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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_향교_사당

안성 양성향교, 옛 양성현 관아의 중등교육기관

younghwan 2012. 3. 21.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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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현은 안성시 양성면 일대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때에는 서복홀, 신라 경덕왕 때는 적성이라 불렀다고 고려초부터 양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개국초부터 현감이 고을 수령인 양성현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 안성군과 통합되었다. 고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으로 양성향교를 제외하고는 옛 양성현 관아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인근에 덕봉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양성향교는 양성현 관아가 있었던 양성면 소재지에서 1km정도 떨어진 낮은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향교는 비교적 늦은 시기인 1530년(중종25)에 세워졌으며, 조선후기에 1774년(1774)에 중창되었다. 앞쪽에 강학공간인 명륜당이 뒷편에는 공자와 선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을 두고 있다. 현재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가 남아 있지 않다. 양성향교는 향교의 교육기능이 없어지고 제사기능만 남아 있던 영조대에 중창되어서 그런지 강당의 건물도 왜소하여 유생들이 공부하기에 좁아보인다. 실제로 공부하는 공간이라기 보다는 유림들이 제사를 준비하거나 회의를 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제향공간으로서의 기능만 남은 조선후기 향교건물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성향교 출입문임을 알려주는 홍살문이 언덕위에 세워져 있다.


향교 출입문인 외삼문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학공간인 명륜당. 앞면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는 원래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날씨가 추운 중부지방이라서 그런지 가운데 1칸을 제외하고는 벽으로 막아놓고 있다.


반면에 명륜당 뒷편으로는 가운데 3칸 대청마루가 뚫려있다.


뒷편에 제향공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내삼문.


특이하게 명륜당 뒷편에 수령 400년된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선현들을 모신 동.서무는 별도로 두고 있지 않다. 양성현 자체가 큰 고을이 아니고 향교의 기능이 많이 상실되었던 영조대에 중건되어서 간략화된 조선후기 향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 양성향교로 들어오는 길


양성향교에서 내려다 보이는 옛 양성현 관아가 있었던 양성면 소재지.


양성향교,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
향교는 조선시대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양민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이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또한 향교에서는 교육뿐만 아니라 중국과 조선의 선현에게 제사하였다. 고을의 크기에 따라서 향교의 정원을 조정하였는데 대체로 군에는 50명, 현에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일반적인 향교의 건물 배치는 앞의 외삼문 쪽에 공부하는 장소인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서재를 두고, 뒤의 높은 곳인 내삼문 안에는 공자와 4성현을 제사지내는 대성전과 공제의 제자 및 송나라와 우리나라 현인을 제사하는 동무.서무를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룬다. 양성향교는 중종 25년(1530) 이전에 세워져 영조 50년(1774)에 중창되었고, 1885년에 수리.보수되었다. 대부분의 향교와 마찬가지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내삼문 앞에 심어진 은행나무는 나무의 나이가 400년을 자랑하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국향교에 주로 나타나는 일반적 축소규모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명륜당과 대성전을 갖춘 조선 후기의 소규모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안성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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