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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이야기

조선시대 별자리지도와 천문 관측기구

younghwan 2012. 2. 26.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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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문학은 우주의 구조와 천체의 현상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시간과 방위를 정하고, 농업에 필수적이었기때문에 인류와 함께 해온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래로 통치자는 그 권력을 나타내는 방편의 하나로 천체현상을 관측하고 해석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천체 현상 중 해와 달의 움직임, 별의 위치 등으로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는 하는 것이 주요한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체 현상 중 변화를 예측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한 오행성의 움직임, 해와 달이 사라지는 일식과 월식, 별이 사라지는 항성의 폭발과 특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혜성 등이 주요한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천문학이 고대문명에서 통치자나 종교적 권위를 갖춘 교황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던 것처럼, 아시아에서도 국왕이 국민을 통치하는 근본이 되는 학문으로 여겨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천문학은 독창적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지만, 상당수는 방법론 측면에서 중국의 예를 많이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과 지리적 위치가 다른 점에서 나타나는 오차를 수정하고 독립적인 통치자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천문 현상에 대한 관측이 이루어져 왔으며, 삼국사기나 조성왕조 실록 등에는 그 기록이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는 편이라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서운관을, 조선시대에는 관상감을 두어 전문적인 기술관료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관측을 하고, 천문현상에 대해서 연구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전의 천문학

삼국사기에 나타난 많은 천문현상에 대한 기록과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별자리 등으로 유추해 볼 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지속적인 천문관측을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중 고구려는 중국한 국경을 접하고 있어서 중국으로부터 천문사상을 도입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던 것으로 보이며, 강서대묘의 사신도 등 고분벽화에서도 그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하여 남조의 송나라 역법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일본에 천문박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신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인 첨성대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는 평양성에 첨성대가 남아 있고, 별자리를 그린 석각천문도가 고려말까지 존재했다고 하므로, 실제로 신라는 고구려와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형식인 지석묘(고인돌)의 덮개돌에 구멍을 낸 성혈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별자리를 표시한 경우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성혈인 경우도 있어서 천문학적 관점의 별자리라고는 보기 힘들지만 별자리를 표시한 가장 오래된 유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쓴 삼국과 통일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인 삼국사기, 1573년(선조6), 경주부 간행

삼국사기는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일어났던 주요한 천문현상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기록된 천문현상은 달의 그림자가 해를 가리는 일식, 혜성.유성.유성우의 출현, 오행성을 달이 가리는 현상, 금성의 운행 등에 관한 기록 등으로 천체의 움직임에서 그 규칙성을 찾아내기가 매우 복잡한 현상들로 '하늘의 변고'를 관찰하는 점성학적인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정확한 관찰과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108개, 고구려가 25개, 백제가 53개의 천문현상을 기록하고 있는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존재했던 자료에 의존한 기록으로 고구려의 기록이 당시 상대적으로 적게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경주시 인왕동에 소재한 국보 31호로 지정된 첨성대.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첨성대는 높이 9.17m,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의 원통형 구조물로 362개으로 돌로 27단으로 쌓고 있다. 남쪽편에 높이 1m의 출입문으로 있고, 사다리를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상단부에는 우물 정(井)자 형태로 판석이 깔려 있는데, 이 곳에 천문관측 장치를 걸어 놓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제단으로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기능적으로 볼 때 별자리, 해와 달, 오행성의 움직임 관측했던 구조물이라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첨성대는 경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평양성내에도 고구려의 첨성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경주의 첨성대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점이기도 하다. 백제는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백제와 교류가 많았던 일본에서도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실제 첨성대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고려 이후에는 첨성대를 쌓은 기록이 없고, 만월대에 비슷한 대를 쌓았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관천대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천문학

 유교사회를 지향한 조선은 제왕의 학문으로 천문학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해와 달의 움직임과 계절의 변화에 따른 시각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이 농업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관청인 서원관을 두어 천문현상을 관측하였으며, 세종대에 서운관은 그 이름이 관상감으로 바뀌었다. 관상감 관리들은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기술직 관료로서 천문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겨 놓고 있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일식과 행성의 운행 등 일반적인 기록 외에도 하늘에서 별이 사라지는 항성의 폭발도 기록으로 남겨놓았는데, 이는 하늘은 변하지 않는다는 종교적인 관념하에 이런 기록은 남기지 못했던 서구와는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세종대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천재적인 천문자이자 수학자인 곽수경이 정비한 역법, 천문관측 기구 등을 받아들여 중국과 지리적 차이에 따른 오차를 보정하고, 왕권 강화라는 측면에서 역법의 정비, 다양한 천문관측기구의 제작과 서적의 발간 등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왕권을 상징하는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왕권의 상징하는 천문도를 갖기를 원했는데, 어떤 사람이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쳐 이를 돌에 새길려고 했는데, 천문을 관장하던 서운관 관리들이 그 연대가 오래되어 오차가 생겼다는 의견에 따라 새로이 작성한 별자리 지도이다. 권근을 비롯한 11명의 천문학자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별자리 지도로 별자리 지도인 성도와 관측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성도는 북극을 중심으로 이 원과 적도, 황도권이 그려져 있으며 28수와 적도의 수도 등이 그려져 있다. 관측기사에는 28수에 대한 설명과 천문도 작성경위 작성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천상분야열차지도는 고구려의 천문지식을 기초로 작성된 것이라고 하며, 고구려의 천문각석도가 고려말 전란중에 대동강에 빠져서 종이로 된 고구려천문도를 참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상분야열차지도각석은 조선 숙종대에 다시 한번 만들어졌으며, 영조대에 이를 탁본한 목판본이 발간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천문도는 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며, 고구려 천문학의 계통이 조선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궁박물관 전시중인 국보 228호로 지정된 천양열차분야지도각석과 세종대왕 영릉에 전시중인 복제품

천상분야열차지도는 고구려에서 만든 천문도 체제를 참조하여 우리나라에서 본 별자리를 아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중국 남송대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천문도라고 한다.

숙종 때 다시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 1687년(숙종13)

이 각석은 태조 때 제작한 천상열차분야지도각석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모되어 숙종대에 복각한 것이다. 영조 대에 편찬한 '문헌비고'에 따르면 숙종13년 (1687)에 태조대 각석을 바탕으로 새로 새겨서 관상감에 보관하였으며, 영조 46년(1770)에는 관상감 내 흠경각을 지어 신.구본을 함께 보관하였다고 한다. 숙종대 각석의 내용은 태조대의 각석의 내용과 같다. 재질면에서 태조대의 각석은 오석을, 숙종대의 각석은 흰 대리석을 사용했다. 크기면에서는 숙종대의 각석이 태조대 각석보다 높이는 낮고 너비는 작지만, 두께는 더 뚜껍다. 그리고 제목인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위치가 태조대 각석은 하단에 있고 숙종대 각석은 상단에 있는 차이점이 있다. 이 각석은 태조 때 제작한 것에 비해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새겨져 있는 글씨와 별이 대부분 판독 가능하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 중기인 1571년(선조4)에 제작된 천상분야열차지도 목판본. 천상분야열차지도에 적힌 관측기사 내용 등을 자세히 볼 수 있다.


황도남항성도와 황도북항성도. 종이에 채색한 것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이어온 조선의 천문도이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보편화된 천문지도였던 것 같다. 황도남황성도는 조선에서는 보지 못했던 남반구의 별들을 서양을 통해 들여온 자료를 통해 조선후기 관삼감에서 보완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천문관측 기구

 조선 세종대엔 천문 관측을 위한 각종 기기들이 제작되고 천문관측을 전담하던 기관도 서운관에서 관상감으로 바뀌었다. 세종대의 천문관측기구의 정비는 정인지 주도로 천문관련 고전을 연구하고, 이천과 장영실이 기기 제작을 담당하여 천문관측기기인 원나라 곽수경의 체제를 적용한 간의를, 원나라 오징의 방법을 따른 혼의.혼상을 제작하였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로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등도 제작하였다. 이들 천문관측기기들은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거나 없어져서 현존하는 유물들 거의 없는 편이다. 조선후기에는 서양의 천문기기들을 참조하여 여러 천문기기나 천문도 등을 제작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송이영이 만든 서양의 자명종 시계와 혼천의를 결합한 혼천시계이다.


간의는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각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이다. 세종대왕은 천체를 관측하고 정확한 시각을 측정하기 위한 왕립 천문대인 간의대를 설치하고, 많은 천문 기구들을 만들게 하였는데. 세종14년에 먼저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목간의를 시험제작하여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측정한 후 청동으로 간의를 제작하여 간의대 위에 철치하였다. 원래 간의는 1276년 중국 원나라 천문학자 곽수경이 처음 만든 천문의기로서 오늘날의 천체망원경 식으로 해,달,오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밀학 측정하였다. <출처:세종대왕 영릉>


천문관측기기를 올려놓고 천체를 관측하던 창경궁 관천대(왼쪽), 관상감 옛터에 남아 있던 관천대(오른쪽)


세종 19년(1437년) 경복궁내에 만든 혼상(渾象)은 오늘날 천구의와 같이 하늘의 별자리를 적도와 황도좌표의 각도로 둥근 구면 위에 표기하여 별자리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천문기기이다. 이 둥근 혼상을 회전시키는 축은 지구으 자전축인 북극(북극성 방향)과 남극 방향이 일치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혼상에 그려진 별자리도 시간에 따라 지평환의 동쪽에서 떠오른다. 또한 천체가 남중(자오선을 통과)할 때는 자오환을 지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평환 밑으로 지는 모습이 재현되어 하루 밤 동안 별들의 운행을 살펴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세종 때의 혼상은 물의 흘러내리는 힘을 이용하여 자동적으로 하루에 한번씩 회전시킴으로써 하루동안 하늘의 움직임과 같게 하여, 이 혼상을 이용하면 밤의 시간과 1년 동안의 절기 변화를 측정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세종때 만든 혼상은 현존하지 않고 문헌자료를 근거로 복원하였다. <출처:세종대왕 영릉>


조선 세종대에 원나라 오징의 방법론에 따라 만든 혼천의는 개량을 거듭하면서 관상감에서 계속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그 원래의 모습을 추정할 수 없어서 조선후기 송이영이 만든 혼천시계의 혼천부분을 보고 그 모습을 추정하고 있다.

 혼천의는 혼의 또는 선기옥형이라고도 불리는 일종의 천체 위치측정기로서 일월오행성의 위치를 측정하는데 쓰였던 천체관측기기이다. 혼천의는 오래 전부터 천문관측에 사용하여 왔으나, 문헌사으로는 세종실록에 정초, 박연, 김진 등에 의하여 만들어진것이 처음이다. 그 후 개량을 거듭하여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는 시계와 연결하여 혼천시계로 사용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타버린 것을 이민철, 송이영 등이 이를 개량하여 경희궁에 설치하였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 혼천의는 국보인 송이영의 혼천시계 중 혼천부분을 확대 복원한 것이다.<출처:세종대왕 영릉>


일성정시의와 소간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조선 세종 19년(1437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천,장영실이 해시계와 별시계의 기능을 하나로 모아 고안하여 낮과 밤의 시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체관측의기이다. 이는 태양시와 항성시를 측정하는 주야겸용의 측시기로 해시계의 원리와 항성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그 주위를 규칙적으로 돈다는 별시계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 구조는 십자거,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 정극환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세종시대에 모두 4개의 일성정시의가 만들어졌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될 때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일성정시의는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복원된 것이다.

소간의(小簡儀)는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고, 낮과 밤의 시각을 측정할 수 있도록 만든 천체관측기기이다. 세종16년(1434년)에 이천, 정초, 정인지가 제작하여 경복궁 천추전과 서운관에 설치하였다. 소간의는 간의보다 크기가 작고 이동이 편리하도록 더욱 간편하게 만든 것으로 눈금이 새겨진 둥근 고리 모양의 환, 즉 사유환, 적도환, 백각환, 규형, 기둥과 밑받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도좌표계와 지평좌표게로 변형하여 사용할 수 있는 다목적 천체관측기기로 해, 달, 오행성과 별의 위치, 고도와 방위를 측정할 수 있다. 소간의는 세종시대에 도특하게 창제한 세계 유일의 천체관측기기이나. 현존하는 유물이 없어 세종실록에 근거하여 복원하였다


고려대박물관에 소장전시 중인 국보 230호로 지정된 혼천시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기술 유물로 조선시대 천문학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혼천시계는 기존의 혼천의와 톱니바퀴를 이용한 서양식 시계를 접목한 독창적인 천문시계이다. 천체와 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는 이 혼천시계의 원리가 상당히 유용했을 것이다.


적도의와 선기옥형,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천문 관측기구들이다. 서양의 것들을 참조하여 간단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적도의는 조선후기, 남병철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천문관측기기인 간의와 혼천의의 천체관측 부분만 따로 떼어 적도의를 제작하였다. 이는 세종시대로부터 꾸준히 변화 발전해 온 혼천의와 간의를 충분히 검토하고 연구한 끝에, 가장 손쉽고, 편리하게 관측할 수 있도록 고안된 천문기기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존하는 유물은 없어서, 기록에 남아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문헌을 참고하여 적도의 복원 제작하였다.

바티칸박물관에 전시중인 서양의 천문관측기구. 혼천의나 간의와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반구 별자리판,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절기와 계절을 측정했던 천문관측기구로, 원판 가운데의 지평판을 회전시켜 매일 보이는 하늘의 영역을 표시할 수 있다. 서양의 천문기기를 참조하여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평의설, 조선후기. 이탈리아 출신의 선교사인 우르시스(1575~1620)가 지은 천문서의 번역본. 우르시스는 명나라 황실에서 천문역산서를 펴내는데 참여하였던 사람이다. 이 책의 내용은 천문관측기구인 간평의에 대한 설명과 사용법으로 되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조선시대 역법

조선이 개국하면서 사용한 역법은 고려말부터 사용한 수시력과 대통력 등을 사용하였다. 세종대에 이르는 정초.정흠지 등이 명나라의 '대통력통궤'를 보완하여 '칠정산내편'을 편찬하였다. 이 칠정정산내편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완전히 소화하여 재정비한 것으로 한양을 기준으로 우리가 쓰기에 편리하게 보정한 것으로 그 역량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명대에 서양인 신부를 통해 도입한 서양역법을 반영한 숭정역서를 보완한 시헌력이 시행되었다. 조선에서도 시헌력을 도입하고자 했으나 그 내용을 소화하지 못하고 1653년(효종 4)에서야 시헌력을 시행하였으나 실제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난 1705년(숙종 31)에 적용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서양문물을 도입하는 형태로 여러 시도들이 있었으나, 서구에 비해서 조선후기에는 많이 뒤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천세력(조선후기). 1782년(정조6)에 관상감에서 기초하여 편찬한 역서로 1777년(정조1)부터 1886년(고종23)에 이르는 110년간의 역曆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시대 국가에서 천문관측을 전담 관청인 관상감까지 만들어 지속적이고 세밀하게 한 것은 농사의 기본이 되는 절기를 맞추고, 국가의 시간을 통일하는 통치행위로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며, 그 활동의 결과로 달력인 역법이 만들어진다.
 

관상감과 음양관

 관상감은 1425년(세종7)에 고려시대부터 존속되어왔던 서원관을 개칭한 관청으로 천문과 지리 등의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관상감은 조선시대의 다른 실무관청과 마찬가지로 실무는 중인출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음양관이 맡았고, 업무를 총괄하고 책임을 지는 직책은 문신들이 맡았다. 천문과 기상을 관찰하고 예측하는 업무의 중요성때문에 관상감의 총괄하는 영사는 영의정이 겸임을 했으며 제조 2인들 두었다. 관상감 업무를 맡은 문신들은 일반 유교경전 공부를 통해 관직에 들어왔지만 실제로 천문학에 대한 매우 뛰어난 지식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초를 대표하는 학자인 권근.정인지,이순,김담과 조선중기 이후의 이항복,남구만 등이 천문학에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음양관은 관상감이라는 기관에 소속된 관원을 말한다. 관상감은 천문학.지리학.명과학(운명과 길흉을 다루는 기관)의 세 부서와 부속기관인 금루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음양과는 관상감에서 음양학을 일정기간 공부한 생도들이 응시할 수 있었는데, 초시와 복시 2단계의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였다. 음양관 역시 역관.의관과 마찬가지로 정3품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음양관 중 가장 높은 자리인 삼력관은 17세기 시헌력 시행 이후 신설된 직제인데, 음양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만이 자격이 주어졌다. 그러나 정조 때 관상감 제술관이었던 김영은 음양과 출신이 아니었으나 역대 역법과 의기의 제도 및 변천을 상세하게 설명한 <국조역상고>를 편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삼력관으로 제수되는 특혜를 받았다는 기록이 <일성록> 1796년(정조20) 4월 25일 기사에 있다. 관상감 천문학 부서 관원들이 일상적으로 맡았던 일은 역서의 편찬과 간행, 천재변이의 관측과 보고, 일식과 월식의 에보와 구식례(일식에서 태양을 구하는 의식) 등이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매년 정기적으로 하는 역서의 편찬과 간행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영의정이 겸임했던 관상감 영사의 도장과 조선 철종때 편찬된 신법보천가.1862년(철종13)에 관상감인 이준양이 편찬한 천문서로 이책은 음양과의 시험과목이 되었다.

* 자료참초: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고궁박물관, 서울역사박물관, 고려대박물관, 중앙박물관, 경기도박물관
                  3. 네이버백과
                  4. 세종대왕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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