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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은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큰 대도시이자 제1무역항으로 세계와 연결되는 관문역할을 하는 도시이다. 부산은 선사시대 이래로 일본과의 교류 창구가 되었던 지역으로 고려말 이후 일본의 요구에 개항된 삼포 중 하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일본과의 유일한 교류창구였던 초량왜관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19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으로 인천, 원산과 함께 개항된 부산은 근대도시로의 발전이 가장 빠르게 진전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장점으로 부산은 인천과 함께 교통.통신을 비롯한 근대적인 문물이 빠르게 도입되었으며 현대적인 도시로의 변화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국제적인 무역항으로서 인프라인 항만시설이 구축되었으며, 서울을 거쳐 중국으로 연결되는 철도망은 1905년에 개통되었으며, 통신인프라인 우편,전신,전화망 또한 철도망과 함께 구축되어 근대도시로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전차와 도로의 개설로 항만 부근에 형성되었던 도시는 관아가 있던 구도심이라 할 수 있는 동래지역까지 확장하게 된다. 또한 근대화와 함께 서양식 교육 또한 급속하게 보급되어 다른 지역과는 다른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도시의 문화가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통의 발달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9년 9월 개통된 제물포~노량진선이었다. 경부선은 1905년 1월 영등포~부산 초량간을 개통하였다. 1908년 4월 중앙동까지 철도를 연장하고 새로운 역사는 1910년 10월에 준공되었다. 경부선은 부관연락선과 연계되어 일본의 공산품이 조선으로 들어오고, 조선의 농산물은 일본으로 반출되는 제국주의 경제 수탈의 기본 수단이었다. 전차는 1899년 한성에서 첫 개통된 이래, 부산에서는 1915년 부산우체국~동래온천장 구간이 처음으로 운행되었다. 이후 전차는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일부노선이 변경되기도 하였다. 전차의 운행으로 동래는 부산에 점차 편입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1920년대 부산역


철도신호등


내선만 선차 시각표, 조선철도약도(1914년)

전차의 선로
일본인 회사인 부산궤도 주식회사는 1909년 6월 경편궤도 부설권을 받아 1910년 부산진과 동래부간의 경편궤도 운수를 개시하였다(실제는 11월). 이 회사는 1910년 조선전기와사주식회사에 모든 권리를 양도하였다. 조선전기와사주식회사는 우선 부산진~초량간, 초량~부산우편국앞의 전철을 부설, 부산진~동래간 경편궤도를 개량하여 전차와 경편철도를 병용하는 노선 1915년 10월 준공해 11월1일 운수를 개시했다.<출처:부산박물관>
 

통표휴대기, 일제강점기


조선철도지도와 안내서, 일제강점기 1910년


부산자동차학원 신입생 모집광고(1922년), 전차표

통신의 보급
우리나라 근대식 우편제도는 1884년 우정총국이 설치되면서 시작되었으나, 갑신정변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1895년 재개되었다. 부산에는 1895년 10월 동래우체사(다음 해 부산우체사로 개칭)가 개설되어 우편업무가 시작되었다. 우편업무를 보조하는 우표와 엽서가 등장하였으며, 1884년부터 전신선을 가설하여 전보를 취급하였다. 전화는 1896년 서울~인천 간에 처음으로 사용된 후 부산에서는 1903년 첫선을 보였다. 통신의 발달은 제국주의 침략의 한 방편으로 이루어졌다. <출처:부산박물관>


1930년대 부산우편국


조선통신협회잡지, 조선통신사업연혁사(1938년)


Ferry 선내 발송 우편물, 엽서봉투와 편지봉투


엽서, 일제강점기

전화의 역사
1876년 벨에 의해 발명된 전화는 복잡한 기호의 조합에 의해서만 소통이 가능했던 모스전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일반대중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전기통신의 새 지평을 열었다. 최초의 통화방식은 자석식이었으며, 1908년 공전식, 1935년 자동식(기계식)에 이어 1970년대 이후 현재는 전자식 전화기가 상용되고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자석식 전화기
벨에 의해 전화가 발명될 당시의 전화가 자석식 전화기이다. 전화기의 핸들을 돌리면 발전기가 회전하여 신호가 송출된다. 전화를 하기 위한 통화전류를 보내는 전지가 각 전화기에 갖춰진 것도 이 전화기의 특징이다. 자석식 교환대를 사이에 두고 전화교환이 가능하여 전화기와 전화기를 접속하는 전화선 이외의 것은 일체 불필요하다는 간편함때문에 비상용 전화. 공사용 전화. 철도전화 등에 사용된다. <출처:부산박물관>


탁상형 자석식 전화기


벽걸이형 자석식 전화기


탁상형 자석식 전화기, 일제강점기 1920년

공전식전화기
자석식 전화기의 단점을 해결한 것이 공전식 전화기이다. 공전식 전화기는 모든 가입자의 통화전류를 전화국의 축전지에서 공급하는 공동 전지식으로, 가입자가 수화기만 들면 회선에 직류전류가 흘려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를 점등시켜 교환원을 호출할 수 있게 되었고, 교환원 역시 상대가입자를 간단한 스위치 조작만으로 호출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다이얼과 핸들도 없이 단순한 형을 하고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탁상형 공전식 전화기와 벨상자

개화기 교육
개항 이후 서양문화의 수용과 근대화의 필요에서 신교육이 보급되었다. 개항 초기 학교설립은 종교적인 색채가 강했으나, 점차 일반 민간인이 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민간인 설립 학교는 원산학사(1883년)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근대교육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1905년 이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자 학교설립 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성격을 지녀, 선각자들에 의한 학교설립이 급증하였다. 부산에서도 개성학교(1895년).일신여학교(1895년).동명학교(1907년) 등을 비롯하여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이 시기 교육은 애국정신의 함양, 민족의 각성과 단결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표로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졸업증


정선산학


대한제국교과서


필기구, 대한제국기

일제강점기 교육
일제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양성하고, 일본 국민다운 품성을 함양하는 것을 식민교육의 목표로 내세웠다. 각 학교에는 일본인 교사가 채용되고, 조선의 역사.지리 대신 일본의 역사.지리를 가르쳤다. 교육 내용은 기초과학보다 실업교육에 치중하여 조선인 기능공을 양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일제는 1930년 만주사변 이후 조선의 물적 인적 자원을 수탈하면서 조선 민중의 저항정신을 무마하기 위한 술책으로 조선인의 민족성을 없애고 일본천황의 신하로 만들려는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조선어와 조선역사 교육이 없어지고 일본어와 일본역사교육이 강요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사립학교 관계서류


교과서 사용인가서류, 일제강점기 1935년

황국신민서사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한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등을 내세워 일본제국주의가 암송을 강요한 글이다. 1937년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화쇄신.국민정신함양의 명목으로 보급하였으며, 학교.관공서.은행.회사.공장.상점 등의 모든 직장의 조회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낭송이 강요되었다. 문안은 친일파인 이각종이 썼다고 한다. <출처:부산박물관>


동래공립고등학교앨범, 일제강점기 1937년


일제강점기 교과서


기장공립보통학교 졸업장(1936년), 동래공립중학교동창회지, 부산제2공립상업학교25년사, 동래 일신여학교 회보

부산의 민족해방운동
부산은 1876년 개항으로 일제 침략의 근거지였던 까닭에 반일 항쟁이 치열하였다. 1907년 초량객주, 지역유지, 부인회 등이 참여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처음 일어났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애 영남지역 유력인사들이 대동청년단(1909)과 조선국권회복단(1915) 등을 조직했다. 특히 이들 단원 가운데 부산에서 활동한 자들은 부산 3.1운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3.1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기미육영회(1919), 부산예월회(1919)의 문화운동 계열과 부산청년회(1920), 동래청년화(1922)의 사회운동 계열로 구분되었다. 한편 신간회(1927)와 근우회(1928) 부산지회의 창립은 부산의 사회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이 더욱 광범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사상통제가 강화되자 학생운동과 대중운동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특히 1940년 11월 23일 발생한 부산항일학생운동은 가혹한 전시통제체제 속에서도 민족혼이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독립선언서(1919년), 독립운동신고서(일제강점기)


윤현진선생 장례사진, 상해임정재무부차장 윤현진의 임정국장을 상해 외국인묘지 정안사에서 치렀을때 참가한 임정요인들. 윤현진(1892~1921년). 양산군 소토리 출신으로 동래부윤을 지낸 윤필은의 아들이며, 구포은행을 설립한 윤상은의 조카이다. 구포 구명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의춘양행을 설립해 일본 상품을 배척하는 소비조합운동을 벌였고, 백산상회, 구포은행 등에서 활동하면서 민족기업 육성에 기여했다. 3.1운동 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재무차관을 맡아 독립자금 확보에 주력했다. 1921년 순국했다. <출처:부산박물관>


3.1운동 상감, 1946년


신간회 부산지회 창립, 1927년


박차정의사 교지, 일제강점기. 박차정(1910~1944년). 동래 복천동 출신으로 동래일신여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항일전신이 강한 집안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925년 동래일신여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했고, 1929년 7월 근우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해 11월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확산을 위해 활동하던 중체포되었다. 출옥후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원봉과 결혼하고 1936년 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인회를 결성하였다. 1944년 순국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면암선생 충혼가, 면암 최익현이 1906년 을사조약에 항의하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쓰시마에서 옥사했다. 시신의 부산으로 운구되어오자 초량객주들이 설립한 초량학교 학생들이 그의 애국심을 애도하는 내용의 충혼가를 지어 부른 내용이다.


안희제 친필서한. 안희제(1885~1943년). 경남 의령군 출신으로 을사조약 체결 후 신학문을 배워 지방의 근대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1909년 대동청년당 조직, 1914년 백산상회 설립 등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 후에는 백산무역을 통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부산에서 기미육역회 부산예월회 등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1932년 북만주 발해농장을 건설해 영세농민을 이주시키기도 하고, 대종교에 입문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출처:부산박물관>


남유연명록과 박재혁열사 부산경찰서 폭파사건판례문(1920년). 남유연명록은 백산 안희제, 회당 장석영 등 당시 유학자이면서 독립지사들인 44명이 경상남북도 일대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집이다. 내용 중에 부산의 장산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지은 시를 비롯하여 부산을 근거로 하여 부산에서 지은 시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당시 부산의 모습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박재혁(1895~1921년). 부산 범일동 출신으로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고를 졸업했다. 1915년 최천택, 오택과 함께 비밀결사인 구세단에 가담했다. 1916년 부산상고를 졸업한 후 상해를 몇차례 왕래하면서 김원봉과 독립투쟁에 투신할 것를 결의하였다. 1920년 9월14일 서적상으로 변장하여 부산진경찰서로 들어가 서장에게 폭탄을 던졌다. 1921년 5월 옥사했다. <출처:부산박물관>

근대화와 부산의 선각자
일제의 강제 개항 이후 부산의 선각자들은 자주적인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박기종(1839~1907년)은 일찍부터 근대문화 수용의 필요성을 느껴 교육기관을 세우고, 일제의 철도 침략에 대응해 최초의 민간인 철도회사를 설립하였다. 그의 사위 윤상은은 구포의 상인들을 규합하여 조선인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저축회사(1909년)를 설립해 민족자본의 성장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1846년 동래 토박이들이 조직한 동래기영회는 신식문물의 수용과 민족정신 고취를 목적으로 동명학교(1907년)을 설립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가를 되살리기 위해 국채보상운동(1907년)을 전개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교지


박기종 유품


도총 제1.2권, 1898년, 박기종이 청색 미농지에 세모필로 쓴 국.한문 혼용 책이다. 도총이란 글의 제목은 "서울에서 살핀 일을 모은 것"이란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전 2권으로 그 중 제1권은 1898년 그가 외부참서관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1898년 6월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것으로 외교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출처:부산박물관>


박기종 선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