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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는 진흥왕순수비, 남산신성비 등 국가정책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글자를 새겨 놓은 비석을 많이 활용하였는데, 이는 경주를 비롯한 특징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라의 영역에서 고루 분포되고 있어 비석이 통치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비석에서는 당시의 관직, 인물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면서 사회 체제가 안정됨에 따라 국가 통치를 위한 비석의 필요성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보이며, 이때부터는 왕이나 특정 인물의 업적을 찬양하는 목적으로 세운 비석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며, 비석의 이런 특징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치면서 부처의 사리를 모신 석탑의 건립은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며, 국가지배이념이었던 불교를 이끌어 왔던 승려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들이 그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의 건립과 함께 탑비의 형태로 많이 세워졌으며 이런 경향은 고려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나 고려초기 승려의 업적을 기록한 탑비가 승탑과 함께 많이 남아 있어 문헌으로 남아 있는 사실과 비교 분석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금석문이란?
금석문은 말 그대로 쇠붙이와 돌붙이에 새긴 글을 말합니다. 특히 금석에 새긴 글을 명문이락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쇠붙이나 돌붙이에 글을 새겼을까요? 쇠나 돌은 종이나 죽간, 목간 같은 것에 비해 훨씬 견고하다는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이 지은 글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겼을 것입니다. 금문은 주로 일부 청동그릇 등이 있기는 하지만 범종, 사리갖춤 등 불교관련 용품에 새긴 경우가 많고, 석문은 능비, 묘지, 탑비 등 비석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금석문을 연구하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직접 남긴 1차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문헌기록은 사건이 일어나고 시간이 흐른 뒤 후대 사람에 의해 기록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시 상황이 애매하게 묘사되는 수도 있고 찬자에 따라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종이자료가 흔치 않은 고대의 서예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서당화상비, 경주 고선사 터 출토된 원효대사를 기르는 비석이다. 9세기초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신라 출신의 위대한 승려이자 사상가였던 원효대사를 기리며 세운 비석으로 서당화상은 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원효대사는 지금의 경산 지방인 압량군 남쪽 불지촌에서 태어나 15세 무렵에 출가하였습니다. 그는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 유학을 가던 도중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큰 깨달음을 얻어 발걸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이후 수행과 저술에 힘쓰는 한편,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았고, 하층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비석은 원효대사의 손자인 설중업이 애장왕 때 세운 것입니다. 그 뒤에 어느 때인가 파손되었으나, 1914년 고선사 터에서 아랫부분이, 1960년대에 경주시내 민가에서 윗부분의 일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석을 받쳤던 귀부는 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의 고선사 터 삼층석탑 옆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비분은 33줄이며 한 줄에 61개의 글자가 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의 내용은 '십문화쟁론'을 비롯한 대표적인 저술서의 성격, 수학과정과 행적, 입적한 장소와 시기, 비석의 건립과 추모사업등을 담고 있어서 원효대사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비석, 경주 남산리 절터 출토, 8~9세기


석경, 경주 남산 칠불암 출토, 8~9세기

석경은 불교 경전을 돌에 새긴 것을 말합니다. 불교 신도들은 경전의 내용을 단단한 돌에 새김으로써 말법시대에도 불교의 가르침이 변하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염원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석경으로는 통일신라 때 제작된 전남 구례 화엄사의 화엄경 석경과 경주 남산 창림사터에서 발견된 법화경 석경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경주 남산 칠불암 주변에서 출토된 이 석경편들 중의 일부는 금강경의 구절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금강경은 석가모니 부처가 제자 수보리에게 온작 집착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진리를 통찰할 것을 가르치는 내용으로, 불교의 空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전입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석경, 경주 남산 창림사지 출토, 8~9세기


법화경 석경, 경주 남산 창림사지

경주 남산 서북쪽의 창림사지 주변에서 1966년에 처음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20여 개의 편이 수습되었습니다. 원래는 법화경 28품 전체를 새겨 넣은 여러 개의 판석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판석 하나의 크기는 세로 150cm, 가로 100cm였고, 글씨를 새긴 표면을 3단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세로 한 줄에 글자를 30개 안팎으로 써서 42줄을 이루고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묘사한 법화경은 대승경전의 왕으로 불릴 만큼 동아시에서 전 시대에 걸쳐 중요시되었습니다. 신라에도 낭지 스님을 비롯하여 법화경 신앙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창림사지에서 발견된 법화경 석경의 존재는 이 경전에 대한 신라인의 신앙이 얼마나 각별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사천왕사 비, 경주 사천왕서 터 출토, 7세기 후반


황복사 비, 경주 황복사지 출토, 8~9세기


화천동 절터 비석, 영양 화천동 절터 출토, 9세기


이차돈 순교비,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 출토, 817년.

370년대에 불교를 공인한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이 되서야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공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차돈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사인이라는 벼슬을 하던 22살 난 박염촉(506~527)의 순교가 묘사되고 있는데, 박염촉이 바로 이차돈입니다. 그의 목을 베자 젖이 한길이나 솟고, 그 머리는 금강산에 떨어졌으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헌덕왕 9년(817)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비석이 바로 백률사에 있던 이차돈 순교비입니다.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신라 사람들은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곳에 절을 세우고 자추사라 했다고 합니다. 가시가 있는 호두는 곧 밤이니, 자추사가 백률사를 가르킨다 하겠습니다. 즉 이차돈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에 그의 행적을 새긴 비석을 세운 것이지요. 비석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였고, 나머지 다섯면에는 정간을 치고 3cm 크기의 글자를 새겼습니다. 글자는 마멸이 심하여 아쉽게도 판독이 쉽지 않지만, 이 내용을 목판에 새긴 '흥인군신각김생서', '원화첩'이 남아 있어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이차돈 순교비에 새겨진 순교장면을 묘사한 그림.


글씨는 3cm 간격으로 정간을 치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겨넣고 있는데 지금은 알아볼 수 없지만, 이 내용을 새긴 목판이 남아 있어 그 내용은 알려져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