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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_정원

서울 혜화동 장면가옥, 한옥과 양옥이 절충된 1930년대 개량한옥인 제2공화국 장면 총리의 사저

younghwan 2012. 11. 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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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의 거리 대학로와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 주택가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개량 한옥인 장면가옥이다. 이 가옥은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 내각 수장인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선생이 살았던 가옥으로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지은 주택으로 기존 한옥건물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욕실과 화장실을 실내에 배치하고 전통한옥의 대청마루가 거실 형태로 바뀌는 등 양옥의 형식이 반영된 1930년대 개량한옥의 전형을 보여주는 가옥이다. 가옥은 살림집이라 할 수 있는 안채와 양옥으로 지어진 손님을 맞는 공간인 사랑채, 수행원과 경호원이 머무는 2동의 작은 부속채로 이루어졌다. 대문입구에 골목에서 안채를 볼 수 없도록 담장을 설치하고, 별도의 출입문으로 사랑채를 출입하게 만들어 놓고 있는 점에서 양옥이지만 기존 한옥의 기능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 주택이다.

 장면선생(1899~1966년)은 일제강점기에 카톨릭계열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해 카톨릭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해방이후 제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로 국무총리와 부총리를 역임하고, 한국전쟁때는 외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4.19혁명 이후 내각책임제 정부에 내각수반인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이듬해 5.16쿠데타로 실권하였다. 민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장면가옥, 종로구 명륜동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통령, 내각책임제인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1899~1966)이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건립하여 서거할 때까지 30년 남짓 거주하였던 곳으로 근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장소이다. 장면의 처남인 건축가 김정희가 설계하여 지은 이 집은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이 원형대로 잘 남아 있으며, 한국, 일본, 서양의 주거 양식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전통 한옥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욕실과 화장실의 내실화, 대청의 거실화 등 1930년대 주택 개량 운동과 신주거 문화 운동의 영향이 드러나 있어, 근대 주거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가치가 있다.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장면가옥이다. 1937년에 지어진 한옥과 양옥의 형식이 절충된 개량한옥의 형태가 잘 남아 있는 건축물로 살림집인 안채, 접견실이라 할 수 있는 양옥으로 지어진 사랑채와 경호원.수행원이 머무는 작은 부속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옥은 대학로가 있는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으로 연결되는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는 저택이다. 축대를 쌓아서 지면보다 약간 높게 대지를 조성하여 그 위에 집을 지었다.


주택을 출입하는 대문. 지금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으며, 기념관 형태로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 건국 이래로 한국정치를 대표하는 인물 중 그가 살았던 공간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면서 일반에 제대로 개방하고 있는 가옥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기념관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접견실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이 대문 오른편에 있다.

장면, 1899 ~1966년
본관은 인동, 세령명은 요한, 호는 운석으로 서울 종로구 적선동에서 부산 세관장을 지낸 장기빈과 황루시아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 일제하에서 교육과 종교활동을 통해 카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하였으며, 광복 이후 카톨릭계를 대표해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8년 5.10 총선거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제1공화국의 제2대 국무총리와 부통령, 그리고 내각책임제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가였다. 특히 1948년 대한민국에 대한 유엔의 승인과 1950년 6.25전쟁 시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며 대한민국의 건국과 수호에 발군의 역할을 한 외교관이었다. <출처:서울시청>


마당 한쪽편 경호동 건물 옆에 세워진 장면선생 흉상

장면가옥의 가치와 구조
대한민국 제1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운석 장면 선생의 사택, 1937년 건축가 김정희의 설계에 의해 한.양 절충식으로 신축되었다. 1930년대의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현재 안채를 비롯해 사랑채, 경호원실, 수행원실 단층 건물 4개동이 남아 있다. 이 집을 지을 당시 장면은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재직중이었으며, 이 집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 장면은 주미대사와 같은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류하거나, 부통령과 제2공화국 국무총리 시절과 같이 공직에 나갔을 떄를 제외하고는 1966년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출처:서울시청>


장면선생 가옥은 앞면 6칸에 '-'자형 한옥의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 화장실과 욕실을 건물 내부에 배치하고 서양식 유리창을 사용하는 등 서양식 가옥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옆면칸수를 크게 하면서 내부 공간은 넓은 편이며, 대청마루로 되어 있는 가운데 2칸은 거실의 형태로 바뀌었으며,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방과 대청마루에 유리문을 달아서 내부가 밝고 개방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기와지붕은 기존 한옥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서까래 아래에 유리창을 두어 내부가 밝게 유지될 수 있도록하고 있다. 이는 전통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형식이다.


대청마루에서 거실로 그 용도가 바뀐 개량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청마루. 그 양쪽으로 넓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살림집인 안채는 기존 한옥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접견실로 사용되는 양옥건물의 형태를 하고 있다. 넓은 거실과 서재 등을로 구성된 크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다. 마당 정원은 담벼락 앞에 작은 수목들이 심어져 있기는 하지만 안채 앞 마당을 비워놓고 있는 정원을 조성했던 일본식 가옥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통 한옥 마당을 유지하고 있다.

작두펌프
지하에 관정을 묻고 심층수를 끌어 올리는 작두펌프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집들이 우물이나 작두펌프로 물을 떠올려 사용하였다. 다른 이름으로는 우물펌프, 무쇠펌프, 옛날펌프, 작두샘이라 불리운다. 작두펌프는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랜기간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 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붓는 한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아무리 많은 양의 물이 지하에 저장되어 있어도 마중하는 한바가지의 물이 없다면 심층수를 퍼 올릴 수 없게 된다. <출처:서울시청>


마당 한쪽편에 있는 수도가 없던 시절 상수도 역할을 했던 펌프가 남아 있다.


안채 오른편 마당에 있는 장독대. 크지 않은 규모로 실제 사람이 살던 가옥의 장독대 모습이 남아 있다.


뒷마당은 넓지 않으며, 한쪽끝에 수행원이 머물던 공간인 작은 부속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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