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동남부해안에 위치한 부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항구를 갖춘 무역항이자 제2의 도시라 할 수 있다. 선사시대 이래로 부산은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창구로 역할을 해 왔으며 조선 태종대에 일본에 공식무역항으로 개항된 삼포 중 하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설치된 초량왜관은 일본 에도막부와 조선간의 유일한 교류창구로서 무역항과 실무외교가 펼쳐졌던 곳이다. 구한말 병인.신미양요를 거치면서 조선은 서구열강에 개항요구를 물리쳤으나 일본과는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하면서 서구열강에 문호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기준으로 강화도 조약은 서구열강에 굴복하여 개항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기존에 개항되었던 초량왜관을 확장하고 인천과 원산에 추가로 개방하여 왜관을 설치한다는 입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개방은 부산을 국제무역항이자 항구도시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부산은 원래 왜관이 설치되었던 용두산공원 부근에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되고, 큰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만이 건설되면서 점차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1900년대초에는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실질적으로 일본과 한반도를 철도와 선박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거쳐가는 인적, 물적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다. 만주를 거쳐 중국과 연결되는 경부선철도의 건설과 함께 많은 물자들이 오갈 수 있도록 항만시설은 확장되었으며, 근대적인 도시인프라인 전기, 철도, 도로 등이 갖추어짐에 따라 부산은 국제적인 대도시로 확장되었고, 반면의 부산의 중심지였던 동래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부산의 인문지리적 환경
우리나라 제1의 국제무역항이자 국제공항을 갖추고 있는 부산은 일본과 중국은 물론 아시아.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의 여러나라와 연결되는 제1의 관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부산은 한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한 지정학적 관계로 인해, 중국 및 러시아의 대륙국가와 해양국 일본의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국익과는 관계없이 이들 나라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구석기시대 이래 부산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교류는 매우 빈번하였다. 선사시대는 주로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역사시대 이후부터는 통신사, 부산포 개항, 왜관설치 등의 평화적 교류 뿐 아니라 왜구에 의한 약탈, 임진왜란, 제국주의 침략전쟁 등의 역사적 아픔도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부터 국력이 신장되고 세계 경제권이 태평양 연안 국가로 옮겨지면서, 부산은 우리나라가 태평양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국제무역항으로 부상, 우리나라 제1의 관문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의 지형
부산은 지형적으로 태백산맥의 말단에 위치하며, 독립적으로 분포하는 해발 500m 내외의 구릉성 산지가 해안으로 연결된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평야가 거의 형성되지 않은 동부 구릉성 산지대와 서부 평야지대로 구분된다. 동부 구릉성 산지대에 집중되어 있는 산지는 금정산에서 남서방향으로 백양산(642m), 엄광산(504m), 구덕산(565m), 승학산(496m)을 거쳐 몰운대에 이르는 부산을 동서로 구분하는 금정산맥과, 달음산에서 시작하여 장산(634m), 금련산(415m), 횡령산(427m), 영도의 봉래산(395m)으로 이어지는 금련산맥이 있다. 압록강에 이어 두번째로 긴 하천인 낙동강, 양산시의 원효산에서 발원하여 해운대구 재송동에 이르러 금정산에서 발원하는 온천천과 합류하여 수영만으로 유입하는 총연장 20km인 수영강이 있다. 이외에도 동천.보수천.부산천.대연천.해운대천.구포천 등이 있다. 부산에 분포하는 섬은 총 44개이며, 무인도가 41개, 사람이 사는 섬은 3개에 불과하다. 면적이 20.78㎢로 가장 큰 가덕도가 있고, 영도.조도.오륙도 등이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항의 개항과 전관거류지 설치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가장 먼저 개항된 곳은 부산이었다. 일제는 부산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1877년 부산구조계조약으로 옛 초량왜관 터(현 용두산공원 일대)에 일본전관거류지를 설정하고, 이곳에 이사청.경찰서.재판소 등 각종 통치기구와 법규를 만들어 자치적인 지배를 행하였다. 일본인들은 값싼 일제 공산품수입과 대일 미곡 수출, 조선인에 대한 토지 수탈 등을 통해 재력을 축적해 나갔으며, 전관거류지를 중심으로 도로망 정비, 철도 건설, 항만매축과 부두건설 등 각종 식민지 지배와 약탈에 필요한 기반을 다져나갔다. <출처:부산박물관>
병자수호조규와 병자수호조규부록, 1876년
한.일통상조약체결 기념연회도, 1883년
부산거류민단예규류집, 거류민단법
일본거류지시대 조선견문도해, 1893년, 모두 41매로 이루어진 조선풍물화첩으로 조선 말에 일본인이 조선의 풍속을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글미은 사진자료가 없는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일본인이 그린 것이므로 조선인에 대한 왜곡된 시각도 엿볼 수 있다. 화첩의 내용주에는 메이지 25년(1893년)에 초량동에서 복권을 추첨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화첩의 제작 년대가 1893년과 장소가 부산임을 알 수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항총무회소, 1901년, 개항 이후 일본인 상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인 상인단체가 만들어졌는데, 1889년 부산객주상법회사, 1895년 상무회의소, 1899년 상무회사, 1901년 객주회의소, 1908년 동래상업회의소, 1914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916년 상무회사가 궁내부로부터 인가받은 '부산항객주회의소'규칙이다.
부산의 근대
1876년 개항은 어촌이었던 부산을 도시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 조성한 전관거류지를 시발점으로 식민지 수탈을 위한 시설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와 가옥을 약탈하였다. 한편 조선인들은 신교육을 받아들이고 근대화와 민족주의 교육을 활성화하는 한편, 상업조직을 만들고 은행을 설립하는 등 일본인의 경제침략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합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근대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항만 매립공사, 시가지계획, 도로망 정비와 전철화 등으로 부산을 일본의 식민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게다가 근대 산업시설을 건설하여 조선의 원료와 노동력을 착취하였다. 이에 대해 부산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민족 독립을 부르짖음과 동시에 각 산업별 노동자나 사회단체 등을 조직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했다. 일제는 부산 사람들의 저항을 폭력적으로 제압하는 가 하면, 일부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을 분열시키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실시된 일제의 식민지 교육은 민족교육을 철저히 말살하고 '황민화'를 위한 교육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계속된 투쟁은 해방을 앞당겼다. 해방 후 한국전쟁과 급속한 경제개발로 부산은 부산 사람들의 삶과 정서에 어울리는 도시로 완전히 탈바꿈하지 못한 채 기형적인 발전을 하였다. <출처:부산박물관>
1930년 부산시가지
부산항과 영도다리. 지금의 자갈치시장 부근 앞바다이다.
동래부산도병, 효산 박계익의 작품으로 부산이 개항된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지본담채로서 10폭이며, 산수의 형상, 성곽의 주변, 항만, 선박 등을 능숙하게 묘사하였으며 색감을 조화있게 사용하였다.
. 1폭- 다대포 하단(몰운대, 다대진성)
. 2폭- 영도, 사하구 일대(용두산공원)
. 3폭- 해운대, 우암동, 범일동 일대(부산진성)
. 4폭- 수영일대(수영성)
. 5폭- 명장동, 안락동, 당감동 일대(안락서원)
. 6폭- 복산동, 복천동 일대(동래읍성)
. 7폭- 명륜동 일대(동래향교)
. 8폭- 온천동 일대
. 9폭- 청룡동 일대(범어사)
. 10폭- 금정구 일대(금정산성)
부산항 매축
일제는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 확대 및 조선의 침략과 수탈에 필요한 사회간접시설 확충을 위해 매축사업을 시작했다. 북항 매축은 1902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곳에는 부산역.세관 등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기반시설이 조성되었다. 1909~1912년 영선착평공사가 이루어졌다. 부산진 매축공사는 1913년과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부산진과 우암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이 공사는 시가지 확대계획으로 진행되었고, 공장지역도 조성되었다. 영도 대풍포 매축공사와 남빈매축공사는 연안무역항, 어업항을 목적으로 조성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항 매축계획 지도, 1부두가 완성된 뒤 2,3,4부두를 계획하면서 부산진매축을 준비하고 있는 지도
부산항개요, 일제강점기, 1932년, 경상남도 토목과 편찬. 1932년 11월 발행된 소책자로 당시의 부산항에 대해 기록해 둔 것이다. 그 내용은 부산항의 형성에서부터 면적, 수심, 조위, 해안선, 항만시설의 변천사, 항만시설을 둘러싼 각종 사업 현안을 싣고 있다. 자갈치는 매립이 완공되었고, 자성대 앞 우암동과 남부민동쪽으로 매립 계획중임을 보여준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착형공사보고,
부산안내도, 일제강점기
부산시가지 계획
일제의 부산 시가지 계획은 부산지역 전통 마을인 동래를 대신하는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개항 후 용두산 공원 주변에 일본전관거류지를 만들고, 그 주변을 지배영역으로 편입하였다. 1914년에는 조선인이 많이 살던 초량.부산진.영도, 1936년에는 서면과 송도, 1941년에는 동래까지 확대하였다. 시가지 계획을 통해 편입된 지역은 도로망 확대, 교량 설치, 상하수도 설치 등으로 일본인 중심지와 편리하게 연결되었다. 일제 말 시가지 계획은 대동아공영권의 중심 항만으로 침략정책에 공헌할 수 있도록 추진되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부전도, 1927년데 제작된 현재 자성대 앞 매립계획도
노동출가귀래자 언동에 간한 건, 일제강점기 1937년, 합천군수가 각 면장에게 보내는 서한으로 부산진매축공사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이 일급 1원20전을 받았다는 소문을 내는 것을 단속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통해 부산항 매립공사에 다른 군의 많은 노동자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부산박물관>
부산시가지계획구역 가로망약도, 일제강점기
하천구역인정도, 시기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기존 온천천을 오늘날의 강둑으로 바꾸기 위한 계획도면이다. 이 도면을 통해 옛날 세병교 아래로 지나던 물길의 폭은 아주 좁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진교 준공기념 우편엽서 및 안내장, 일제강점기 1934
부산북국세조사기념청동화병, 일제강점기 19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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