리같이 생긴 둥근부분이 있고, 그 밑 좌우 어깨 위치에는 위로 솟는 날개 모양의 한 쌍이 있다. 몸체는 수직으로 내려오다 조금씩 좁아지면서 끝을 둥글게 처리하였다. 머리부분에는 나뭇잎 모양으로 2개의 구멍을 뚫었고, 좌우 날개에서 몸통부분까지 5개의 구멍을 나뭇잎 모양으로 뚫었다. 아래의 방패형으로 된 부분에는 장식이 없지만, 그 윗부분에는 약 150개의 원형 장식을 한 줄에 연결해서 달았다. 전체를 세로로 반으로 접었던 흔적이 있으며, 밑에는 못 구멍이 하나 나있어 어떠한 형태로 쓰였던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출처:문화재청>


용무늬허리띠, 6세기, 천마총

금동신발
금동신발은 크기와 형태로 미루어 보아 주검에 신기우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보통 3매의 금동판을 못으로 박아 형태를 만든 뒤, 안에는 천이나 가죽을 덧대었다. 그리고 겉면은 각종 무늬를 맞새기거나 타출점열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신라의 금동신발은 '凸'자형의 맞새김장식을 잇달아 베풀었고, 신발코는 버서코처럼 살짝 치켜 올랐으며, 바닥에는 못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제작방법은 1매의 금동판은 발등을 감싸고 다른 금동판은 발뒷축을 감싸도록 만들어 발의 좌우에서 고정시켰다. <출처:경주박물관>


금동신발, 5세기, 황남대총

임금을 뜻하는 말
신라에서는 임금을 뜻하는 말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의 순서로 바뀌었습니다. 거서간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 초대 임금에 사용하였으며 귀인을 뜻합니다. 차차웅은 무당을 의미하는 말로 2대 남해 임금(재위 4~24)만 사용하였습니다. 남해 차차웅이 죽고 아들 유리(재위 24~57)가 3대 임금자리에 오르며 임금을 이사금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당시 나이가 많은 자는 이가 많다고 여겼는데 이사금은 잇금을 의미하는 방언으로 연장자를 뜻합니다. 이사금은 유리임금부터 흘해임금 (재위 310~356)까지 사용됩니다. 17대 내물 임금 (재위 356~402)부터 쓰인 마립간은 으뜸을 뜻하는 마립과 왕을 뜻하는 간.칸이 합쳐진 것으로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막리지와도 같은 말이라 생각됩티다. 이 마립간 시기에 돌무지덧널무덤과 화려한 황금문화 등 전형적인 신라문화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왕이란 칭호는 22대 지증왕(재위 500~514)부터 사용하게 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왕을 상징하는 것
왕의 몸은 어떻게 치장하였을까요? 황남대총 등 왕릉의 발굴 결과,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금제 허리띠를 찼습니다. 반지와 팔찌는 물론 금귀걸이를 달았고 여러가지 목걸이와 금동으로 만든 신발을 신었습니다. 허리춤에는 용과 봉황으로 장시한 큰 칼을 찼고 화려한 비단옷을 입었습니다. 이러한 치장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성격을 보여주며, 강력한 권위를 상징합니다. 금제 허리띠에 매달린 여러가지 물건들은 말을 즐겨타는 유목민족의 성격도 보여줍니다. 하지만 살아 있을 때도 이렇게 치장하고 있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컨대 금관과 금제 허리띠는 무겁고 거추장스럽기 때문입니다.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썼거나 죽어 묻힐 때 함께 무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출처: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