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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341호), 대표적인 금관가야 고분

younghwan 2012. 4. 14.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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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시 구도심 중심부에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길이 약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가야고분군들과는 달리 거대한 봉분을 만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가 자리잡고 있던 김해중심부에 건국설화와 관련된 구지봉, 대성동고분군, 수로왕릉, 봉황동유적지가 하천을 따라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은 1~5세기에 걸친 오랜 시기에 걸쳐서 조성된 무덤군으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기존의 무덤위에 새로운 무덤을 중복 축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이지역 지배세력의 교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중국제 거울, 북방계 말갖춤, 방패형동기, 호랑이모양 띠고리, 청동솥 등이 있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은 이런 유물들은 당시 한.중.일 문화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가야의 대외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금관가야는 1~6세기초까지 김해를 중심으로 낙동강 하류 지역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로 가야연맹체의 중심이 되었던 국가이다. 현재 우리나라 성씨가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금관가야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금관가야는 532년(법흥왕19) 신라에게 멸망하였으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한 김유신의 존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에서도 중요한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한시대 이래로 한.중.일 해상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천 늑도 지역이나, 창원 다호리지역, 고성의 소가야의 역할을 통합하여 삼한시대 이후 크게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를 구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하천인 해반천 동안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김해 대성동고분군. 산능선 또는 언덕에 조성된 다른 가야의 고분군과는 달리 금관가야의 고분군인 대성동 고분군은 평지 또는 해발 20m의 낮은 구릉꼭대기에 크지 않은 규모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김해 도심부의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대성동고분군은 예전에는 농경지 등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공원 및 유적지로 바뀌어 있다. 고분 북쪽에는 넓은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대성동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편 평지에서 발견된 29호분과 39분은 발굴되었던 상태로 복원하여 노출전시관으로 꾸며놓고 있어서 발굴당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성동 노출전시관 내부에 복원되어 있는 발굴 당시의 29호분과 39호분 모습. 29호분은 3세기 후반에, 39호분은 4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두 고분은 100년 정도의 시간차이를 두고 중복된 것으로 금관가야 무덤축조 방식의 특징을 잘나타내며,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9호분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왕묘로 추정되는 무덤으로 청동솥과 최초의 가야 도질토기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노출전시관에서는 이 곳에서 출토된 도질토기를 비롯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청동 솥, 반달모양의 손잡이가 달려있고 바닥이 편평하며, 음식을 끓이는 그릇이다. 초원지대 유목민족의 것으로 북방문화의 영향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몽골지역에서는 이런 용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TV에서 자주 볼 수 있다.


29호분보다 100년 정도 늦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39호분. 29호분의 일부를 파괴하고 축조하였다. 이고분들은 목곽묘의 형태들 하고 있다.

노출전시관
노출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무덤 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 전시하여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축조 방법과 유물 부장상태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29호분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왕묘로 추정되는 주요한 무덤이며 청동솥, 최초의 가야 도질토기 등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39호분은 이보다 100년 정도 늦은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29호분을 일부 파괴하고 축조하였다. 이러한 무덤간의 중복축조는 대성동고분을 비롯한 금관가야 무덤축조 방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세력교체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출전시관에 있는 고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릉 정상부에 무덤이 조성되어 있다.


23~24호묘(4~5세기). 이곳은 2기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사신문양거울, 굽은칼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인 청동거울. 여러가지 무늬와 사신이 표현되어 있으며, 손잡이 주위에 작은 꼭지가 달려 있다. 기원후 1세기 무렵 중국 후한에서 만들어진 거울이다. 청동거울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다양한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대부분은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라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굽은칼 (중앙박물관 전시)


이곳은 18기(5~22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호랑이모양띠고리, 방패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청동 방패꾸미개, 4~5세기, 김해 대성동 무덤, 바람개비 모양으로 나무나 가죽으로 된 방패에 붙인 것이다. 뒷면에는 방패에 매달기 위한 고리가 있다.


이곳은 4기(1~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판갑옷, 재갈, 물미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말갖춤. 후기 북방계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남쪽편에서 본 대성동 고분군이 있는 구릉. 예전에는 주변이 농경지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청동 방울, 4~5세기, 김해 대성동 무덤. 속이 빈 둥근 통 속에 청동 또는 철로 된 작은 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장대에 꽂아 사용한 것이다.

대성동고분군 무덤배치의 특징
본 대성동고분군에서는 2차에 걸쳐 분묘들이 중복축조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제1차는 3세기말, 제2차는 5세기초의 일이다. 이러한 분묘의 중복축조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례가 없는, 김해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제1차 분묘중복축조는 이 무렵 김해로 갑자기 대거 유입된 순장.도질토기.북방계 갑옷 및 투구.기승용말갖춤등의 북방문화를 근거로, 이 문화를 소유한 북방주민이 김해로 이주함에 따라, 전시기의 분묘를 파기하고 그들의 무덤을 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특정 북방주민의 이주설이다. 그 외 분묘중복은 친족관계에 있는 분묘들이란 견해와 묘역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제2차 분묘축조현상은, 이후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하여 김해지역에서는 지배자의 무덤이 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쇠퇴를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하다. 이곳 노출전시관의 부지에서도 많은 무덤들이 중복축조되어 있었으며, 29호분과 39호분의 목곽묘도 그러한 중복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대성동고분군 남쪽에 있는 박물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내부


금관가야 기마인물상. 이 기마상은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자료를 바탕으로 관련학자들이 자문을 받아 실제 크기로 복원제작한 것으로 가야시대 기마무사의 무기와 갑옷형태, 말갖춤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최상위계층 무사의 모습, 김해 예안리고분군의 인골을 토대로 복원했는데 북방계 얼굴을 하고 있다.


상위계층 무사 모습, 북방계에 가까운 얼굴이다.


중간계층 무사 모습, 예안리 고분군의 인골을 토대로 복원한 남방계에 가까운 무사.


금관가야 하위계층 무사의 모습,


김해 대성동 구분군 전경


공원 광장에 세워진 조형물. 중간간에 범종이 걸려 있다.


고분 앞에 세워진 기마인물형토기. 가야무사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토기로 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토기는 이 곳에서 출토되지는 않고 김해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사적 341호, 경남 김해시  가야의길 126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와 김해공설운동장 사이의 동서로 뻗은 구릉지대에 있는 가야의 무덤들이다. 길이 약 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 지대로, 경사가 완만해 무덤이 있기에 매우 적합하다. 현재 구릉의 정상 일부분을 제외한 주변의 경사지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걸친 지배집단의 무덤 자리로 고인돌을 비롯하여 널무덤(토광묘), 덧널무덤(토광목곽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 등 가야의 여러 형식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구릉 주변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고, 구릉 정상부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어, 삼한시대 구야국 단계에서 금관가야 시기까지의 무덤이 발견되고 있다. 덧널무덤은 나무판을 조립하여 널(관)을 만든 것으로, 이전에 통나무관을 이용하던 것에서 나무판널을 사용하는 시기로의 전환이 1세기경임을 보여준다.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목류, 중국제 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우리나라 고대무덤 형식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며, 중국제 거울이나 토기류에서 한·중·일의 문화교류 상황을 밝혀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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