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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팔경은 강원도 동해안을 중심으로 금강산에서 울진 월송정까지 주요 명승지를 일컫는 말로 조선시대 선비들이 꿈꾸었던 금강산 유람과 함께 동해안 바닷가에서 경치가 빼어난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향정, 평해 월송정을 일컫는다. 대체로 동해안 명승지이기도 하지만, 주위에 넓은 농토가 있어 쉬어갈만한 부유한 마을이 가까이 있고, 도보로 여행할 때 하루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기때문에 적절한 여행경로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금강산 장안사와 유점사, 건봉사, 설악산 신흥사, 양양 낙산사,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 등 왕실인사와 관련된 사찰들 또한 여행의 편의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동팔경 외에도 이 곳에 유람을 떠났단 많은 인사들이 그림으로 강원도의 풍경을 많이 남겨 놓고 있다.

 강원도는 그 면적이 넓고 이름난 산이 많기는 하지만, 농지가 그리 많지 않은 까닭에 조선시대에는 중앙을 이끈 세도가나 뛰어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것 같지는 않다. 강원도와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강릉 출신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천재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들 수 있고, 조선중기 여류시인 허난설헌 등이 있다. 또한 조선후기 당파 중 남인의 영수로 알려진 미수 허목은 말년에 좌천되어 삼척부사를 지내면서 많은 업적을 남겨 강원도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강원도 영월 청령포는 조선초기 세조에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이 마지막을 보낸 곳이며, 인근의 단종의 능인 영월 장릉이 있다.

그림을 따라 떠나보는 관동명승
'관동팔경'으로 유명한 관동지역 명승지는 수많은 문인들에게 풍류와 유람의 대상이 되었다. 이 지역은 금강산과 가까웠기 때문에, 금강산 유람과정에 자연스럽게 포함되기도 하였다. 많은 문인들이 관리로 부임하거나 개인적으로 유람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관동지역 명승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그림은 총 12폭으로 구성된 <관동명승첩>에 속해 있다. 이것을 따라 관동지방 여행을 시작해 보면, 우선 평창의 오대산으로 들어가 중대, 사고, 상원암, 청심대를 지나 멀리 강릉을 조감하면서 대관령을 넘었다. 그리고 남쪽 삼척으로 가서 죽서루와 능파대(촛대바위), 두타산 용추폭포에 이르렀다. 이어 남쪽으로 내려가서 울진의 망양정에 올랐고 다시 북쪽으로 강릉을 지나 양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낙산사와 관음굴을 보고 다시 설악산으로 들어가 와선대에 이르렀다. 이는 김홍도가 1788년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지역과 관동팔경 지역을 사생 여행하게 되었을 때의 여정과 동일하다. <출처:춘천박물관>


12폭의 그림 중 설악산 와선대를 그린 풍경


관동지역 풍경 (Landscape Painting)을 그린 12폭의 그림 중 설악산 비선대와 평창 청심대를 그린 그림

화천 곡운구곡
'곡운구곡'은 현재 강원도 화천군 삼일리, 사창리 일대에 걸쳐있는 아홉굽이의 계곡으로, 안동김문의 김수증이 1676년(숙종2), 가족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머물렀던 곳이다. 중국 송대의 성리학자 주희가 거처한 '운곡'의 지명을 참고로 '곡운'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김수증은 자신이 거처했던 이곳을 당시에 이름을 날렸던 화가 조세걸에게 부탁하여 1692년(숙종18)에 매우 사실에 가깝게 그리게 하였다. 우리의 산천을 그리는 풍토가 완전히 정착한 조선후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보다도 이 그림은 더 실제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특이한 산세, 겹겹이 쌓여진 바위의 모습 등이 인상적이다. <출처:춘천박물관>


곡운구곡도(화천지역의 아홉굽이경치, Nine Gorges Painting), 조재걸, 1682년


곡운구곡도 모사본


금강산 민화풍경. 금강산은 왕실과 선비들이 풍류와 유람을 위해 즐겨 찾는 장소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금강산 그림을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겸재 정선 이후 금강산도는 조선 그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유행하였는데 이 그림은 금강산 그림이 서민화, 대중화되었을 때 제작된 민화병풍이다. 각 화면에는 명승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출처:춘천박물관>

강원의 인물
강원지역 출신으로 중요한 사회적 활동을 했거나 강원도에 와서 특별한 업적을 쌓은 인물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신사임당과 이이, 허난설헌, 허목, 황희 등을 들 수 있다. 신사임당은 강릉 출신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현모양처와 자녀교육의 귀감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신사임당은 7세가 되었을 때 조선초기의 유명한 화가 안견의 그림을 스스로 배웠다고 전화는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시문과 그림에 뛰어난 여성화가였다. 신사임당의 그림으로 알려진 것은 여러 종류가 있으나 가장 유명한 것은 초충도이다. 각종 풀꽃에 나비, 벌, 들쥐, 잠자리 등이 같이 등장하고 있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황희,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도 주목되는 인물이다. 특히 허목은 64세가 되던 해인 1660년 강원도와 인연을 맺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좌천되어 온 것이기는 하지만 삼척에 와서 척주지를 발간하고, 척주동해비를 세워 조수의 피해를 막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다. 한편 조선말기에는 영동지역에서 그림과 서예로 이름을 날린 문인들로 박기정, 이희수를 들 수 있다. 소남 이희수는 글씨에 재주가 많아 대원군으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하며, 조선말기 유명한 화가 김규진의 외삼촌이기도 하였다. 강릉과 삼척지역에 20여년간 머물면서 강릉 선교장의 편액을 쓰는 등 많은 글씨와 그림을 남겼다. <출처:춘천박물관>



풀과 벌레 그림 병풍, 초충도(복제품), 신사임당, 16세기


물가풍경(Flower and Waterfowl), 전 신사임당


꽃과 나비, 전 신사임당


허목 선생이 쓴 서첩 (The Eulogy of Donghae), 허목, 17세기


허목 선생이 쓴 서첩, 17세기. 책 표지에는 허목의 호를 따하, '미수서첩'이라고 쓰여 있다. 허목은 삼척부사를 지냈던 인물로, 동방제일의 전서로 유명했던 남인계열 학자이다. 서첩 가운데 전시된 부분은 허목 특유의 힘있고 간결한 전서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수 허목이 쓴 '척주동해비'의 탑본(Rubbing 'Stele to the East Sea in Samcheok')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는 오십천이 범람하여 주민의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은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을 지어 독창적인 고전자체로 써서 정라진 앞의 만리도에 동해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 그 후 비가 파손되어 조수가 다시 일자 숙종 36년(1710) 이를 모사하여 현재의 정상리 육향산에 세워 조수를 막았다 한다. 문장이 신비하고 물리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하여 퇴조비라고도 하는 이 비는 전서체에서 동방 제일의 필치라 일컬어지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서도 유명하다. <출처:춘천박물관>


이명기가 모사한 허목 82세 초상(복제품), 보물 1509호, 이명기, 1794년
허목은 호가 미수로, 남인의 거두였던 그는 조선중기 대표적인 사대부로서 사상가이자, 정치가이며 또한 예술가였다. 서예에도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여 전서에 있어서는 동방제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강원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4세가 되던 해인 1660년이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좌천되어 온 것이긴 하지만 삼척에 와서 척주지를 발간하고 척주동해비를 세워 조수의 피해를 막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다. <출처:춘천박물관>


부채그림(Landscape on Fan), 이희수, 19세기


교지(Royal Order), 1681년, 왕이 김우명에게 시호를 내린 문서


청풍김씨세승록(Genealogy), 조선


진락공중수청평산문수원기, 탄연, 고려시대 1130년
고려의 고승이자 최고의 명필인 탄연의 작품이라고 가장 확실시 되는 청평사문수원중수비의 탁본이다. 비석은 깨어지고 탁본만 남았다. 중수비는 춘천 청평산에서 선학을 닦았던 이자현의 사적비로 문수원은 강원도 청평사의 옛 이름이다.

강원을 찾아온 조선왕실
강원도는 험준한 산하인 동시에 수려한 명산이 되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녔다. 이러한 이유로 왕실에서는 멀리 강원도에 원찰과 사고를 건립하였다. 강원도에 위치한 원찰로는 세조의 원찰인 상원사와 예종의 원찰인 낙산사가 있으며, 이들 사찰에는 대대로 특혜가 내려졌다. 한편 단종에게는 강원도가 험준한 유배의 땅이 되기도 하였다. 수려한 경관의 강원도는 금강산, 관동팔경으로 유명했다. 이곳에 찾아와 머무르며 유람을 즐겼던 문화는 왕실 뿐 아니라 선비들 사이에게 풍류와 유람의 명소가 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왕실의 음식과 그릇을 관장하던 관청인 사옹원에서는 품질 좋은 백자를 생산하기 위해 전국의 백토 생산지를 조사하였고, 강원도 원주와 양구지역에서 백토를 채굴하여 상납하게 하였다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다. 양구 방산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성계발원사리구는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춘천박물관>

단종의 유배와 죽음, 복위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올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단종은 1457년(당시 17세)에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고 그 해 10월 끝내 사약을 받게 되었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은 200년도 더 지나 숙종에 의해 한을 풀게 되었으니, 1968년 숙종은 '단종'이라는 묘호를 부여하고 임금으로 복위하면서, 종묘에 신위를 모셨으며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종묘의 단종 신위 양쪽에는 동쪽에 어보와 서쪽에 어책을 함께 모셨다. 어보에는 '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지보'와 '단양제경정숭황후지보'의 존호를 새겼고, 남구만이 지은 시책문을 옥에 새겨 10장이 연결된 어책을 제작하였다. 다섯개의 옥판을 연결하여 한 장을 구성하였고, 상하단은 당초무늬를 장식한 금색 놋쇠판으로 화려하게 마감하였다. <출처:춘천박물관>


정순왕후와 단종의 도장, 17세기


옥으로 만든 책, 단종옥책(Jada Book of Danjong), 17세기

단종과 장릉
영월 청령포라는 외진 곳으로 쫓겨난 단종은 매일 밤 관풍헌 자규루에 올라 피리를 불게하니, 그 소리가 먼 마을까지 들렸다고 한다. 위의 시는 유배된 단종이 자규루에 올라 지은 것이다. 사방이 높은 산과 깊은 물로 끊긴 곳에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한을 품고 쫓겨난 새'에 비유하고, 붉은 꽃잎이 떠가는 계곡물을 '핏빛'으로 묘사하였다. 단종이 묻힌 장릉은 사적 1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하여 정조15년(1791)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 정조대에는 단종의 여러 사적들에 대한 중수가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장릉지'를 개찬하고 '장릉사보'를 완성하였다. <출처:춘천박물관>


장릉사보


'병진'명 암막새 조각(Roof-end Tile), 영월군 청령포


태합, 조선시대


돌함(Stone Case, 태항아리를 넣는 함), 태를 담은 항아리와 태지석

왕녀 복란의 태실, 원주시 태장동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의 태(태, 탯줄과 태반)를 항아리에 넣어 큰 석함에 다시 넣은 후 산봉우리에 안치하였다. 태를 묻는 장소는 풍수사상에 의거하여 택하였다. 태는 두 개의 항아리와 큰 석함 안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 외 각종 백자, 토기 등은 석함 주변 지하에 묻었다. 복란은 성종의 왕녀로 1486년 10월 13일에 출생하였고, 태는 같은 해 12월 29일에 원주에 묻혔다고 한다. 이를 통해 태어난 지 2개월 정도 후에 묻는 풍습을 알 수 있다. 복란의 태실 석함은 도굴된 채로 발견, 조사되었고, 석함 안에 있던 외항아리와 태지석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춘천박물관>


실록보관상자


상원사에 내린 문서(Official Document of Sangwonsa), 1469년 상원사에 내린 문서인 입안(관청에서 확인해주는 공증문서)이다. 상원사는 세조의 원찰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 상원사에 들렀을 때, 문수보살이 홀연히 나타나 등을 밀어주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상원사는 이후 세조의 원찰이 되었고, 여러가지 원찰로서의 특혜가 내려졌던 것이다. "강릉부땅 산산제언(땔감을 제공하는 산과 저수지 관리권)을 상원사에 주되 여러 잡역과 염분세 등을 줄여주도록 호조에 하달한다." <출처:춘천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