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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 해방 이후 한국전쟁기의 부산

younghwan 2013. 7. 2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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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국제무역항으로 역사이래로 대일교류 창구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유일하게 왜관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부산항과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한 부산도심은 구한말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된 이래로 부산.일본간 페리선과 경부선 철도를 바탕으로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교토의 중심지로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부산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는 이런 전통적인 이미지와 함께 해방 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동포와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의 유입으로 단시일내에 급격히 팽창한 도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산비탈에 빽빽히 들어선 판자집, 좁은 도로, 많은 사람들로 번잡함과 활기를 보여주는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등의 시장풍경 등은 해방 이후 고난에 찬 당시 사람들의 처절한 생존투쟁이 부산이라는 도시의 주요한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로서 서울에서 많은 행정기관, 학교 등이 자리를 잡았으며, 전쟁이 필요한 물자와 구호물품 등이 부산항을 통해서 들어왔으며 이와 관련된 독특한 문화들이 생겨났다. 지금도 부산이라는 도시는 생존의 치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라 할 수 있다.

해방8년사와 부산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된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까지의 8년은 5천년 우리 역사에서 보면 극히 짧은 기간이나 그 역사적 내용은 민족사의 물줄기를 예기치 않게 바꾸어 놓은 시대 전환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해방의 벅찬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념에 의한 민족 분열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고, 전쟁으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현재 진행형의 역사로 남아 있다. 부산은 해방 8년의 역사에서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부산항에 쏟아져 들어오는 귀환동포의 물결로 우리 민족은 조국이 해방되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주적 통일 국가 수립이 좌절되고 본격적인 분단시대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던 한국전쟁에서 부산은 임시수도로서, 한반도 전역에서 모인 피난민의 삶터로서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출처:부산박물관>

해방에서 분단으로
1915년 8월15일 우리민족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의 기쁨을 맞았다. 독립을 위해 36년간 처절하게 투쟁했던 우리 민족은 즉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에 착수하였다.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빠르게 조직되었고 부산에도 지부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분리되어 3년에 걸친 미국과 소련의 군정통치가 실시되었다. 우리 민족 내부의 정치세력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결국 1948년 이념과 체제를 달리한 두개의 정부가 남과 북에 각각 수립되어 분단은 현실이 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귀환동포의 유입과 부산사회
해방이 되자 부산항은 철수하는 일본인들과 해외의 귀환동포를 맞이하는 항구가 되었다. 귀환동포는 일제강점기 생업을 위해 해외로 이주하거나 강제 징용.징병을 통해 일본과 남태평양 등지로 끌려갔던 사람들이다. 당시 귀환한 동포의 수가 200만이 넘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부산항을 통해 귀환하였다. 귀환동포들 중 고향에 돌아가도 뚜렷한 생계수단이 없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부산에 정착하였다. 이들로 인해 해방 이후 부산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으며, 실업난.주택난.식량난 등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한국전쟁
1948년 분단국가 수립 이후 남북한의 대립은 점점 격화되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전격적으로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국내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미군과 유엔군이 개입하고 이후 중국군이 가세함으로써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결하는 최초의 전쟁이었으며 이후 동.서간 냉전의 벽은 더욱 두터워졌다. <출처"부산박물관>

피란민 도시, 부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하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 종착지는 부산이었다. 1951년 '1.4후퇴'로 최대를 이룬 피란민의 숫자는 70만 명을 헤아렸다. 운 좋은 사람들은 피란민 수용소나 민가의 방을 얻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40여만명이 살던 도시에 70만 명이 갑자기 들어왔으니 모든 것이 부족했다. 부산은 삽시간에 생존투쟁의 장으로 변했고 이로 인한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일을 찾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거리, 산비탈에 빽빽히 들어선 판잣집, 공동으로 쓰는 우물과 변소 등 당시 풍경은 피란만들의 고달픈 삶을 말해준다. <출처:부산박물관>


정부고시, 1953년, 식량절약을 위한 정부의 고시문으로 정부는 계속되는 식량난을 완화하기 위해 음식점 및 여관에서 의무적으로 30%의 잡곡을 섞을 것을 지시하였다. 당시 식량난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도민증, 한국전쟁기


생활필수품 배급통장


정부양곡곡가조절미배급통장, 거주증명원


식량표.식량배급통장.KAPX 배급통장, 전쟁의 혼란 속이었으므로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인플레는 심각했다. 정부는 부족한 물자의 효율적 사용과 인플레를 완화하기 위해 식량 및 중요 생필품을 통제,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일반인들은 배급통장을 가지고 필요물자를 배급받았다. KAPX배급통장은 군인 및 군무원용 배급통장이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지방장관회의 지시사항, 1951년


DDT살포기

유엔군의 참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1950년 7월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유엔군 결성과 한국전파병을 이끌어냈다. 유엔의 깃발 아래 16개국이 직접 참전했고, 5개국은 의료지원단을 파견하였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가 초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참전한 유엔군은 9월15일 국군과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킴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다. 자유의 이름으로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세계 젊은이들 중 3만7천명이 고귀한 생명을 잃었고 11만 5천 명이 부상하였다. 1951년 1월18일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전사한 유엔장병의 영령을 안치한 유엔묘지가 조성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 미해병대 전투일지, 1954년

유엔원조활동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은 유엔군 파병과 함께 경제적 원조를 위한 신속한 조치를 취하였다. 도쿄주재 맥아더 사령부 보건후생부 산하 한 부서를 한국에 파견하면서 시작된 유엔의 원조활동은 크게 두가지 측면으로 전개되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민간인에대한 구호를 목적으로 식량, 의약품 등 긴급물자를 원조하는 활동과 파괴된 한국 산업을 재건하기 위한 원조활동이 그것이다. 유엔의 원조는 휴전 후에도 지속되어 우리경제와 전후 복구사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한국민사원조사령부상징로그, 한국민사원조사령부는 한국민사처라고도 불렸으며 1953년 7월 기존의 주한국련군민사처를 개편하여 설치한 기구였다. 주요 업무는 식료품, 의약품, 의류 등 전시간급구호원조와 소규모 경제부흥사업을 담당했다.


이승만대통령의 찬사포스터, 1953년


밀가루포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 식량원조의 주요품목인 밀가루포대이다. 식량원조는 지속적인 식량난에 허덕이던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군.대민 지원 동판, 미군의 원조동판

북진과 중국군 개입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힘입어 1950년 9월28일 서울이 탈환되자 한국정부는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보고 북진을 주장하였다. 유엔이 38선의 원상복구를 지시했던 결의를 통일로 바꾸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38선을 돌파하여 10월19일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후 북한이 밀고 내려왔던 것과 같은 속도로 북진을 계속하여 10월말에는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하였다. 유엔군이 압록강에 이르자 자국 안전에 위협을 느낀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퇴각하였고 38선 인근에서 교착된 양측간의 전쟁은 지루한 소모전으로 변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임관사령장, 정훈교정, 제대증서


북진통일.휴전반대 포스터,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부터 지속적으로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1953년 휴전협정이 가시화되자 이대통령은 남한만의 단독북진을 주장했다. 임시수도였던 부산시내에서는 휴전반대와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시위가 매일같이 일어났다.


법랑컵,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이 사용한 법랑컵이디며, 중국이 한국전에 참여한 명분인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구원한다'는 자구가 새겨져 있다.


군사우편, 한국전쟁기에 만든 군사우편이다. 1952년 이승민 대통령 취임과 1953년 7월 휴전협정 조인을 기념한 봉투 도안이 이채롭다.


재향군인수첩, 국민방위군.제2국민병, 1950년 12월 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어 17~40세의 장정들은 지금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제2국민병으로 편입하였다. 국민방위군은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로 지원에 의해 펴입하였다. 1.4후퇴시 수뇌부의 보급물자 착복과 무리한 후퇴로 1,000명이 훨씬 넘는 장정들이 기아와 추위에 굶어죽은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전단


귀순증

배움에 대한 열정, 전시 피란학교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 몇 개월동안 모든 학교가 문을 닫아 교육활동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1951년 초 전쟁의 와중에서도 교육을 중단할 수 없다는 취지아래 교육활동이 재개되었다. 2월19일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이 발족되었고, 2월 26일에는 문교부가 '전시교육특별조치요강'을 공포하여 임시수도 부산에서 피란학생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였다. 기존 교육시설이 국군 후방시설과 전쟁 이재민 수용시설로 징발 당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원조물자로 천막이나 판자교실을 지어 수업을 하였고 이것마저 어려웠던 경우 노천에서 수업을 진행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학교시설동원현황


초등교과서, 중등교과서, 고등학교교과서


이대 67주년 기념식 안내장, 1953년


전시학생증, 통신부


국문학교정, 1952년, 동래공립중학교 25회 졸업기념

전시중에 펼쳐진 문화활동
1951년 1.4후퇴 이후 임시수도 부산은 피난대열에 참여했던 중앙과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로 인해 삽시간에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들은 궁핍하고 힘든 피난 생활 속에서도 작품활동을 지속했고, 많은 문화예술 관련 서적출판, 전시회, 공연이 이루어졌다. 문화활동은 전시라는 특수 상황으로 인해 종군작가단과 예술인 종군제도가 만들어져 운용되기도 했다. 당시의 작품들 속에는 예외없이 전쟁과 피난생활의 고단함이 베어 있다. '소'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은 유명한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 한끼 식사와 맞바꾸기도 했다. <출처:부산박물관>


국어국문학(1954년), 지구의 비극(1953년), 별


극단 신협의 햄릿공연 안내, 1951년, 통영 출신의 극작가 동랑 유치진이 각색하고 연국배우이자 연출가인 이해랑이 연출을 맡은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의 부산극장 공연 안내 팜플렛이다.


대한민국 방송조직망


대한도기 그림접시, 대한도기는 1917년 일제가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부사부 목도 영선정(현재 영도구 봉래동)에 설립한 조선경질도기가 그 전신으로, 전후복구 이후 근대적 공업생산방식의 부산지역 명실상부한 도자업체였다. 대한도기의 화가들은 생활도자기와는 달리 장식품, 기념품, 수출품으로 제작되는 특별한 제작공정에 참여하여, 한국적인 풍속화류나 특별한 풍경 그림을 소재로 작품을 남겼다. 전시된 접시는 핸드페인팅 된 추당의 작품으로 <널뛰기>, <다듬이질>, <바둑>이다. <출처:부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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