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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산성_읍성)

강화산성(사적132호), 동문인 망한루와 주변 성벽

younghwan 2013. 5. 2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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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산성에는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또한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을 두고 있으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파괴했던 것을 숙종대에 석축성으로 중수하였다. 강화산성 4개의 성문 중 동문은 염하를 건너는 나루터인 갑곶진과 한강을 오가는 선박들이 정박하는 연미정 부근으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동문은 안쪽으로는 '망한루', 바깥쪽에는 '강도동문'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행궁과 관아가 있는 관청리 일대와 직접 연결되는 출입문으로 주로 강화부를 방문하는 관리들이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산성 동문은 구한말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2000년대에 복원하였다. 당시 프랑스군은 동문을 돌파하여 강화부 관아와 행궁을 불태우고 규장각에 있던 많은 도서들을 약탈해 갔다. 동문 동쪽에는 낮은 동산과 평지를 지나서 남문과 연결되는데 동문과 남문 사이의 성벽들은 대부분 허물어져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반면에 동문 서쪽은 강화산성 북장대가 있던 북산과 연결되는데, 성문 주변을 제외하고는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남아 있는 성벽들은 복원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 다른 곳에 성벽에 비해 원래 조선시대 성벽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강화도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때 고려조정이 도읍을 옮기고 40여년간 항전을 했고, 조선 인조때 청나라가 1차침입인 정묘호란때는 국왕이 피신하였고, 2차침입인 병자호란때에는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했으나 왕자들을 비롯한 많은 중신들이 피신하였으나 청나라에 함락되어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계기가 되었던 곳이다. 또한 구한말 병인양요때는 프랑스군에 함락되어 행궁은 불타고, 외규장각의 많은 도서들이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사적 132호로 지정된 강화산성은 조선시대 행궁과 관아가 있었던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남산, 북산, 고려산을 연결하는 읍성과 산성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는 성곽이다. 강화산성은 고려때 몽골에 항전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현재보다는 그 범위가 훨씬 넓었다고 한다. 고려가 쌓은 강화산성은 육지를 마주보고 있는 염하(강화해협) 해안에 토성으로 외성을 쌓았다. 또한 외성 안쪽 선원사 절터가 있는 선원면에서 갑곶진 주변 등에 길이 9 km정도의 중성을 쌓았으며, 강화읍 주위에 내성을 쌓았다. 현재 남아 있는 강화읍성은 고려시대 내성에 해당하는 규모로 조선초에 쌓았던 것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른다.

강화산성, 사적 132호,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산성은 고려가 몽고의 침입에 맞서 고종 19년(1232)에 수도를 강화로 옮기면서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 당시 강화에는 내성.중성.외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조선시대에 개축되어 현재의 강화산성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 일부가 파과되었으나, 숙종 36년(1710)에 강화유수 박권이 다시 석성으로 고쳐 쌓아 현재와 같은 규모가 되었다. 산성의 둘레는 7,122m이며, 성벽의 높이는 약 3m, 너비는 4m 내외이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4개소가 있고, 암문이 4개소, 수문이 2개소 있었다. 성문의 문루는 남쪽에 안파루, 서쪽에 첨화루, 북쪽에 진송루, 동쪽에 망한루가 있다.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 민진원이 건립하였고, 안파루는 쓰러진 것을 1973년에 다시 복원하였으며, 진송루는 원래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에 김노진이 건립하였다. 망한루는 각종 문헌 사료와 발굴조사 결과에 기초하여 2003년에 복원하였다. <출처:강화군청>


강화산성 동문인 '망한루'. 강화유수부 관아와 행궁이 있던 강화읍 관청리 동북쪽 언덕에 세워진 성문으로 한양에서 강화를 방문하는 관리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성문으로 보인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이 성문을 돌파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다고 하며, 성문은 그 때 불타버렸던 것을 2000년대 고증을 통해서 복원하였다.


성문 안쪽으로 보이는 강화읍 관청리. 지금도 이 성문을 통고하면 5분거리에 강화군청을 비롯한 크고 작은 관청들이 들어서 있다.


동문 바깥쪽에는 '강도동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조선후기에 축성했던 다른 성문과는 달리 옹성을 설치하지는 않고 있다. 이는 강화도에서 전투는 주로 해안가 외성과 돈대에서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기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009년 강화산성 동문


성문 주위에 설치한 여장. 강화산성 동문 부근은 도심과 가깝기때문에 성벽들이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아 있지는 않다.


강화산성 동문 안쪽, 관아와 연결되는 길. 멀리 남장대가 있는 강화읍 남산이 보인다.


강화산성은 동문 옆 낮은 언덕과 민가들이 있는 평지를 지나 남문과 연결된다. 남문과 동문사이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는데, 최근에 성벽이 복원되고 있다.


성벽은 바까쪽에는 큰 돌로 석축, 안쪽은 토성처럼 흙을 쌓은 석축성 형태를 하고 있다.


강화산성 동문에서 강화읍 북산으로 이어지는 성벽. 동문 부근에는 성벽이 허물어져 민가들이 들어서 있으나, 마을을 지나면 원래의 성벽이 그 원형을 유지하면서 남아 있다.


성벽이 있던 자리 안쪽에 오래된 고목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곳에 관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 뒷편 강화산성 성벽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내려다 본 동문 주변 성벽. 이곳에서 남문까지 성벽이 허물어졌다.


마을 뒷편 강화산성 성벽이 시작되는 지점. 성벽은 원형에 가까이 보존되어 있는데, 복원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성벽이 잡초에 덮혀 있다.


마을 뒷편 능선을 향해서 이어지는 성벽


남아 있는 성벽의 석축은 양호한 편에 속하지만, 허물어진 부분도 많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강화산성 동문 주변 성벽.


강화산성 동쪽편 마을과 들판. 동문에서 연미정으로 길이 이어진다.


한강수운을 따라 배로 연결되는 교통로에서 강화유수부 관문이었던 '연미정'이 있는 월곶돈대. 이곳은 한강하구가 내려다 보이는 강화에서도 경치가 빼어난 곳 중 하나로 군사조직인 월곶진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강화읍 북산으로 이어지는 성벽길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화산성 동문 주변


성벽은 북산 주위를 둘러싸면서 연결되고 있다. 이곳에는 성벽 일부가 허물어져 지금은 출입문 역할을 하고 있다.


북산 정상부 북장대로 이어지는 성벽


북장대로 올라가는 길. 최근에 나무를 베어내고 주변을 정비하고 있다.


산성안에 피어 있는 봄꽃

 


* 참조: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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