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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통일신라시대 주장성

younghwan 2011. 12. 1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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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소재한 경기도박물관에는 2011년 가을에 '남한산성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에 소재한 남한산성은 한강 이남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로 삼국시대 백제때부터 수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이 실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삼국통일 이후 문무왕대에 당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주장성으로 둘레 8km 정도의 산성으로 현재 남한산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문헌과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출토된 대형기와, 성벽에서 발견된 옛 성곽 유구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해서 남한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천혜의 요새로 나라를 지키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도와 국가의 보장처로 이어져오고 있다. 남한산성의 토대는 통일신라시대 때 주장성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문무왕 12년 8월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00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360보를 오늘날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8km인데, 이는 남한산성 성벽의 둘레인 9km와 비슷한 길이다. 신라가 당시 주장성을 쌓은 이유는 당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의 묘지명에 몽고군에 맞서 광주주민들이 들어간 광주성은 남한산성을 가리키는 거으로 추정된다. 조선 인조 2년(1624)부터 시작된 남한산성 축성은 4년(1626)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1636년,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현장이 되어 이곳에서 청군에 맞선 47일간의 처절한 항쟁이 벌어졌으며, 이후 숙종, 영조, 정조대를 걸쳐 지속적인 보강과 관리가 이루어졌다. <출처:경기도박물관>



토기, 백제. 남한산성이 문헌기록상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대에 쌓은 주장성으로 처음 나타나지만, 남한산성 아래 한강유역은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이 있는 한성백제의 수도였고, 그 배후에 남한산성이 존재했기때문에 군사적으로 이 지역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남한산성 내 행궁터에는 다양한 백제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남한산성행궁지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의 행궁 터 뒤쪽에서 백제 주거지 2개소와 저장용 구덩이 8개소가 확인되었으며, 호와 시루, 발, 직구단경호, 완 등 다양한 백제 토기가 출토되었다. 이 토기는 이 때 발굴된 백제 토기 중 하나이다. <출처: 경기도박물관>

통일신라시대 주장성
2005년 중원문화재연구원에서 남한산성의 일부 성벽을 조사하던 중 하단부에서 신라시대 성벽이 발견되었으며, 토지주택박물관이 남한산성 행궁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와 대형기와가 발견되었다. 무더기로 발굴된 대형기와는 군사관련 건물의 기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발굴결과는 남한산성의 전신이 통일신라시대 주장성이라는 문헌기록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신라가 672년에 많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대규모의 산성을 쌓은 이유는 '삼국사기'기록으로 볼 때 당과의 전투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후 두 나라의 옛 땅을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이에 신라는 문무왕 10년(670)부터 백제의 고지를 신라의 영토에 편입시키는 군사작전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이 때 한강유역에 주장성이라는 요새를 축성하여 당의 공격을 저지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대형 수키와와 암키와, 통일신라. 남한산성에서 출토된 통일신라 기와편 중 가장 인상적인 유물이다. 대형기와는 이곳에 대형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으로 말해주는 중요한 유물로 대형건물은 무기류를 보관했던 창고로 추정하고 있다.

남한산성내 행궁복원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기와이다. 길이 64cm 내와, 두께 4~5cm, 무게 19kg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 초대형기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초대형 기와를 얹은 통일신라시대 대형건물의 정확한 용도는 미상이나 무기류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행궁지에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 명문기와
토지주택박물관 주관으로 1999~2007년까지 남한산성행궁에 대한 발굴조사가 총 8차에 걸쳐 실시되었다. 2007년 하궐 마당지 하부에서 통일신라 건물지가 발견되었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 때 명문기와 및 대형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갑진성년말촌주민량', '마산정자와초' 등이 새겨진 통일신라시대 명문기와는 신라사횡와 남한산성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신라 문무왕대 쌓았다는 주장성이 남한산성의 전신이라는 문헌기록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천주;명 암키와, 통일신라시대, 남한산성 행궁지. '천주 天主'로 판독되나 '주主'는 '토土'일 가능성도 있으며, 의미는 정확하지 않다. 명문 외각에는 격자문이 시문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성'명 암키와 편, 통일신라, 남한산성행궁지. '성城'은 고대 지방 행정단위이다. 주로 기와가 사용된 곳의 지명을 찍은 것으로 해석된다.


'관'명 암키와, 통일신라, 남한산성행궁지. '관官'에 이어 다음 글자는 '초草'로 판독할 수 있으나 확실치 않다. '관에서 사용하는 기와'라는 의미이다. 명문 아래로는 어골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상단부는 파손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갑진성년말촌주민량'명 수키와와 암키와, 통일신라시대. 회청색 경질의 수키와이다. '갑진'은 간지이고, '성년'은 지명, '말촌주'는 직명, '민량'은 이름으로 판단된다. 촌주는 신라시대 지방 말단행정 담당자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마산정자와초'명 암키와와 수키와, 통일신라.

암갈색의 연질암키와 부분적으로 결실되었지만 전체적으로 비교적 완형에 가깝다. 외면에는 세로방향으로 글자가 찍혀 있다. 명문에서 마산정은 지명, 와초는 기와의 의미로 해정되나 '자子'의 의미는 정확하지 않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고려시대 광주성
고려시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의 묘지명에는 "이 해 11월에 몽고의 대군이 와서 광주성을 포위하고 몇달 동안 모든 계교로 공격하였는데 이세화가 군민과 더불어 주야로 수비를 튼튼히 하고 ... 몽고군이 성을 함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광주는 남쪽길의 요충지에 해당하므로 이 성이 함락되었다면 기타의 성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민들이 들어가 싸운 광주성은 남한산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산성 곳곳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기와와 서원지역, 행궁 담장 서쪽과 남쪽에서 발굴된 고려시대 건물지와 유물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와편과 인화문 토기편,

행궁지 주변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기와로 선조문과 어골문이 각각 새겨져 있다. 작은 기와 조각에 불과한 이들 유물이 발굴되면서 조선시대 유구층 아래에 고려시대 건물터가 존재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인화문 토기편(통일신라)은 회청색 경질의 토기 바닥편이다. 바깥면에 반원문과 정열문을 찍어 시문하였다. 바닥 아래 부분에는 굽이 달린 형태이다. <출처: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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