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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문왕릉(사적 181호)과 통일신라말 혼란기를 보낸 효공왕릉(사적 183호)

younghwan 2012. 6. 1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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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김정명)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이 귀족들을 제압하고 통일이후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한 왕이다. 또한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대체로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대에는 9주와 주.군.현을 정비하는 등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관리에게 지급되던 녹읍폐지하여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켰다.

 신문왕릉은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낭산은 신라에서 신성시 여기던 장소 중 하나로 남쪽끝에는 문무왕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사가 있었고, 신문왕릉은 그 남쪽으로 4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은 둥글게 흙을 쌓은 봉토분으로 통일신라 왕릉 중에서는 규모가 큰 편으로 밑둘레가 92m에 달한다. 봉분의 밑둘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꼴모양의 보호석을 설치해 놓고 있다. 신문왕릉이 위치한 곳은 지금도 경주와 울산을 연결해주는 7번국도가 지나가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울산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의 주적이라고 할 수 있는 왜(倭)가 울산을 통해서 가장 빨리 공격해 올 수 있는 곳으로 문무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이 교통로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 왕릉의 주요한 입지요건 중 하나로 주적의 공격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문왕을 이은 아들들이 성덕왕, 효소왕을 비롯하여 원성왕, 신무왕 등 통일신라 전성기 왕들의 무덤들이 7번국도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릉.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던 시기에 조성한 왕릉으로 아직 당나라의 능묘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괘릉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상석이 놓여 있고 둘레석을 제대로 쌓은 가장 오래된 왕릉으로 보인다.


봉분 앞에 놓여진 상석.


신라왕릉 중 화강석으로 둘레석을 높게 쌓고, 사다리꼴로 생간 보호석을 설치한 첫번째 왕릉이다


뒷편에서 본 신문왕릉


신문왕은 삼국통일 이후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다른 왕릉에 비해서 관리가 잘 되어 있는 편으로 왕릉 출입문으로 솟을대문이 있고, 주위에는 담장을 둘렀다.


옆쪽에서 본 신문왕릉

신라 신문왕릉, 사적 181호, 경주시 배반동
이 능은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김정명)이 모셔진 곳으로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능은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 92m, 지름 29m, 높이 7.6m이다. 밑둘레에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5단으로 쌓은 뒤 사다리 꼴로 생긴 44개의 보호석을 설치하였다. 동쪽에는 크고 긴 돌로 쌓은 상석이 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고, 국학을 두어 인재를 양성하였다. <출처:경주시청>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을 위해 세웠다는 낭산 북동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효공왕은 신라 52대왕(재위 897~912년)으로 진성여왕을 이어 통일신라말기 극도의 혼란한 시기에 재위했던 왕으로 재위기기간동안 진성여왕대의 혼란이 이어져 국토의 대부분을 궁예와 견훤에게 빼앗겨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후사가 없이 죽어 박씨인 신덕왕이 그 뒤를 이었다. 봉분은 높이 4.3m, 지름 22m크기로 둘레석이 남아 있지 않고 문.무인석 등 석물들이 없는 단순한 형태의 무덤으로 혼란했던 통일신라 말기에 당나라 능묘제도를 버리고 신라 전성기이 진흥왕릉이나 무열왕릉 등과 비슷한 형태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릉 주변에 조성한 46대 문성왕릉과 47대 헌안왕릉과 비슷한 취지로 삼국통일후 지방호족세력과 귀족세력을 제압한 신문왕의 업적을 이어받고자 하는 바람으로 신문왕릉과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상 남쪽편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릉에서 효공왕릉으로 들어가는 길. 도로 서쪽편 마을 안쪽에 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안쪽 언덕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효공왕릉


전성기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왕릉과는 달리 상석이나 석물 등이 거의 없으며 둘레석으로 쌓았던 자연석이 일부 남아 있다.


봉분 주위에 남아 있는 둘레석으로 사용했던 자연석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조성된 왕릉이지만 그 입지는 낭산 남쪽의 넓은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좋은 자리에 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효공왕릉이 있는 마을에서 왕릉으로 들어오는 길


효공왕릉에서 보이는 신문왕릉

신라 효공왕릉, 사적 183호, 경주시 배반동
이 능은 신라 52대 효공왕(재위 897~912, 김요)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4.3m, 지름 22m 크기로 둥글게 흙을 쌓은 타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으며,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의 무덤이다. 효공왕은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16년간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견휜과 궁예가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세우고 신라의 영토를 침범하여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으나 평정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사자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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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월성동 | 신라신문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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