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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제황산공원 2층은 예전에는 관변단체들의 사무실등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 진해의 역사를 보여주는 구립박물관으로 변신해 있다. 진해만 해안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진해는 조선시대에는 부산포, 염포(울산)과 함께 왜관이 설치된 삼포 중 하나인 제포진이 있었고, 그 안쪽에는 지방행정기관으로 웅천현이 있었다. 삼포가 설치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해는 고대이래로 일본, 중국을 연결해 주는 연안해상교통로의 주요 요지였으며, 가야연맹체인 금관가야의 관문이기도 했던 지역이다. 웅천현 앞바다에 위치한 제포는 부산과 함께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으며, 또한 삼면에 큰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서 왜인들을 일반인들과 격리시키기 좋은 지리점 잇점 등으로 일본과의 무역통로 역할은 조선후기까지도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진해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이 지역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진해에는 신석기시대에서 삼한시대까지 이어지는 기간동안의 유적지인 조개더미가 여러곳에 산재해 있으며 삼한시대 무덤인 석동고분군, 삼국시대에 쌓은 구산성지, 조선시대 유적지인 웅천읍성, 웅천왜성, 제포성지, 웅천도요지 등 조선시대 유적지들도 다수 분포하고 있다.



진해의 지형과 유적지 분포를 보여주는 모형. 원래 진해는 바다 바깥쪽과 가까운 웅천지역이 지역의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서쪽편 마산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군항을 설치하면서 도심의 중심지가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지금은 웅천과 웅동,용원지역에 우리나라 최대의 항구인 부산신항이 건설되면서 웅천지역이 조선시대 교역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되찾고 있는 중이다.

신석기시대의 문화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문화는 지구상의 기후가 빙하기에서 현재와 같은 간빙기로 접어드는 기원전 10,000~8,000년 경에 시베리아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고아시아족들이 북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새로운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농경생활과 함께 가축을 기르게 되면서 그에 필요한 간석기와 토기를 만드는 기술이 새롭게 발달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대개 물과 식량자원이 풍부한 해변가 언덕, 큰 강가의 대지와 내륙지방의 작은 강가, 육지와 가까운 섬지방에 자리잡고 살면서 집터.조개더미.무덤 등의 유적지에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한 각종 토기류와 석기.뼈연장.꾸미개.어로도구 등의 유물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 유적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은 남해안 일대로, 주로 조개더미유적이 분포하는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데, 부산 동삼동.범방동, 통열 연대도, 김해 수가리, 진해 안골동.수도동 등이 있다. <출처:진해박물관>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집터는 동굴과 바위그늘을 이용하거나 땅을 파서 만든 움집이 일반적인 형태이며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구덩이묘가 일반적인 형태이다. 또한 조개더미는 식용으로 이용하고 남은 조개껍질과 함께 못쓰게 된 생활도구를 버린 곳이다. 신석기시대 유적지에서는 토기.석기.뼈연장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는데, 유물 중에서 지역성과 시대성을 잘 반영하는 것은 토기이다. 남해안 신석기시대 토기의 변천은 먼저 기하학적 문양이 돌출된 돋을무늬토기에 이어서, 눌러 찍어서 여러가지 문양을 장식한 눌린무늬토기가 나타난다. 그 후 신석기 토기의 대표적인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아가리 부분에 짧게 그은 무늬토기를 거쳐 겹아가리토기를 사용하여 표면의 문양이 거의 사라진다. 석기는 사냥도구인 화살촉.창, 어로도구인 그물추.착살과 공구인 도끼.송곳.괭이.갈돌 등이 있으며, 뼈연장으로는 바늘.송곳.새기개 등이 있다. 특히 부산 동삼동조개더미에서 나온 사람얼굴 모양의 조가비는 신석기시대인의 신앙과 의식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진해박물관>


신석기시대의 토기. 진해에서 출토된 것은 아니고 김해지역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돌연장

청동시대의 문화
청동기시대는 구리와 아연 또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하여 사람이 처음으로 청동기를 만들어 사용한 시기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900년경부터 철기문화가 처음 유입되는 기원전 300년경까지로 구릉과 충적지를 중심으로 대규의 마을을 형성하여 벼농사를 중심으로 농경생활을 하였다.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뛰어난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다양한 유적과 유물을 남겼는데 돌널무덤.고인돌 등의 무덤과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목책.도랑을 갖춘 집터 등의 유적과 주로 껴묻거리나 무기로 사용한 청동기와 토기.석기.목기.뼈연장 등의 유물을 남겼다. 남해안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김해 봉황대유적, 김해의 고인돌, 창원 남산동집터, 진해 죽곡동 동굴집터 등이 있다. 특히, 죽곡동 동굴집터는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동굴을 이용한 동굴집터이다. <출처:진해박물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낮은 구릉이나 충적지에 마을을 형성하여 농경생활을 하며, 집터.무덤 등의 유적에 무늬없는 토기와 청동기.석기 등의 유물을 남겼다. 마을은 낮은 구릉이나 충적지에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도랑을 파고 만든 움집을 만든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무덤은 구덩이 안에 판돌이나 깬돌로서 만든 돌널 속에 주검을 넣고 굄돌이나 돌무지를 쌓은 후 그 위에 덮개돌을 놓은 고인돌과 고인돌의 땅밑 시설과 유사하나 널의 깊이가 보다 깊고 널의 뚜껑을 판돌이나 나무판자로 덮은 돌널무덤과 독 안에 주검을 넣고 판돌을 덮거나 2개의 독을 이어서 만든 독무덤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청동기시대 유적에서는 청동기, 토기, 석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다. 청동제품은 일반인의 실용품이라기보다는 유력자의 특수품 또는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한 칼.창.도끼.거울 등이 있다. 토기는 겉면에 광물질의 안료를 바르고 문질러 광택을 낸 붉은 간토기.검은간토기, 여러 형태의 무늬없는토기 등이 있다. 석기는 반달모양돌칼.화살촉.창.칼, 신분을 상징하는 바퀴날도끼 등이 있다. 특히 울산 반구대의 바위그림은 청동기시대 사람의 신앙과 의식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진해박물관>


청동기시대의 토기들


청동기시대 도구들


청동기시대의 간돌칼

죽곡동 동굴집터
죽곡동 마을 동쪽의 뒷산 계곡에 있던 청동기시대의 동굴집터로 규사를 채취하던 광산에서 발견되어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하여 보고되었고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동굴은 남향으로 북.둥.남쪽에는 산이 둘러싸고 있어서 겨울에 강풍을 막아주는 동굴집터로서 적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동굴은 길이 19.5m, 높이 7.5m, 폭4m의 크기였으며, 동굴 앞쪽은 약 45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암벽은 규사암이 부드럽게 풍화되어 있었고 동굴바닥은 10~80cm의 두께로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었다. 유적은 동굴바닥에 길이 11m, 폭 4m, 두께 50cm 정도의 소규모로 조개껍질층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조개껍질은 대부분 굴껍질에 소량의 소라껍질이 혼합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굴껍질을 벗기는데 사용된 뗀돌날과 팽이형 무늬없는 토기편 등이다. 동굴집터는 단기간에 걸쳐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소규모로 생활하던 집터유적으로 남한에서는 그 예가 드문 유적이다. <출처:진해박물관>

용원유적
용원유적은 녹산국가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토취장으로 사용될 독립구릉정상과 남쪽 경사면에 분포되어 있었다. 정상부에는 집터, 남쪽 경사면에는 조개더미가 있었는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조사결과 원형.방형.부정형움집 14기, 소토유구 5기, 고상가옥 4기, 기타유구 27기, 조개더미 등이 드러났다. 움집터 중 원형움짐터는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기둥구멍이 나타나는 형태가 일반적이고, 고상가옥은 움집터를 없앤 후의 퇴적층에서 나타났으나 동쪽에서 확인된 대형유구는 여러 창고가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개더미는 50cm 정도의 표토층 아래에 모두 15개 층위로 나뉘어진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토기인데, 항아리.굽다리접시.목긴항아리 등이고, 손칼.화살촉.도끼 등의 철기와 숫돌, 손칼손잡이로 사용한 뼈연장 등이다. 그리고 조개더미에서는 여러 동물의 뼈가 채집되어 당시의 식생활을 알 수 있었다. 용원은 금관가야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이 처음 도착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금관가야의 입구에 해당되므로 주변지역은 물론 해상을 통한 일본지역과도 활발하게 문물교루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출처:진해박물관>


용원유적지 집터

삼한시대의 문화
삼한시대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기원후 300년경까지의 약 6세기 동안을 말하며, 기원전 약 3세기 동안을 초기철기시대라고 한다. 삼한시대는 철의 생산과 제작, 농경의 발전 등 경제적.사회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면서 각지에 고대소국들이 형성되는 당계이다. 당시 사람들은 돌널무덤을 발전시킨 덧널무덤.돌덧널무덤.독무덤 등의 다양한 무덤과 움집.고상가옥 등의 집터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유물은 실생활에서 직접 사용하던 철기와 껴묻기로 사용한 다양한 토기 및 뼈연장 등이 있다. 우리고장의 삼한시대의 유적은 자은동.웅천동.용원동에 있는 조개더미와 웅천동.용원동에 있는 집터 등이 있다. <출처:진해박물관>


삼한시대의 토기

석동고분군
석동고분군은 진해와 창원을 연결하는 안민고개의 동쪽인 석동의 뒷산 능선에 위치하는 가야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진해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는 장복산이 진해만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부분에 해당하며, 현재 밭, 농장, 목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고분군의 지표에서는 회청색경질의 굽다리접시와 항아리, 적갈색연질의 바리가 채집되었고 돌덧널무덤의 석재가 일부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근래에 밭과 농장으로 개간할 때 다량의 토기와 갑옷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분군이 위치한 주변은 일찍부터 이른바 고려장터로 알려져 왔다. 고분군은 인접한 자은동조개더미와 함께 널무덤에서 구덩식돌덧널무덤까지 축조된 고분군으로 추정되고, 진해 중심권의 고대무 복원에 있어서 중요한 유적으로 판단된다. <출처:진해박물관>

웅천유적
웅천유적은 웅천과 웅동의 경계를 이루는 자마산의 평탄한 대지와 남쪽 경사면에는 조개너미가, 웅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과 경사부에는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조개더미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출토된 유물은 약 40,000여점으로 사냥과 고기잡이에 사용한 화살촉과 낚시바늘, 그물추, 주술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복골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출토된 숯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약 2,000년 전으 절대연대가 나오기는 하였지만, 인근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성격과 비교하면 삼한시대의 생활유적이다. 고분군은 후대의 인위적인 파괴로 무덤의 석재와 뚜껑돌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무덤으 장축방향은 대부분 등고선 방향의 흐름과 일치하는 구덩돌덧널무덤이고, 채집되는 유물은 굽다리접시, 항아리, 바리 등이다. 웅천유적은 해발 200m 전후의 고지에 형성된 삼한시대의 복합유적지로, 진해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출처:진해박물관>


웅천유적지 출토유물


김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하는 장면

구산성지
자은동 구산의 정상부를 둘러 자연암반 위에 다소 서쪽으로 경사를 이루면서 비스듬히 쌓은 테뫼식 석축성으로 진해선수촌 조성으로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하였다. 성은 생토층을 1m 정도 절개하여 기단부를 형성한 뒤 상단부는 지면과 거의 수직이 되도록 안팎으로 좁게 축조하였으며 내벽의 경우 높이 5m이며, 둘레는 350m이다. 성벽은 화강안 또는 점판암을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사용하였고 체성밖의 기단부에 계단식 굽도리를 두었으며, 성벽의 동쪽에는 문지를 갖추고 문지 밖에는 건호를 둘렀다. 성내에는 성밖에서 안으로 물을 끌어 들이는 시설과 물을 내 보내는 시설을 하여 상.하수도로 사용하였고, 동문의 누각은 정면1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로 추정되고, 불구덩이가 발견되어 건물의 온돌시설이거나 봉수지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폭은 기단부가 6m, 상부가 5.5m로 내외벽이 적심부를 향해 비스듬히 경사각을 이루고 있다. 구산성은 출토유물로 보아 6세기에 축조하여 고려 초까지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며 복원한 성벽의 일부가 이충무공수련원 안에 남아 있다. <출처:진해박물관>


진해지역 출토유물

웅천도요지
웅천도요지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보배산 기슭의 점골에 위치하며, 두동요지, 금곡요지 등으로 알려져 있다. 도요지의 지표면에서 채집되는 유물은 대부분 덤벙문 분청사기이며 도요지는 도굴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5세기 초에는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하다가 16세기 중엽부터 소멸되는 자기이다. 덤벙문 분청사기는 백자로 변해가는 마지막 단계인 16세기에 나타나는 제작기법으로, 분장할 때 그릇의 굽을 잡고 담구어서 분장하였으므로 그릇으 표면이 백자와 비슷하다. 따라서 웅천도요지는 임진왜란이 끝나는 16세기중엽까지 요지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청사기 도요지는 오름가마로 경사를 따라 양벽을 점토로 쌓아 올리고, 활처럼 둥글게 만든 궁륭현천장을 만들고 내부에는 칸막이를 설치하고 칸막이의 밑에는 통염공을 두었다. <출처:진해박물관>


웅천도요지

웅천읍성
웅천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종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시작하였다. 웅천읍성은 장방형축성으로 기단부를 이중으로 조성하고 자연대석을 사용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또한 동서남북의 정방에는 옹성형 문지를 두었으며, 각 문지의 좌우 성곽의 네 모퉁이에 곡성과 적대를 둔 전형적인 읍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 성이다. 성은 총길이 938m, 폭 4.5m, 높이 4.4m에 이르고 있으며 동벽은 대체로 온전히 남아 있으나, 남.서벽은 훼손되어 일부분 남아 있고, 북벽은 국도를 내면서 파괴되어 기단부만 매몰되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웅천읍성의 안에는 동헌, 객사,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사령방 등의 관청과 동문의 견릉루, 서문의 수호루, 남문의 진남루, 객사문루인 정해루 등의 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출처:진해박물관>


웅천읍성

제포유적
제포는 웅천과 창원의 방어와 마산포의 조운을 돕는 역할을 담당하여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는 곳이며, 삼포개항지의 하나이다. 제포에는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성을 쌓은 제포진성과 조선시대 초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여 왜관을 두어 상거왜인을 제한하였던 왜관지, 제포에 드나드는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고 왜적으로부터 선박을 보호하기 위하여 바다에 설치한 연목, 왜관 밖에 성을 쌓아 일반주민과의 접촉을 차단하였던 제덕토성 등이 있다. <출처:진해박물관>


삼포 중 하나인 제포. 제포 앞바다의 고립된 지역에 설치된 왜관의 모습과 반대편 제포진 성을 재현해 놓고 있다. 조선에서 설치한 왜관의 형태를 참조하여 만든 것이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개방한 나가사키항이다.


제포로 서양인이 들어오는 장면


진해의 고기잡이. 진해의 지리적인 자연환경이 가져다 주는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해산물은 고기잡에 더할 나위 없는 천혜의 조건이다. 청정해안을 끼고 있는 진해의 고기잡이는 대구,멸치,피조개 등이 유명하다. 특히 피조개는 진해의 특산물로 가공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며, 내수면연구소의 양식업 발달도 어업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출처:진해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