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유일한 대일 교류 창구로서 왜관이 설치되었던 부산은 구한말 강화도조약으로 개항되면서 국제무역항이자 근대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과 연결되는 경부선철도의 개통으로 국제도시로 면모를 갖추게 된다. 조선후기 왜관이 설치되었던 용두산부근 초량지역은 일본 거류민이 늘어나고 일본에서는 관리를 파견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부산과 동래를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되고 도로가 개설되면서 도시의 규모는 점차적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부산도심에는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고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다양한 서양문화가 유입되었으며, 부산과 일본을 왕래하는 페리선과 경부선 열차를 이용하여 많은 사람이 왕래함에 따라 서양문화와 함께 일본 문화 또한 많이 유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부산의 이런 도시적 특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일본문화가 가장 먼저 정착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정책
일제는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합병한 뒤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 지배기구를 설치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을 억누르고 경제를 수탈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의 반일의식을 잠재우고 민족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 술책으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지배방식을 바꾸었다. 1930년 이후 전시체제로 돌입하자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민중을 징병, 징용의 이름으로 강제징발하거나 정신대로 동원하였고, 각종 전쟁 물자를 수탈하였다. 또 황국신민화정책으로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없애고, 친일파를 육성해 그들의 지배와 수탈에 이용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영사관 제정규칙(1894).부산이사청 법규집(1904). 일본 외무성은 왜관 관리를 위해 외무부세관을 파견하고, 1874년 외관의 관수록을 헐고 그 자리에 관리관청을 두고 관리관을 파견하였고, 개항 후에도 계속되다가 1890년 관리청을 영사관으로 대체하였다. 영사관 건물 또한 관리청 건물을 사용하다가 1894년 영사관을 신축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영사관에 대신해 이사청을 두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부산부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합방조인문, 1910년
채권, 일제강점기
대일본부인회원입회 권고문, 대동아전쟁기 친일단체인 대일본부인회가 입회를 독려하는 안내문과 입회원서를 첨부해 부인들을 가입시킨 자료이다.
징병제 기념 경남 애국기 헌납에 관한 건
공동작업포스터, 일제강점기
서양문화의 유입과 생활의 변화
1915년 개통된 전차는 그동안 한나절이나 걸리던 부산~동래간 거리를 좁혀 놓았다. 전차를 타고 부산시내로 놀러갔던 조선사람들에게 각종 서양식 의류, 한 홉의 석유로도 며칠 밤을 밝히는 등잔, 불을 켜는 자기황이라 불렸던 성냥, 만병통치약으로 애용되었던 어을빈약, 얼굴을 안보고도 이야기 나누는 전화기 등은 그동안 듣도 보지도 못한 진기한 물건들이었다. 서양문물 사용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긴 담뱃대 대신 짧은 궐련을 물고, 다방에 앉아 유성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엔카풍 음악을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풍경은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화주의 인기는 치솟았던 반면 조선인의 사랑을 받았던 막걸리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출처:부산박물관>
목재담배함, 술병
재봉틀, 세창양행 담배갑
어을빈약 광고, 1900년, 미국인 어을빈이 만든 만병통치 물약으로 전국적인 인기를 누렸다. 1945년 해방후 부산시장, 경남도지사를 지낸 양성봉씨가 지배인을 맡았다. 이 약은 해방 후에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예술문화활동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문화는 배척되고 서구풍이나 일본풍 문화가 정착되었다. 음악분야에서 전통음악은 서양음악에 밀려났는데, 특히 1930년대 유행하기 시작한 일본 엔카풍은 오늘날까지 일부 나이든 사람들 사이에 불리어지고 있다. 연극에서는 부산 연극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무대예술연구회'의 활동이 부산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이 결과 일본인 자산들이 이들 회원을 기반으로 1924년 '조선기내마주식회사'를 만들면서 부산이 영화 도시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사는 첫 작품으로 <해의 비곡>을 제작했고, 둘째 작품인 <운영전>은 춘사 나운규의 데뷔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시대 문화는 일제가 침략전쟁을 본격화하는 중일전쟁(1937년) 이후에 이르러 철저히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오산사진기점상보(1934년), 광문당 출판책자 목록(일제강점기)
최승희 무용공연 포스터, 홍길동전 영화 포스터
영사기, 축음기
영화포스터
근대화와 생활문화의 변화
서구문화의 유행은 사람들의 몸치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895년 단발령 이후 봉건적인 생활풍습의 상징이었던 상투머리는 잘리고, 소위 하이칼라 머리가 유행하였다. 단발은 그동안 없던 이발사와 이발관이라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냈다. 윤기나는 짧은 머리에 어울리는 양장을 하고 팔뚝에는 시계를 차고, 눈에는 서양식 안경을 낀 모습은 뭔가 새로운 물을 먹은 사람들로 취급받았다. 그리고 사람을 갈아 말려 종이에 붙인 것으로 오인받았던 사진이나, 사람 혼을 뺀다는 마술상자 사진기는 초상사진이나 가족 사진을 남겨 두려는 가족애 덕분에 조선사람들에게 점차 친숙해져 갔다. <출처:부산박물관>
일제강점기 도시 거리를 재현한 모습
시계를 수리하는 모습
사진관
이발소
일제강점기 부산 중심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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