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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부산의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younghwan 2013. 6. 1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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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중국 동북지역과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15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최초의 국가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역사와 같이 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벼농사를 비롯한 농업기 크게 발전하면서 대규모 마을이 형성되고 사회적으로 계급이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기술의 발달로 청동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지만 청동으로는 주로 신분이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검, 제사의식에 사용되는 청동의기를 주로 만들었으며, 실생활에서는 돌을 갈아서 만든 간석기와 목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주로 서.남해안지역이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흔적들은 당시의 매장방식인 고인돌의 분포에서 살펴볼 수 있다.

 부산지역은 한반도 동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고, 수영천 등 하천이 흐르고 있어 구석기시대 이래로 인류가 정착해서 살아왔던 지역 중 하나이다. 부산지역에서는 반여동.노포 등 등의 집터를 비롯하여 생활유적인 패총,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 등이 다양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당시 청동기인들이 살았던 지역은 주로 바닷가와 하천주변의 낮은 구릉지대로 그 중 온천천과 수영천이 흐르는 하천 주변인 동래가 중심지역이었다고 한다.

부산의 청동기문화
약 3천5백년 전부터 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로 접어든다. 신석기시대와 달리 벼농사를 비롯한 곡물재배의 농경이 본격화되고 청동기.간석기.민무늬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된다. 부산지역의 청동기인들은 바닷가와 하천 주변 혹은 낮은 구릉지대에 살면서 농경과 어로생활을 병행하였는데, 이와 관련한 많은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 부산지역에서 확인된 청동기시대의 주요 유적으로는 반여동.노포동.온천동.기장 방곡리 집터를 비롯하여 감천동.미음동.가덕도 고인돌, 사직동 돌덧널무덤, 조도패총 등이 있다. 아가리에 구멍을 뚫어 장식한 구멍무늬토기.화살촉.돌칼.돌창.돌도끼.돌끌.반달돌칼.가락바퀴 등 여러 종류의 유물이 출토된 반여동.노포동 집터와 조도패총은 부산지역의 청동기시대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감천동과 미음동.가덕도 고인돌은 부산지역 청동기인들의 매장형태와 관습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출처:부산박물관>

농경문화와 생활도구
청동기시대의 큰 특징은 벼농사와 밭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문화의 성립이다. 불탄 쌀.기장.수수.조.보리 그리고 곡식 이삭을 따는데 이용된 반달돌칼.돌낫 등은 농경생활의 흔적을 잘 보여준다. 농경문화의 등장과 발전은 생산력의 증대뿐만 아니라 생활양식의 변화와 기술의 발달을 가져 왔으며, 그 결과 다양한 종류의 도구가 만들어지고 마을 주위에 울타리와 도랑을 두른 환호취락이 출현한다. 청동기시대 생활도구는 돌을 갈아 만든 간석기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목기도 농경용이나 일상도구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밖에 소수지만 청동도끼나 끌 같은 청동기는 공구용으로 이용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민무늬토기,


붉은간토기,  청동기시대 기원전 7~5세기, 괴정동 유적


반달돌칼(청동기시대 기원전 7~6세기), 가락바퀴


돌칼, 홈자귀, 갈돌, 대패날


돌도끼, 청동기시대 기원전 8~6세기

청동기와 간석기
청동기시대 유물은 크게 청동기.석기.뼈연모.토기.토제품.장신구 등으로 구분되며 이 중 민무늬토기와 함께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것이 청동기와 간석기이다. 청동기는 다른 유물에 비해 수량이 적고 집자리나 무덤 등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유물로는 비파형동검.거친무늬거울.화살촉.청동도끼와 청동방울 등 의식용구가 있다. 이같은 청동제품은 당시 유력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고,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이용되었다. 간석기는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으나 청동시대도 여전히 중요한 생활도구였다. 간석기는 쓰임새에 따라 공구용.농경용.사냥용.무기용으로 나뉘며, 이 중 돌칼과 화살촉은 청동기와 함께 주로 고인돌과 돌널무덤의 부장품으로 많이 출토된다. <출처:부산박물관>


돌칼, 청동기시대 기원전 6~5세기, 감천동유적


돌화살촉


청동도끼, 청동꺽창


세형동검, 청동기시대 3~2세기

 한반도에서 철기가 처음 사용된 것은 평안도 청천강 유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을 피해서 연나라 세력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고조선에서 위만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하게되면서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세력들이 한반도 서남부로 이동하면서 철기문화는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고,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성읍국가들이 생겨나면서 한반도에 삼한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산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성읍국가들이 자리잡게 되는데 그 중 변한12국 하나인 독로국이 부산 동래지역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독로국의 유적들로는 복천동 고분이 잘 알려져 있고, 여러지역에 패총, 무덤, 집터 등이 남아 있다. 이후 삼한시대에 삼한 소국들은 연맹을 맺거나 통합되기도 하는데 부산지역은 구야국과 더불어 금관가야의 중추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철기사용과 사회의 변화
철기는 인류문화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생활도구였다. 철제농기구의 사용으로 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를 가져왔고, 생산력의 증대는 인구 증가를 가져와 사회를 급격히 변화시켰다. 철은 청동에 비해 원료가 풍부하고 채취와 제작과정이 용이하여 사회의 구성원 대부분이 소유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금속기시대가 전개되었다. 돌로 만든 농공구와 민무늬토기는 점차 사라지고, 철제 농기구가 이용되면서 논과 밭의 적극적인 개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생활의 무대가 구릉에서 평지로 바뀌며 평지의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무기도 철로 바뀌고, 철제 무기가 많아지면서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 세력이 강한 나라가 주변지역을 정복하면서 고대국가가 탄생한다. <출처:부산박물관>


야요이계 토기, 삼한시대 기원전 2세기, 동래 내성유적


청동거울, 가락바퀴


철덩이리, 화살촉, 낫, 따비, 도끼, 칼


복천동분묘군 출토유물, 삼한시대 2세기

독로국의 성립
중국의 고대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있고, 그 안에 작은 나라들이 있었다. 지방의 작은 나라의 성립은 여러 지역에서 정치세력이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부산에서도 이 시기에 '독로국'이라는 소국이 발전한 것으로 비정된다. 문헌상으로는 이 시기 거칠산국.내산국.장산국 등이 부산에 존재하였다고 하나 서로 같은 정치세력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삼한시대 유적은 현재의 온천천 주변 낮은 지대에 주로 분포한다. 이 중 동래패총과 복천동분묘군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집단에 의해 남겨진 중심유적으로 판단된다. 이 나라라는 원거리 항해를 통해 대외무역을 주도하면서 왜 및 진한.마한 소국들과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독무덤, 삼한시대 3세기, 노포동분묘군


화로모양토기, 굽다리접시, 항아리, 노포동분묘군 출토유물,

삼한인의 식단
삼한시대의 음식물 조리는 아궁이 위에 물을 담은 연질 독을 놓고 그 위에 음식물을 담은 시루를 얹어 찐다. 국.찌개같은 국물이 있는 음식은 항아리나 독에 담아 끓인다. 조리된 음식물을 국자와 주걱으로 퍼서 식기에 담는다. 칸막이접시.크고 작은 각종 독, 항아리.굽다리접시.보시기.바리 등에 쌀.조.콩.수수.기장 등의 곡류와 각종 야채, 닭.오리.사슴.소.멧돼지.노루 등의 육식동물과 생선.조개 등의 해산물 등 계절에 따라 만든 요리로 차려진 밥상에 가족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한다. 이것이 삼한인의 식단이다. <출처:부산박물관>


자연유물, 삼한시대 기원전3세기, 동래패총


나무칼, 삼한시대 기원전1세기, 광주 신창동저습지


가락바퀴, 뼈바늘, 원반형토제품, 칼손잡이, 동래패총 출토유물, 삼한시대, 기원전 3세기


아궁이모양토기, 삼국시대 6세기, 김해 봉황동 유적


독, 소형독


대형독,

변한인의 성형풍습
인간이 타고난 본래의 모습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화장 또는 문신을 하거나 장식품을 걸치기도 한다. 이것은 인체를 변형시키지 않고 인체의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 혹은 감추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며, 신분.계급.종족.성별을 구분하기 위한 치장이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인체의 특정 부분을 변형시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는 유아의 이마부위를 강제로 눌러 두개골을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 이를 뽑는 발치, 도구를 넣어 아래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방법등이 행해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성형수술이었다. 이마를 눌러 편평하게 만든 편두는 변한인의 인체변형의 풍속의 하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정상인골, 삼국시대 4~5세기, 김해 예안리고분군


발치인골, 삼한시대 기원전 2~1세기, 사천 늑도 유적


편두인골, 삼국시대 4~5세기, 김해 예안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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