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사원은 바위로 된 벼랑을 동굴을 파서 만든 사원으로 인도에서 시작되어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에도 전해졌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불교문화재인 석굴암 또한 인공적으로 만든 석굴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석굴사원은 수도자들이 더위와 비를 피하여 명상을 하기 위한 장소로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때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석굴사원군으로 인도의 아잔타 석굴,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앙아시아의 키질, 투루판의 베제클릭, 둔황석굴, 중국의 윈강 석굴 등이 그 규모도 크고 잘 알려진 석굴들이다. 그 중 막고굴이라고 불리는 둔황 석굴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 이후 오호십육국의 전진이 지배하던 4세기부터 원나라때까지 끊임없이 조성되었다. 막고굴에는 불상들과 벽화로 꾸며져 있으며, 불경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가 발견되기도 한다. 20세기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서들이 둔황의 장경동에서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석굴사원의 가치가 재조명되었으며, 이 시기에 서구인들은 벽화를 떼어가는 등 약탈에 가까운 방법으로 석굴사원의 유물들을 반출하여 세계각지의 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중앙아시아 석굴사원에서 약탈한 문화재들을 다수 소장.전시하고 있는데 투루판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초에는 세계적인 중앙아시아 유물 수집의 유행이 있었는데, 이때 일본 교토 니시혼간지의 주지승인 오타니 고즈이라는 사람이 대규모의 자본과 인력을 동원하여 3차에 걸쳐서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났는데, 현지에서 약탈과 구매 등의 방법으로 무려 5천여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집했으며 이를 오타니 컬렉션이라고 있다. 많은 중앙아시아 유물들을 수집한 오타니가 파산을 하게 되면서 이를 구매한 일본 자본가 구하라가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를 위해 조선총독부에 이를 기증하면서 오늘날까지 그 유물이 남아 있다. 오타니 컬렉션은 전체 유물의 1/3은 한국에, 1/3은 중국뤼순에, 1/3은 일본에 남아 있다고 한다. 투루판의 베제클리 석굴사원과 토욕구 석굴사원에서 수집한 벽화편은 당시의 야만적인 유물수집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들로 벽면에 칠해져 있던 벽화를 떼어내어 옮겨 왔는데, 원본이 손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사례는 서구 각지의 둔황유물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석굴사원과 벽화
중앙아시아의 종교 유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석굴사원은 서역북도에 집중되어 있다. 투루판지역의 베제클릭, 토육, 야르호, 셍김아기즈와 쿠차지역의 키질, 쿰트라, 키질가하와 같은 유적이 유명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앙아시아벽화 중 대다수는 투루판의 석굴사원에서 가져온 것이며, 쿠차지역의 벽화도 일부 소장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막고굴이라고도 불리는 둔황석굴. 4세기 오호십육국 전진때부터 원나라때까지 천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조성된 수많은 석굴사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곳 석굴사원 중 하나인 장경동에서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었다.
둔황에서 발견된 드리개
20세기 초에 중국 간쑤성에 위치한 둔황에서는 수많은 문서와 불화가 발견되었다. 이 중에는 좁고 긴 천으로 만들어진 드리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전문용어로는 '번'이라고 부른다. 사찰 내의 탑이나 불당 안팎에 드리워 아름답고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상용되었다. 번에는 보살이나 불교의 수호신을 그려 넣은 경우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보살 그림 드리개(Banner with bodhisativa images), 둔황, 10세기. 이 드리개에는 풍만한 신체를 지닌 보살이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선으로 그려져 있다. 이와같은 변화 있는 선은 중국회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그 영향이 이 지역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현재보다 더 길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보살이 그려진 드리개, 토욕구 석굴사원, 8~9세기, 앞뒷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드리개이다. 상단의 삼각형 공간에는 작은 불좌상이 있고, 그 아래에 몸을 한쪽으로 약간 틀고 있는 보살이 서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어깨에는 휘날리는 천의를 두르고 있다.
여행하는 승려, 둔황, 9세기, 인도, 중앙아시아, 동아시아의 많은 승려는 중앙아시아의 사막과 고원을 가로지르며 불교의 교리와 진리를 배우거나 포교를 위한 여행을 하였다. 대표적으로 중국 당나라의 현장 스님은 불교 경전을 얻기 위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갔고, 16년 후에 많은 경전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종교적인 진리를 위해 머나먼 여행길을 불사하는 이와 같은 승려의 모습은 이상화되어 그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 그림에는 경전을 등에 지고 여행하는 승려와 그를 호위하는 호랑이와 부처가 그려져 있다. 세련된 느낌은 적지만, 승려의 얼굴 표정과 화려한 채색이 인상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베제클릭석굴사원, '베제클릭'은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그림으로 장식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한 벽화가 많이 남아 있는 베제클릭 석굴사원은 서역북도에 위치한 투루판 일대에서 가장 큰 석굴사원군이다. 원래 80기 이상의 불교와 마니교 석굴이 만들어졌으나, 현재는 50기 정도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장막, 투루판 베제클리 석굴사원 15굴, 10~12세기, 회랑 벽면과 천정이 만나는 부분에 그려진 장식문양이다. 구슬로 장식된 장막을 석굴내부에 친 듯한 효과를 낸다.
사막에 핀 신앙의 꽃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러 교역로를 통해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와 같은 다양한 종교가 중앙아시아로 전해졌다. 종교활동을 위해 세워진 많은 사원은 여러 신의 모습과 종교적 철학, 아상향, 신도 등을 표현한 그림과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10세기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이전의 동투르키스탄 지역에서는 불교가 특히 성행하였다. 이곳의 여러 불교 사원에는 헬레니즘 미술과 인도, 페르시아, 중국의 요소가 섞인 불상과 벽화가 남아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글씨가 있는 벽화 단편, 베제클릭 석굴사원, 10~12세기, 위구르어와 한자로 쓴 명문이 있는 벽화 단편이다.
천불도, 투루판, 6~7세기, 우주에 현재하는 불법 등을 상징하는 천불도의 일부이다. 동일한 크기의 불상을 반복하여 배열하면서, 채색을 달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다른 천불도와 비교할 때, 매우 간략한 표현과 부처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물결무늬가 특징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명왕(Vidya-raja), 베제클릭 석굴사원, 10~12세기, 분노에 찬 모습을 한 채로 화염에 둘러싸여 있는 명왕의 하반신에 해당하는 벽화이다. 베제클릭 제20동굴의 중당 벽화에서 확인되는 유사한 도상에 의거하여 볼 때, 이 상은 6개의 팔을 지니고 각각 칼, 도끼, 법륜 등을 든채 오른쪽을 향해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벽화단편, 투루판, 10~12세기
천불도, 베제클릭 석굴사원, 6~7세기, 우주에 존재한 불법을 상징하는 천불도의 일부이다. 동일한 크기의 불상을 반복 배열하면서, 채색을 달리하여 변화를 주었다. 베제클릭 석굴사원 벽화 중 이른 예로 응명법과 리파스리줄리로 만든 안료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서원화(Pranidhi scene in Bezeklik Caves), 베제클릭 석굴사원, 베제클릭 석굴사원에서 그 형식이 완성되고 널리 그려진 대표적인 벽화로 '서원화'가 있다. 석가모니가 각기 다른 전생에서 당시의 부처(현재의 시점에서 볼 떄 과거불)로 부터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 이야기가 한 화면에 앞축적으로 그려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원화(복제품), 베제클릭 석굴사원, 10~12세기. 석가모니가 전생에 상인으로 태어났을 때 부처를 공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서원화(왼쪽)의 오른쪽 하단부분이다. 두명의 인물이 나란히 앉아 넓은 쟁반에 공양물을 담아 왼쪽에서 서 있는 부처에게 바치고 있다. 인물의 얼굴과 복장에서 구체적인 표현이 두드러져 벽화가 제작된 당시 이 지역에서 볼 수 있었던 특정 유형의 인물을 모델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원화, 베제클릭석굴사원(복제품), 10~12세기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이었을 때(왼쪽), 석가모니가 전생에 수행자였을 때(가운데),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이었을 때(오른쪽)
지금은 위구르 전통 마을이 남아 있는 투루판 동쪽에 위치한 토욕구의 석굴사원. 이곳은 서유기에 등장하는 화염산 골짜기에 해당하며, 천산산맥의 눈이 녹아내린 물이 투루판분지로 흘러드는 계곡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기준으로는 외진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막과 황무지로 이루어진 투루판지역에서 그나마 사람의 통행이 많은 교통로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관음보살, 투루판 토욕구, 8~9세기, 토욕석굴은 고창고성에서 동북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46기의 석굴은 5세기 말과 7세기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 그림은 마포에 그린 그림으로, 중앙에는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이 있으며, 그 주위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예배하는 보살과 인물이 여럿 그려져 있다. 관음보살이 쓰고 있는 높은 모자의 정면에는 관음보살이 모시는 부처인 아미타여래가 작게 표현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마니교 그림, 투루판 토욕구, 10~12세기, 마니교는 기원후 3세기 이란 지역에서 태어난 마니라는 인물이 조로아스터교를 근간으로 여러 종교의 요소를 더해 만든 종교이다. 중앙아시아에 전래된 초기에는 소그드인이 주로 신봉했고, 8세기 이후에는 위구르인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특히 8세기 시베리아 남쪽에 세워진 위구르왕국은 마니교를 국교로 삼았고, 840년 투르판의 고창 고성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위구르인들의 마니교 신앙은 계속되었다. 투르판 지역에서는마니교 사원, 회화, 경전이 적지 않게 발견되었다. 이 작품은 토욕구에서 발견되 마니교 그림의 일부분이다. 열린문을 향해 걸어가는 세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마니교도 특유의 흰 두건과 옷을 입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년 ~ 1948년)는 영국 런던에서 유학을 했던 혈기넘치는 젊은 인텔리로 일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젊은 주지승이자 학승이었고, 27세가 되던 젊은 나이에 1차원정(1902년 ~ 1904년)을 가서 1914년까지 총 3차까지 원정을 떠난다. 둔황과 쿠차 등지의 예술품들을 구입하거나 약탈해와 소장을 하고 있었는데, 니시혼간지(西本願寺)의 파산으로 일부를 당시 일본의 재벌인 구하라에게 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1916년 구하라의 고향친구였던 데라우치 총독이 있는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었다. 물론 구하라가 그냥 선물로 준 것은 아니고, 조선광산채굴권에 대한 뇌물로 준 것이다.[출처 필요] 이 물품들은 해방 후 국고에 귀속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오타니의 전체 소장품은 무려 5,000점이나 되었는데, 그 중 1/3은 일본에, 나머지 1/3은 한국에 나머지는 중국 뤼순에 분산되었다. 승려였던 오타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혜초가 당나라 승려가 아니라 신라의 학승이라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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