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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은 인조 14년(1636) 겨울에 청나라와 조선간에 2번째로 벌어진 47일간의 전쟁이다. 당시 청나라는 만주족.몽골족.한인으로 이루어진 1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임경업 장군이 지키던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3일만에 서울을 공략했다. 인조는 원래 강화로 피난하기로 했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남한산성가 천혜의 요새라서 큰 전투가 없었지만 전쟁에 대한 대비가 부족해 혹한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 강화가 함락되고 주위 정세가 불리함에 따라 부득이 하게 삼전도에서 청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에는 여러 사당들이 있는데 그 중 병자호란 47일간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현절사와 청량당이 있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며, 당시 청나라에 항복을 하는 과정에서 지배계층 내부의 대립을 잘 보여준 곳이기도 하다. 수어장대 아래에 위치한 청량당은 남한산성 동남쪽 축성 책임자였던 이회장군과 그의 부인을 모신 사당으로 강화 용두돈대에 남아 있는 손돌목 전설과 함께 당시 집권세력의 준비부족과 무능함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북문 아래 동쪽편 언덕에 세워진 현절사. 현절사는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청나라에 항복을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숙종 14년(1683)에 세워진 사당으로 삼학사와 함께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현절사 현편, 현절사는 사당을 세울 때 숙종이 하사한 이름이라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행적과 글을 수록한 삼학사전.


충렬공유고, 삼학사 중 한명인 오달제의 시, 부, 표, 대책, 등을 모아놓은 문집이다.


윤집간찰, 삼학사 중 한 사람인 윤집이 인조 13년(1635)에 아버지에게 쓴 안부편지이다. 과거시험 성적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청음집, 청음 김상헌의 시문집이다. 청의 침입에 대해 척화를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인 김상헌의 시국관과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부속 건물을 합하여 3동으로 구성되었는데, 단아하고 소박한 인상을 주어 조선의 선비 정신을 말해주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때 조정은 청나라와 화의를 주장하는 주화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주전파가 대립하였는데, 결국 주화파의 의견대로 화의가 이루어져 인조는 삼전도에서 항복하였다. 청나라는 끝까지 전쟁을 주장한 조선의 대신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삼학사는 당시 청나라에 끌려간 대신들 중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참형을 당한 사람들이다. 사당은 이들이 처형된지 50년만이 숙종14년(1683)에 유수 이세백의 주도로 세워졌으며 숙종 19년에 왕은 현절사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숙종 25년 삼학사와 함께 항복하기를 거부한 김상헌, 정온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출처:광주시청>


남한산성 주봉인 청량산 수어장대 아래에 세워진 청량당. 이 사당은 남한산성 동남쪽 축성 책임자인 이회장군과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한국전쟁 당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청량당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이 사당은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그의 부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회는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송씨는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는 죽을때, 자신의 죄가 없으면 매 한마리가 날아올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과연 매가 날라와 그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후에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맡은 공사가 가장 잘된 것으로 알려지자 사당을 지어 초상을 안치하고 넋을 기렸다. 원래 청량당은 6.25때 소실되어 다시 지었다. 서장대가 있는 산이름이 청량산이므로 청량당이라 이름 지었다. <출처:광주시청>


매바위.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있는 이 바위는 이회 장군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는 바위이다.

남한산성 남쪽 추조를 맡았던 이회는 공사에 완벽을 기하기 위해 철저히 점검을 하여 공사를 진행하다가 기일내에 완공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사비용 역시 턱없이 모자라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비용이 부족하게 된 이유가 이회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결국 이회는 참수형에 처하게 되었고 그는 죽기 직전 하늘을 쳐다보면서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죄간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그가 절명하는 순간 매 한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 바위에 앉아 슬피 울다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출처:광주시청>


서흔남묘비. 서남흔은 관노비 출신으로 병자호란 당시 큰 공을 세워 당상관 벼슬까지 올랐던 서남흔의 묘비이다. 사대부 세력이 막강했고 신분질서를 강조했던 조선후기에 노비출신으로 정2품의 벼슬까지 올랐다고 것으로 볼 때 당시 사람들 누구나가 인정할 정도로 큰 공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수훈을 세운 서흔남의 묘비이다. 서흔남은 수어청 병사의 사노로서 무당,와장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1637년(인조15)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여 외부와 연락이 단절되자 서흔남이 연락업무를 자원하였다. 그는 병자, 불구자, 거지 등으로 변장하고, 때로는 청군 병사를 살해하면서 청군 진영을 세 번이나 왕복했다. 이러한 공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고, 당상관이 되었다. 1631년(효종2)에는 남한산성 성벽과 4대문 문루, 동북창사의 보수공사에도 참여하여 목재 조달업무를 관장했다. 후에 정2품 가의대부로 책봉되고 종2품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묘비 중 하나는 1667년(현종8) 3월 13일에 건립했다. 또 하나의 비는 손상이 심해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 "한씨를 왼쪽에 묻었다"는 문구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에 다시 세운 것 같다. 이 비들은 중부면 검복리 병풍산에 있던 것을 광주시청과 광주문화원에서 발견하여 1998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출처:광주시청>


남한산성 연못가 정자인 지수당 앞에 세워진 비석


남한산성 행궁 복원사업으로 남문 부근에 옮겨져 모아 놓은 남한산성 비석군


남한산성 남문 옆 언덕에 세워진 비석군

남한산성 비석군
성 내에는 18~20세기 무렵에 설치된 39여기의 비성이 있다. 이 중 본 부지 내로 남한산성 행궁복원사업에 따라 이전된 11기와 현 위치에 보존되어 있던 19기를 포함한 총30기의 비석을 한 곳으로 모아 남한산성을 방문하는 탐방객들에게 옛 선현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후대에 소중히 전승될 수 있도록 비석을 한 곳으로 옮겨 정비해 놓았다. 이 곳에 있는 비석은 역대 광주유수 및 수어사, 부윤, 군수의 비로서 재직시 백성들을 정성스레 돌봐 치정을 잘 했거나 사랑을 베풀어 선정을 한 분들에게 백성들이 그들의 추념하여 세운 비로서 광주유수, 영의정을 지낸 심상규의 비를 포함 30기의 비석이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출처:광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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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 현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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